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난 지금 쉬고 싶다는 생각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았다.
“하하… 신기하다, 정말… 아르반도 그렇죠?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하하하…”
나는 대놓고 그에게 바톤을 떠넘겼다.
‘자, 이제 당신 차례야. 뭐라도 좋으니까 얘랑 말 좀 해봐. 나 잠깐 숨 좀 돌리자.’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아르반은 율렌이 아닌 내게 말을 붙여왔다.
“정말 그런 꿈을 꾸셨습니까?”
그는 말이 걷는 속도를 조절하여 더욱 천천히 걷게 만들었다.
마치 중요한 대화라도 시작하려는 듯한 그의 행동에 내가 잠시 의아해하는 사이, 아르반이 다시 한번 나를 불러왔기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대답하기 곤란하십니까?”
“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
“네, 뭐… 나름의 확신이 있었어요. 지금도 봐요. 결국 제 말이 전부 맞았기 때문에 성검도 당신 허리에 걸려 있고, 율렌도 함께 하게 됐잖아요.”
나는 뒤를 힐끔 돌아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신빙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야기였기에 민망하기도 하고, 그가 날 얼마나 한심하게 볼지를 생각하니 좀 우울하기도 했다.
‘내 이미지… 이제 정말 꿈속의 내용을 맹신하는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리겠구나.’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심정이 참담하기만 했다.
우리 사이에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정적이 흘렀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우리 이제 주인 집으로 가는 거야?”
하지만 잠시간의 정적은 율렌의 발랄한 음성에 의해 금세 박살이 났다.
‘잘했어! 그거야!’
이번만큼은 율렌의 질문에 쾌재를 불렀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 냉큼 대답했다.
“아니, 우리 집으로 가야지.”
“…공녀.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지금 들어선 이 구역부터 카넬로웰의 영토입니다.”
“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내가 잠시 의아해하는 사이 아르반이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속력을 내서 달린다면 오늘 내에 영지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만….”
그런데?
“곧장 공작가로 향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루 더 노숙을 해야 할 겁니다.”
아, 나는 그제야 아르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거네.’
하루 더 노숙을 해서라도 바로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그의 영지에 들려 하루 묵고 돌아갈지를.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했다.
“그럼 당연히 아르반의 저택으로 가야죠!”
“…당연히, 말입니까.”
“네. 생각해 보니까 우리 아몬 선물도 사가야 하는데, 빈손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꼬질꼬질한 몰골로 돌아가기는 좀 그러네요.”
물이 넉넉한 덕분에 최소한의 청결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만큼 고생했으면 됐지, 더는 사서 고생하고 싶지도 않고.
하루라도 편할 수 있다면 편하게 지내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공녀의 방문 사실이 유출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또! 또 공녀라고 부르네!
아까부터 은근히 거슬리던 호칭에 내 불만스러운 감정을 표출하듯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직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할 테니 차차 나아지리라 여겨 계속 참고 있었는데, 어째 지적하지 않으면 계속 저 상태를 유지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근데… 왜 자꾸 절 공녀라고 부르세요? 우리 이제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거 아니었나요?”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르반을 돌아봤다.
그러자 그가 잠시 내게 시선을 맞췄다가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익숙지 못해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중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사과였다.
‘매사에 진지하고 믿음직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라니까.’
그게 또 아르반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쪽은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닌데 맥락을 잘못 짚었다고, 당신.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을 생략한 채 대화를 이어가는 그를 위해 친절을 발휘하기로 했다.
“리엘리, 라고 불러주셔야죠.”
“…….”
“리엘리.”
따라 하라고 말을 해줘도 엉뚱한 드래곤만 따라 말한다. 아이구!
“그래. 불러줘서 고맙다, 율렌.”
나는 시선을 아르반에게 고정한 채로 일부러 율렌의 이름을 힘주어 발음했다. 일종의 압박이었다.
그리고 이 행동이 조금은 통했는지 아르반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
“자, 이제 우리 대공 각하께서도 따라 해 보심이 어떨까요.”
내가 유치원생 앞의 선생님처럼 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결국 아르반이 한숨과도 같은 한마디를 토해냈다.
“…알겠습니다, 리엘리.”
“좋아요, 아르반.”
잘하면서 괜히 빼고 그러시네.
만족스러운 느낌에 시원하게 씩, 웃어 보였다.
“앞으로는 계속 이름으로 불러줘요. 우리 서로 그러기로 했잖아요. 또 공녀라고 부르면 이제 부를 때마다 벌금 받는 수가 있어요.”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팩, 돌리며 나름대로 큰소리를 쳤다.
음, 근데 생각해 보니 대공인 그에게 통하는 협박은 아닌 듯했다.
어차피 진짜 돈을 받을 생각도 없고 그냥 신경 써달라는 으름장에 불과하니 상관없겠지.
그는 내 작은 협박에 옅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그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낮을 하고 있었다.
‘…분명 웃은 것 같았는데.’
혹시 어울리지 않게 부끄럼을 타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 사람, 우리 아몬이랑 닮은 구석이 있으니까.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누님이라고 부르던 아몬과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공녀라고 부르는 아르반.
번듯하게 잘생긴 것도 그렇고, 말투도 정갈하며, 먼저 말 안 걸면 입도 잘 안 열고.
앞으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서로 마주하게 될 텐데, 둘의 만남이 실로 기대되었다.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아르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제부터 속력을 내서 달려야 하니, 꽉 잡으십시오.”
내게 경고한 그는 처음 길을 나섰을 때처럼 말을 몰았다. 나는 혀를 깨물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 감탄했다.
‘말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동물이었구나!’
속도감이 오토바이 뺨치는 수준이다.
그래 봐야 이것도 다 율렌이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우리가 불과 반나절 동안 이동하는 사이 율렌이 신성력을 사용한 횟수만 해도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니,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임은 분명해 보였다.
쾌속으로 질주하다 보니 해가 지기 전에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석양을 등졌을 때쯤에는 주변에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곳까지 도달했다.
서늘한 날씨에 온몸으로 칼바람을 맞고 달리니 피부도 금세 차갑게 식어버렸다.
율렌이 신성력을 사용해주면 피부도 원래대로 돌아오고는 했지만 계속 고속 질주하는 말 위에 타고 있으니 회복을 받아도 지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멀리서 도시를 감싼 성벽의 끝자락이 아른거릴 때, 아르반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말을 멈춰 세웠다.
그는 짐 꾸러미에서 모포를 한 장 꺼내 내게 건네왔다.
“이건 갑자기 왜…?”
“곧 있으면 영지 내로 들어설 겁니다. 드래곤의 존재는 오직 저희 둘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사항이지 않습니까.”
“아, 그렇죠. 율렌, 도시로 들어가야 하니까 이제 말하거나 막 움직이면 안 된다? 알았지?”
“…알겠어.”
급격히 텐션의 하락세를 보이는 율렌을 토닥여 모포를 씌우고 품에 끌어안았다.
은빛 비늘이 여간 눈에 띄는 게 아니라서 혹여 꼬리라도 삐져나오지 않았나 꼼꼼히 확인한 후 다시 출발했다.
마침내 카넬로웰 영지 내로 들어섰을 때는 어쩐지 벅차오르는 심정에 율렌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드디어 씻고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겠구나.’
대공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이 단번에 아르반을 알아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도시 구경도 하고, 저택의 외관도 둘러보았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빨리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너무도 간절했다.
우리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하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신입인가? 되게 당황하네.’
신입으로 추정되는 하인은 경비병과 마찬가지로 아르반을 알아보고 곧장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가며 인사해왔다.
그리고는 시녀장을 불러오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귀족가 사용인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달리기를 잘하는 건가.
전에 에이미도 그렇고 저 하인도 뛰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품 안에서 작게 움찔거리는 율렌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두어 사람의 발소리가 넓은 보도를 타고 울려왔다.
“가… 각하! 죄송합니다. 이리 방문하실 경우를 대비하지 못하여 마중이 미흡했습니다.”
중년 여성이 급히 뛰어오던 폼과 달리 단정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왔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당장 사용할 만한 빈방이 있겠지.”
아르반의 덤덤한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던 시녀장의 눈길이 그의 뒤에 가려져 있던 내게로 꽂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놀랐는지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그녀는 아르반의 질문에 착실하게 답했다.
“예.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눈이 마주쳤으니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꾸벅이며 시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늦은 시간에 실례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레이디. 본 저택의 시녀장을 맡고 있는 라니야라고 합니다.”
“시녀장, 준비되어 있는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엘리,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시녀장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내일 뵙도록 하죠.”
나는 순간 멍한 눈으로 아르반을 쳐다봤다.
‘지금, 엘리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놀라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제는 리엘리 로베르라는 이름에 익숙해졌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엘리’라는 애칭은 한순간에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리엘리 로베르, 리엘리, 리리.
내가 빙의하기 전까지 이 몸을 지칭하던 호칭들.
하지만 ‘엘리’는 오로지 현재의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그러나 결코 나쁘진 않았다.
이곳에 온 지 대략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해준 누군가가 생긴 것 같아 묘하게 가슴이 벅찼다.
내가 그렇게 불러 달라 청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저 남자 입에서 ‘엘리’라는 애칭을 듣게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레 남의 애칭을 불러가며 말하는 건….
‘반칙이잖아.’
나는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줬다. 품에 안겨 있던 율렌이 갑작스러운 압력에 조금 꿈틀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