41화.
그렇게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리엘리가 불현듯 말을 꺼냈다.
“혹시 영지 내에 무기점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필요하신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저 말고 제 동생이 사용할 게 필요해서요. 돌아갈 때 선물 사 간다고 큰소리 떵떵 치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사용인을 붙여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르반의 제안에 리엘리는 괜히 앞에 놓인 푸딩을 스푼으로 팅팅 튕기며 우물쭈물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제가 검이나 무기 이런 쪽은 완전 문외한이라서요.”
“그러시군요.”
“네에. 그러니까 저… 미안하지만 아르반이 같이 가서 골라주면 안 될까요? 어차피 이제 우리 아몬이 당신 제자가 되는 건데….”
아르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오늘 귀환 예정이었던지라 급한 일도 없을뿐더러 수도의 저택이 아니기에 처리해야 할 급한 서류 또한 없었다.
“좋습니다. 함께 가죠.”
아르반이 긍정을 표하자 율렌이 잽싸게 고개를 치켜들고 날개를 퍼덕이며 끼어들었다.
“나는? 나도 나가고 싶어. 제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은데….”
“당연히 너도 같이 가야지. 우리가 자리 비운 사이에 누가 널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리엘리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 율렌의 꼬리가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거렸다.
“아, 근데 밖에 나가도 담요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물론 잘 알고 있지?”
“…알아.”
리엘리의 단호한 목소리에 금세 기운이 빠진 율렌이 그녀의 무릎으로 내려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무심코 테이블로 시선을 옮긴 리엘리는 놀라움에 다소 높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너 저걸 다 먹은 거야? 이 작은 몸에 어떻게 저게 다 들어가지?”
“드래곤의 소화기관은 다른 생물들과 달라. 음식물이 들어오면 모두 마력으로 분해돼서 원한다면 끊임없이 먹을 수도 있어.”
“…….”
리엘리는 율렌이 조금 부러워졌다. 인생이란 원래 불공평한 것이지만 유독 그 사실이 강렬하게 박혀오는 순간이었다.
***
나는 시녀에게 부탁해 얻은 구멍이 송송 뚫린 피크닉 바구니에 율렌을 집어넣으며 신신당부했다.
“진짜 절대로 밖에서는 고개 내밀면 안 된다? 마차 안에서도 혹시 모르니까 나오고 싶으면 바구니를 두 번 쳐서 신호를 보내. 알았지?”
“알겠어, 알겠다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지능이 떨어진 게 아니야! 육체가 퇴화해서 감정변화가 심해졌을 뿐이지!”
“그래. 그럼 우리 율렌이 내 말 잘 들을 거라고 믿는다?”
“으, 진짜!”
잔뜩 심기가 불편해 뿔이나 있는 율렌을 쓰다듬는 척, 작은 머리를 은근히 눌러 바구니 뚜껑을 닫아버렸다.
오늘 하루는 굉장히 바쁠 예정이었다.
우리 아몬의 선물도 사야 하고, 로베르 영지로 돌아가기도 해야 하니 어제처럼 한밤중에 도착하면 곤란했다.
‘기껏 열흘이란 기간을 지켜 도착했는데, 아몬 얼굴도 못 보고 잠자리에 들기는 아쉽잖아.’
그렇다고 곤히 자고 있을 애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제시간에 들어가야만 내가 바라는 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율렌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시녀들이 짐을 들어주겠다 친절을 베풀어 왔지만 모두 물리며 꿋꿋하게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마차에 올랐다.
아르반과 함께 마차에 올라 탁, 소리가 나게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바구니를 톡톡, 두드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반대편에 앉아서도 눈치챘는지, 아르반의 눈동자가 순간 바구니를 향했다.
아르반은 곧장 마차 문을 두드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가 출발했다.
서서히 속력을 높이는 마차로 인해 창밖의 배경이 빠르게 바뀌는 와중, 아르반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나와도 된다.”
그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구니 뚜껑이 거칠게 열리며 율렌이 튀어나왔다.
작지만 눈에 띄는 은빛의 드래곤은 몇 번인가 씩씩거리더니 이내 체념했는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힘없는 게 죄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
쪼끄만 게 저러고 있으니까 진짜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율렌이 풀 죽어 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녀석은 금세 내 어깨에 올라앉아 창밖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 또한 말을 타며 보았던 풍경과 다른 느낌을 주는 창문 밖의 거리에 시선을 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마차는 어느새 번화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에 정신을 차린 내가 퍼뜩 아르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순간 당황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닙니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아 말씀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아, 네.”
“다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아르반의 한마디에 율렌은 아무 말 없이 내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들어가기 싫어서 삐진 건지, 아르반이 한 말에 기분이 상한 건지….
시간이 지나면 또 금방 싱글벙글하겠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풀어주고 넘어가고 싶었으나 이제 내려야 했다.
마차에서 내려 주변 건물들에 비해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는 상점으로 들어서니 턱수염이 인상적인 아저씨가 우렁차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십쇼!”
무기점은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이미지였다. 산적같이 생긴 주인장을 포함해서.
중세시대 배경의 RPG 게임에 등장하는 무기점을 형상화해놓은 것 같은 모양새.
‘이런 거친 느낌은 처음이라 새롭네.’
여기저기 한눈을 팔며 눈에 띄는 물건을 들어보려 했지만 내 하찮은 근력으로는 단순히 들어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소설이나 게임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롱소드나 레이피어조차 내게는 버겁게 느껴져, 그제야 현실과 상상 간의 괴리를 절감했다.
결국 눈으로만 주변을 둘러보며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카운터 위쪽에 걸려 있는 거대한 배틀 액스를 구경하고 있을 때, 아르반이 나를 불렀다.
“엘리, 잠시만 이쪽으로 와보시겠습니까?”
“아, 네!”
이런, 아무리 아르반에게 대신 골라 달라 부탁했어도 너무 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하다못해 옆에서 같이 보고 있기라도 할 것을….
미안한 마음에 빠르게 다가가니 그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보였다.
“동생 키가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지 아십니까?”
“어…. 아마 이 정도쯤 왔던 것 같아요. 체구가 또래보다 작고 마른 편이고요.”
내가 손을 들어 올려 대충 가늠하며 말하자 아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사용하기에 무겁지 않고, 검신도 적당한 편이죠.”
나는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을 보며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저렴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성검처럼 화려해 보이지도 않는 적당한 모양의 검이었다.
나는 빠르게 구매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며 하인의 손에 들린 검을 힐끔 보았다.
비록 고급스럽다고 말하기는 민망한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아르반이 골라준 것이니 아몬도 좋아하겠지.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기뻐할 아몬의 모습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리고 자연스레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저기….”
“엘리….”
“…….”
“…….”
내가 운을 뗌과 동시에 나를 부르는 아르반의 음성에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아르반 역시 멀뚱히 나를 주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잠시간의 침묵 끝에 결국 이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내가 입을 뗐다.
“먼저 말씀하세요.”
내 권유에 약간 머뭇거리던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잠시 살롱에 들러 당신이 입을 만한 옷을 사도록 하죠.”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했는데, 내 옷 사러 가자는 거였어?
조심스러운 그의 반응에 덩달아 진지하게 경청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나도 그와 같은 말을 꺼내려 했기 때문에 웃음이 새어 나온 것이었다.
비록 아르반의 허락 하에 입고 있는 옷이었지만, 그래도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가 입던 드레스를 걸치고 있자니 영 마음에 걸렸다.
아닌 척하고는 있지만 아르반의 시선도 자꾸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로 떨어지는 것이 솔직히 신경 쓰이기도 했고….
그리고 오후에는 곧장 집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이 옷을 그대로 입고 갈 수는 없었다.
‘내 짐에 승마복만 한가득이라는 것까지 모두 공작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귀가할 때 드레스를 입으면 안 되지.’
공적인 일 때문이라 큰소리 떵떵 치고 나왔는데 드레스를 얻어 입고 들어가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 때문에 다른 입을 만한 옷을 사는 쪽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떠오른 찰나였다.
“좋아요. 사실 저도 옷 사러 가자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그럼 가까운 살롱에 들르도록 하죠.”
“네. 그래요.”
나는 아르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마차 문이 닫히기도 전에 바구니가 들썩거리기에 즉각 창문의 커튼을 치고 구석진 곳에 바구니를 내려놨다.
내가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바구니를 열자 빼꼼, 고개를 내민 율렌이 바구니에 턱을 걸치고는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그 모습이 조금 가엾어 보여, 나도 모르게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왜, 못 돌아다녀서 서운해?”
“아니, 생각보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고, 비슷해서 재미없어졌어.”
흥미를 갖는 것도 빠르고 잃는 것도 빠르구나.
그래도 얌전한 율렌의 모습에 한시름 놨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간만에 율렌도 조용하니 마차 안 가득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요 며칠간 이랬던 적이 없었기에 생소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이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의외로 아르반이었다.
“엘리.”
“네? 왜요?”
“혹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
대체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