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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39화 (39/153)

39화.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네, 내일 봬요. 좋은 밤 되시고요.”

그럼에도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느꼈는지, 아르반이 순간 나를 내려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민망한 마음에 슬쩍 눈길을 피해버렸다.

어쩐지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런 내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리란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돌아서서 가주었으면 했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그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왜 그러냐 묻지 않았고 돌아섰다.

나는 오도카니 서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내 마음 역시 금세 평소와 같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니, 그는 애초에 내 이름이나 신분을 밝힐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엘리라는 이름은 흔한 편이니….’

내가 공녀라는 사실을 함구시키는 것보다 처음부터 공녀라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내가 저택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준다는 말에 이런 뜻이 깔려 있을 줄은 몰랐지만.’

미리 알았다면 이리 놀라지도 않았겠지.

나는 시녀장의 안내를 받아 내가 머물 방에 도착했다.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내게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해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시중을 들어드릴 시녀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서둘러 물러나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뇨! 괜찮아요. 시중은 필요 없고, 그냥 갈아입을 옷만 준비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욕실은 방의 오른편에 위치에 있고, 필요한 물품과 샤워가운은 모두 욕실 내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알겠어. 이만 가 봐도 좋아.”

“예.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녀장을 물리고 방문이 탁, 하며 닫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모포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내려다보니 뾰로통한 낯의 율렌이 모포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뭇 불량한 태도였으나 두꺼운 모포를 뒤집어쓰고 숨죽여 있어야 했던 율렌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절로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 튀어 나갔다.

“많이 답답했어?”

“…조금. 그래도 괜찮아. 다 내가 힘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마력만 되찾으면 당당해질 수 있어.”

그래도 제 존재가 노출되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는지,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율렌이 기특해 꼬리와 몸통이 연결되는 부분을 통통 두드려 주었다.

“으구, 그래. 일단 우리 먼저 좀 씻자. 피곤하다.”

내 피곤하다는 말에 율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피곤해? 내가 회복시켜줬는데 왜 피곤하지…?”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오래 여행을 했더니 심적인 피로가 쌓여서 그래. 오랜만에 욕실에서 씻을 수 있으니까, 몸 좀 담그고 자야겠어.”

“정신이 피로할 수도 있구나…. 난 잘 모르겠어.”

그 말에 잠시 율렌을 바라봤다.

드래곤은 인간들과 사고방식이 다르겠지.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보다 튼튼한 멘탈을 가졌겠고.

하긴, 그러니까 수백 년 동안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잠들어 있었음에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진작에 미쳤을 텐데.’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그 부분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기껏 깨어나서도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하는 신세라니….

여태까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이제 보니까 되게 불쌍한 놈이었다.

신나게 떠들 때 좀 성의 있게 대답해 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마음이 쓰였다.

‘한동안 이렇게 남들 모르게 숨어 있어야 할 텐데… 나라도 살갑게 대해줘야지.’

솔직히 아르반은 굳이 율렌에게 말을 붙여 주거나 챙겨줄 만큼 정 많은 사람은 아니니까.

“모를 수도 있지. 자, 얼른 씻자!”

“응….”

율렌을 안고 욕실로 이동하는데 계속 풀이 죽어 보이는 모습에 도대체 또 뭐 때문에 이러나 싶었다.

“왜 그래. 왜 또 기운이 없어?”

“아니. 그냥 내가 마력만 있었으면 마법으로 목욕도 시켜 주고 뽀송뽀송하게 말려도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못 하니까 되게 하찮아진 기분이라 뭔가 이상하네.”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율렌의 모습에 나 역시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렇지만… 난 태어날 때부터 마법을 사용해 왔는걸. 이렇게 무력해 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야.”

“…태어날 때부터? 대단하네.”

빈말이 아니라 솔직히 좀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근데 굳이 씻는 일에 마법을 쓸 필요가 있나? 급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따뜻한 물에 목 끝까지 푹 담그고 있으면 기분도 좋잖아.”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왜 기분이 좋아? 그냥 물이잖아.”

“어….”

글쎄. 참 난감한 질문이었다.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왜 좋냐고 물어보면… 그냥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는데.

“응? 그게 왜 좋냐니까, 엘리?”

앞 다리로 내 팔을 짚으며 고개를 꺾어 올린 율렌이 다시 한번 물어왔다.

나는 율렌을 내려다봤다. 녀석이 은근슬쩍 애칭을 부르는데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까는 처음 엘리라는 호칭을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나.’

나는 적당히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납득하지 못하면 시작될 물음표의 향연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로 토론을 펼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음… 그냥 따뜻한 물에 몸 담그면 좋아. 노곤해 지고…. 아니, 너 목욕 안 해봤니?”

내가 왜 목욕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얘한테 설명하고 있어야 하는거지. 현타가 느껴졌다.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율렌은 큰 눈을 끔벅이며 순진하게 대답했다.

“응, 안 해봤는데? 마법을 사용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해지는걸. 카르세이도 마법을 두고 목욕을 하는 건 비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했고.”

“허… 카르세이가 그랬어?”

인간이 살면서 어떻게 효율만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본래 인간은 냉정하게 이성으로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아니면 그 정도로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고 시간 절약을 해야 제국을 세울 수 있는 건가. 하….’

물론 나도 매번 번거롭게 욕조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씻는 게 귀찮을 때도 많고.

하지만 가끔 여유가 있을 때 입욕제 넣고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피로도 풀리고 얼마나 좋은데.

속으로 카르세이인가 뭔가 하는 초대 황제에 대한 불만을 토해내며 어느 정도 받아진 물의 온도를 재기 위해 손가락 끝을 욕조에 살짝 담가보았다. 딱 좋았다.

“응, 난 거의 카르세이 옆에 있었으니까 내가 마법으로 하루에 두 번씩 씻겨줬어.”

율렌의 얘기를 들으며 옆에 구비되어 있는 입욕제 중에 색이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 부었다.

액상 입욕제는 몇 번 휘저은 것만으로 금세 물에 섞여들어 욕조에 받아진 물을 연한 분홍빛으로 바꿔주었다.

달달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복숭아 향이네.’

향도 색도 모두 마음에 들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물 온도 괜찮으니까, 직접 들어가서 왜 목욕하면 좋은지 체험해봐.”

나는 그대로 안아 들고 있던 율렌을 욕조에 쏙, 집어 넣어버렸다.

***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 몸도 마음도 나른하게 늘어졌다.

성난 파도처럼 자비 없이 밀어닥치는 잠기운을 견디지 못한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어 간신히 준비된 가운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힘겨운 걸음을 떼며 미적미적 침실로 향했다.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라도 달고 있는 양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 와중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율렌은 입욕제가 마음에 든 건지, 물에 몸을 담그는 게 좋았던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가는 것을 꽤 아쉬워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꾸 감기려는 눈을 애써 치켜뜨며 입욕제 냄새가 배어 은은히 좋은 향기를 풍기는 율렌의 은빛 비늘을 수건으로 뽀득 소리가 나게 닦아주었다.

‘얘가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일반 파충류랑 다르긴 하네.’

드래곤이라 그런지 비늘이 정말 하나하나 은을 녹여 만들어 놓은 작품과도 같이 섬세했다.

그렇게 아까보다 매끈해진 율렌을 끌어안고 침대에 쓰러지며 웅얼거렸다.

“꿈꾸기 싫다….”

이렇게 피곤할 때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반쯤 잠이 들려는 때에 귓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꿈꾸기 싫다고?”

“으응….”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눈을 감았고, 그날은 정말 꿈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어찌나 깊게 잠들었는지 아침에 시녀가 문을 두드릴 때에서야 벌써 아침인가, 하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똑똑-

“레이디, 아침 단장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어 왔다.

잠결에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나는 스프링처럼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율렌!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오늘 꿈을 꾸지 않고 단잠을 잤다는 사실도 잊은 채였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얇은 담요가 눈에 들어와 잽싸게 낚아채 왔다.

그리고 이불 위에 몸을 길게 늘어트리고 누워있는 율렌에게 소곤거렸다.

“율렌. 너 혼자 있다가 하녀들이 방이라도 정리한다고 들어오면 안 되니까 어제처럼 나랑 같이 나가자. 얌전히, 가만히 있어야 해. 알지?”

“알겠어.”

율렌에게 담요를 둘러놓고 그 위에 이불을 반쯤 덮어두고는 대기 중인 시녀들을 불러드렸다.

조용히 들어선 시녀들은 어정쩡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예의를 갖추고는 입을 열었다.

“레이디, 죄송하지만 저택에 여성분께서 방문하실 일이 없어 준비되어 있는 드레스가 마땅치 않습니다.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드레스를 구매해올 동안 양해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대략 두어 시간쯤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하다. 오늘은 아몬의 선물도 사러 나서야 하고, 이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가능한 한 빨리 움직여야 했기에, 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냥 입을 만한 옷이면 아무거나 괜찮은데, 마땅한 게 전혀 없어?”

“…사실 돌아가신 주인마님께서 아끼시던 드레스가 몇 벌 남아 있습니다. 만약 레이디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그 옷을 가져다드려도 괜찮을까요?”

돌아가신 마님이라니. 아르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었구나….

가족사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의 옷을 내가 입으면 아르반에게 굉장히 실례가 될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아니라 아르… 각하께 여쭤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실은 각하께서 레이디의 의사를 묻고 괜찮으시다면 준비해 드리란 전달사항이 있으셨습니다.”

“…그럼 입을게.”

내가 긍정을 표하자 시녀는 제 옆의 다른 시녀에게 눈짓했고, 눈빛을 전달받은 이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먼저 방을 나섰다.

그러자 아직 방에 남아 있던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세안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레이디.”

“아니. 씻고 준비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드레스만 가져다줘.”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나가며 들려오는 문소리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

드래곤의 존재를 숨기기란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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