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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37화 (37/153)

37화.

***

아르반은 리엘리를 내려다 봤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리엘리 공녀.”

자신이 공녀… 아니, 리엘리를 만나게 된 이래 가장 환히 웃어 보이던 그녀의 미소가 잠이 든 얼굴에서 다시 한번 잔상처럼 겹쳐 보였다.

신이 난 듯 몇 마디 더 떠들던 리엘리는 이내 피로가 몰려오는지 금세 졸다가 어느 순간 잠들어버렸다.

몸에 모포를 돌돌 말고 머리만 내민 채 곯아떨어진 리엘리를 바라보던 아르반은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눈빛에 시선을 돌렸다.

“리엘리는 벌써 잠들어서 못 들어.”

제 딴에는 잠든 그녀를 배려하려는지 살금살금 기어 아르반의 모포까지 다가온 율렌이 소곤거렸다.

“…알고 있다.”

단지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 불러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르반은 율렌에게 설명하는 대신 자리에 눕는 쪽을 택했다.

쾌청한 밤하늘이 그의 눈동자에 담겼다가 눈꺼풀 안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아르반은 눈을 감고 제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된 날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대략 일 년을 조금 넘겼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시간.

곁에 사람을 가까이하고 아껴봤자 약점이 될 뿐이다.

그 사실은 어린 시절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통감한 바가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가깝게 두지 않았다. 또한 그렇다고 여태 외롭다거나, 공허하다 여긴 적도 없다.

‘앞으로 살아가며 그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리엘리와 율렌의 대화를 듣다가 정말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이름을 불러 달라 요청한 것은 아르반의 충동이자 욕심이었고,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작은 외로움이었다.

누군가 한 명쯤은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아르반은 생각했다.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지만 않으면 된다. 이렇게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서만 부른다면 괜찮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지만 사실 이런 행동은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하등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물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제 이름을 입에 담고 기뻐하는 모습이, 눈을 감고 있는 지금도 자꾸만 아른거렸다.

이제는 타인이 주는 감정에 예전만큼이나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아르반 카넬로웰의 무결에 집착하며, 그것을 통제하던 이는 이미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다만 여전히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황제가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본래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처음 그녀와 산맥에 오르겠다 생각했을 때는 이 일 자체가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 했다.

하지만 리엘리는 공작에게 자신과의 동행 사실을 밝히겠다 말했고, 그때 아르반은 이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리엘리는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한 실정이니, 보호자인 공작에게 알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공적인 면에서만 엮이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

비공식적으로 리엘리 공녀는 다음 대 공작으로 내정된 이였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차기 로베르 공작이 아닌, 일개 공녀에 불과했다면 황제는 아르반의 짝이 될 수도 있는 리엘리를 단번에 주목했을 터.

황제는 제 주변 인물의 안위를 손에 넣고 좌지우지하며 협박하는 것에 있어 망설임이 없는 자였다.

‘전 대공과는 형제임을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같은 성향을 타고난 인간이다.’

하지만 자신을 컨트롤하는 용도로 쥐고 흔들기에 로베르 공작가는 그리 만만한 가문이 아니다.

또한 리엘리와 아르반은 서로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친분 관계를 맺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아르반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공자의 스승으로서 뻔질나게 공작저를 방문해야 할 텐데, 의심의 시선은 애초부터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황제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그저 대공과 소공작에서 그쳐야 한다.’

그녀의 말처럼 공자가 정말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면 황제 역시 미심쩍어 하는 한편 납득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리엘리 공녀와는 앞으로 가르치게 될 아이의 가족으로서 마주하면 되는 일이다.

그 정도가 적당했다. 왕왕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정도의 친분.

아르반은 무의식중에 리엘리의 얼굴을 떠올리다 미세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보다 그 원인을 제거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이름을 부르기로 했던 사실을 무르고,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사실 현 상황도 자신만 따로 귀환했다면 더욱 간단했을 문제였다. 그녀를 기사들에게 맡겨 돌려보냈으면 될 일.

그럼에도 그는 공녀에게 기사들과 돌아가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왠지 그녀를 그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기에.

‘어째서….’

지난번 온실에서 리엘리를 마주했을 때도 그랬지만 그녀의 앞에 서면 유독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게 된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귓가를 스치는 작은 숨소리에 집중했다.

아주 편안하게 잠이든 리엘리의 숨소리였다.

‘…당신은 사람을 조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군.’

아르반은 의식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방금 전까지 이어가던 생각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면만이라도.

다만 알고 있음에도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르반은 살짝 눈을 떠 곤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는 리엘리를 바라봤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경각심이 없어.’

그녀는 대체 제 무엇을 믿고 성검의 존재를 입에 담고, 오직 자신이 지정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여행길에 올랐던 걸까.

‘특히나 지금은 드래곤이라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나, 오로지 둘만이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흔쾌히 응했었지.’

안전한 공작가의 저택에서만 자라나 세상 물정에 대해 어두운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사람을 잘 믿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르반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 또한 리엘리 공녀를 경계했던 적은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유리 온실을 거닐고, 단둘이 여행을 하는 현재까지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아르반은 그녀가 어떤 위해를 가해와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과 리엘리 공녀의 입장은 매우 달랐다.

신분을 떼어놓고 보면 그녀는 약자였다.

비단 자신뿐이 아니라 길가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사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쉽사리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연약한 존재.

‘그런데도 내 무엇을 믿고 저리 마음 편히 행동할 수 있는 건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였다.

그렇게 한창 생각에 잠겨있는 아르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걱정하지 말고 주인도 얼른 자라. 나 힘은 없어도 감각은 살아 있어! 냄새도 잘 맡으니까 멀리서 다가오는 것들도 다 잡아낼 수 있는데….”

아르반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침번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율렌이 잠든 리엘리를 힐끔거리며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율렌을 잠시 바라보던 아르반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접근하는 이가 있다면 주저 말고 깨워. 그게 몬스터가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응…! 아니, 몬스터는 가까이 못 온다니까? 지금 내 말 안 믿는 거야?”

“…….”

작게 바닥을 꼬리로 탁탁, 불만스레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르반은 눈을 뜨지 않았다.

***

아르반과 둘이… 아니지, 율렌까지 셋이 이동하는 며칠간은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요 작은 드래곤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대화가 끊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출발했던 곳은 내리막이었기에 대화를 하다 몇 번 혀를 씹어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후부터는 오르막으로 지대가 바뀌어서 자연스레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 지대를 벗어나고부터는 사람이 뛰는 정도의 속도로 말을 몰았기에 대화가 가능해졌다.

신성력으로 회복하며 강행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지름길로 가고 있었기에 굳이 피곤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금 여유가 생기니 끝없이 말을 걸어오는 율렌이 문제였다.

대꾸를 안 해주면 자꾸 되물어오고, 피곤해서 그만 말하고 싶을 때도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로 올려다보면 묘한 죄책감이 들어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뭐랄까, 꼭 내가 작고 무해한 동물을 괴롭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실상은 얘 때문에 내가 온 기운이 다 빨리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저 작은 놈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렇게 천천히 가고 있어도 너랑 대화하느라 벌써 몇 번이나 혀를 씹었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지만 이미 신성력으로 치료해서 없는 상처였기에 언급하기도 뭐했다.

질문이 어찌나 많은지, 본의 아니게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의 심정을 단시간 내에 깨우치는 중이다.

세상에, 우리 아몬은 이러지 않았는데….

어째서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드래곤이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말이 많은데 관심 두고 물어보면 더 신나서 떠들까 봐 무서웠다.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감당하기 벅차니까, 가만히 있자.

그렇게 이동하는 내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율렌의 질문과 이야기에 지나치게 시달린 모양이다.

이제는 깊게 생각하고 답해줄 성의와 기운을 모두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율렌의 끝없는 질문 공세의 현장에서도 아르반은 대부분 침묵을 고수했는데, 그 덕에 내가 더 많은 대답을 해줘야 하는 입장이 돼서 얄밉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조금 열받은 나는 일부러 아르반을 걸고넘어지며 그가 입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리엘리는 어떻게 내가 잠들어 있는 곳을 알고 주인을 데려온 거야? 주인이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을 줄 알고 데려왔어?”

“그냥 꿈에 나왔어. 나랑 아르반이 같이 널 데리러 가는 꿈을 꿔서 여기까지 온 거야.”

“꿈? 꿈이라면 그것도 내 힘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건가? 내 마력을 흡수한 영향이 거기까지 미치는구나! 호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신기한데?”

응, 아냐. 사실 꿈이고 자시고 다 거짓말이야. 책에서 봤어.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 같은 진실을 말할 수는 없어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해댔음에도 율렌은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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