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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40화 (40/153)

40화.

아침부터 신경을 곤두세워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그대로 욕실로 향해 세수를 하고 나오자 마침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왔다.

그 소리에 잽싸게 잠가둔 문 앞으로 튀어갔다.

그리고 드레스만 챙기고 문을 닫으려 하는데, 시녀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려 하기에 혼자 있고 싶다는 핑계로 쫓아내고 잠시 숨을 돌렸다.

드레스는 기본적으로 입을 때 누가 도와주게 만들어진 옷이라 혼자 입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하지만 지금은 율렌이 있는 만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개중에서 가장 단출한 디자인을 골라 집었다.

연한 하늘색의, 원피스에 가까운 심플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곧장 율렌이 들어왔다.

‘쟤는 진짜 어떡하지….’

데리고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무언가 들어 있는 게 확실해 보이는 담요를 내내 들고 다니자니 그 모습이 여간 수상해 보이는 게 아닐 터였다.

잠시 고민해봤지만 다른 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두고 가면 더 불안할 테니, 차라리 수상해 보이더라도 안고 다니는 편이 마음 편하리라.

“이제 밖에 나갈 거니까, 조용히. 알지?”

“알아. 일일이 그렇게 말 안 해줘도 돼.”

내가 노파심에 속삭이자 담요를 둘러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 율렌이 다소 뚱하게 대답해 왔다.

“알았어, 넌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할 거라 믿을게. 응?”

“그럼, 당연하지. 이제 조용히 있을 거야, 말 걸지 마.”

“그래, 그래.”

나는 율렌을 안아 들고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예상대로 아까 그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그래.”

어제는 피곤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저택이 상당히 멋스러웠다.

대리석 바닥은 잘 닦여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고, 커다랗게 나 있는 창문 사이사이에는 공작저와 마찬가지로 마법 램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으로 내려가는 벽면 전체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오색찬란한 빛깔을 뽐내며 제 존재를 과시해 왔다.

‘계단만 보면 저택이 아니라 성당 같네.’

그만큼 성스러워 보이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속으로 감탄하며 눈동자를 굴리는데, 계단이나 천장 등에서 내 예상보다 연식이 있어 보이는 저택의 모습에 약간 의문이 들었다.

아르반에게 듣기로 카넬로웰 대공가는 그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존재했던 가문인데, 저택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꼭 유구한 세월을 지나온 가문 같아 보였다.

이 정도의 예스러움이 묻어나려면 제국의 시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야 할 듯한데….

‘다른 가문의 저택을 매입한 걸 수도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앞장서서 걷고 있는 시녀들 몰래 고개를 획, 꺾어가며 스테인드글라스를 구경하다가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뭔가 유럽의 고성이나 성당을 투어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는데, 시녀들이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식당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문을 두 명의 시녀가 함께 열어주었다.

‘무슨 문을 어떻게 만들어 놨으면 둘이 여는데도 무거워 보이는 거야’

이 저택에는 거대하지 않은 것을 찾는 게 더 어려워 보였다.

아침부터 힘쓰느라 고생한 시녀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작게 눈인사를 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공작저의 식당보다 더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수십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기다란 것이 놓여 있었는데,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이즈였다.

내 시선이 긴 테이블을 따라가다 끝에서 멈춰 섰다.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르반이 나를 맞아 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앉으시죠.”

“네, 고마워요.”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반이 제 오른편에 위치한 의자를 빼주었다. 나는 그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음식들이 잔뜩 세팅되어 있는 상태였다.

수프와 애피타이저, 잘 구운 닭고기 요리, 그리고 샐러드와 빵, 음료까지.

보통은 코스별로 서빙해 오는 식인데, 마치 파티라도 즐기는 것처럼 테이블 가득 미리 세팅된 음식의 향연에 이건 뭔가 싶어 아르반을 쳐다봤다.

그는 내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음에도 시선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율렌을 데리고 오실 거라 생각해 사용인들은 모두 물려두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음식들을 죄다 나열해 둔 거였군.

그때 담요에서 머리를 삐죽 드러낸 율렌이 꼬물거리길래 담요를 치워주었다.

“나도 먹을래!”

“너 여태까지 물만 마셨었잖아. 이런 것도 먹어?”

“그건 맛없는 걸 먹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 마력만 흡수할 수 있으면 사는 데 지장은 없으니 음식물을 섭취하는 건 순전히 기호의 문제거든. 그리고 난 맛있는 건 좋아해.”

“…….”

그냥 미식가였었던 거구만.

“저거 먹고 싶어!”

나는 율렌이 가리키는 초코 케이크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르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얘 줘도 되죠?’

딱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음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에 나는 케이크 접시를 쓱, 끌고 와 율렌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어? 덜어줄까?”

율렌은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눈앞의 제 몸통보다 큰 홀케이크를 야금야금 작은 주둥이를 벌려 열심히 뜯어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몇백 년 만에 먹는 케이크야….”

그 혼잣말에 측은함을 담아 많이 먹으라는 의미로 작은 몸통을 쓰다듬어 주고는 나도 수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몇 숟가락 떠먹는데 이상하게 왼쪽 얼굴이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옆을 보았다가 아직 식사도 시작하지 않고 날 바라보던 아르반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말하면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 것 같은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아르반이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저….”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식기 전에 드시죠.”

아르반은 그대로 뒷말을 삼켜 버렸다.

‘아니, 이 남자가 나랑 장난하나. 말을 하다 말면 난 답답해서 어쩌라고…!’

하지만 내가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반은 그제야 제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르반을 흘겨보며 애꿎은 샐러드를 콱 찍어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일부러 내 속을 터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러니 더 추궁하기도 뭐했다.

나는 걸쩍지근한 마음을 잊고자 눈앞의 식사에 집중했다.

***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씹어 먹는 리엘리를 보며, 아르반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늘색 드레스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실내용 드레스였다.

아르반의 어머니가 간혹 꺼내 입고 산책을 즐기던 약간의 세월이 묻어나는 드레스는 리엘리의 화사한 금발과 어우러져 위화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리엘리가 식당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아르반은 유심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 불쾌해 보이지는 않는군.’

사망자의 의복을 처분하지 않고 보관하는 것은 귀족가뿐만 아니라 평민들 사이에서도 좋게 보지 않는 일이다.

설령 그게 어머니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물며 그 옷을 방문한 손님에게 내놓는다는 것은 더욱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종류의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르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어머니나 형제자매 없이 오직 그 혼자만이 존재하는 저택에 굳이 여성용 드레스를 갖춰 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시녀들의 옷을 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밤늦게 저택에 귀가한 덕에 리엘리가 입고 온 옷을 세탁하고 말릴 시간 또한 충분치 않았다.

정 기분 나빠한다면 제 옷이라도 내어주어야 하나, 하고 순간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옷을 사 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리라고 속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들었던 생각이었다.

오늘로 정확히 열흘.

성검을 찾기 위해 함께한 시간 동안 리엘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여타 귀족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 그리고 예측 밖의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예절과 상식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무례함을 지적할 줄 알고, 기분이 나쁘다면 그것을 굳이 숨길만 한 위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체로 제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히 반응하는 편이었으니.

그렇기에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리엘리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몸을 약간 긴장시키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새 옷을 기다리는 대신 어머니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제 무어라 불만을 토해낼까.

어떻게 돌아가신 분의 옷을 내어 줄 생각을 했느냐, 명색이 대공의 저택인데 손님용 의복 한 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냐.

아르반은 포도를 집어먹는 리엘리를 보며 여러 가지 추측을 나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식사를 하고 있는 리엘리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하기만 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아까부터 묻고 싶던 말이 계속 입안을 맴돌았다.

돌아가신 분의 옷을 걸치고 있는데, 불쾌하지 않냐고. 그리 물어보고 싶었지만 망설여졌다.

평소와 같다 여긴 제 판단이 틀렸고, 사실 그녀가 내심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다면?

애써 눌러 참고 있는 것이 제 물음으로 터져 나와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면?

여태 누군가에게 비난당할 만한 행동은 수도 없이 행해왔고, 그 누가 제게 야유를 퍼부어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그들과 같은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본다면….

과연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까?

아르반은 순간적으로 뇌리를 강타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녀에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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