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나는 곧 고개를 붕붕 흔들어 이상한 생각을 떨쳐냈다.
율렌이야 아르반과 함께할 테니 내가 돌볼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얌전해진 율렌을 손으로 토닥이며 묵묵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율렌은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땅에 착지한 놈은 스트레칭하듯 날개를 쭉 펼쳤다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저렇게 날아갈 거면서 그냥 먼저 올라가라고 할 때 올라가면 될 것을….
‘굳이 내 품에 안겨 올라온 이유가 뭔지 모르네.’
얼마나 날래게 튀어 나갔는지, 그 작은 것이 순식간에 족히 몇백 미터 상공 위까지 올라가 버렸다.
나는 율렌이 어디 있나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지만 눈이 부셔서 시야가 확보되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내려오겠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르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 길이 엇갈리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열심히 올라온 돌계단에 다리를 뻗고 철퍼덕 걸터앉았다.
차가운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동시에 느끼며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 무게감이 실려 왔다.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율렌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날개를 살살 팔랑이고 있었다.
“놀랐잖아! 제발 예고 좀 하고 다녀라. 하아….”
일단 몬스터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율렌이 큰 눈을 도록 굴리며 입을 열었다.
“놀랐어? 미안, 다음에는 이름 부르고 앉을게. 난 그냥 주인이 오고 있길래, 말해주려고….”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변명하는 모습이 또 귀여워서 화를 내려고 벌렸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나는 율렌의 다물린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경고를 대신하고는 아르반이 올 법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네 주인 온다며. 안 보이는데?”
“저기 아래쪽에서 말 타고 달려오고 있어. 위에서 본 거라 도착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거야.”
“흠, 그래? 근데 너 왜 내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 거야. 내려와, 안아줄게.”
“여기가 더 좋아서. 여기 있으면 안 돼? 너한테 안겨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날개를 펼 수가 없어서 좀 답답해.”
날개라. 나는 녀석의 날개를 바라봤다.
몸집보다 큰 날개인지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가볍잖아. 응? 여기 있으면 안 돼?”
“음….”
그 말대로 율렌이 가볍긴 했다.
사실 크기는 작은 편이었지만 꼬리가 몸집보다 길었고 날개까지 붙어 있어 생김새만 놓고 보면 비슷한 크기의 개나 고양이보다 묵직해 보였다.
근데 느껴지는 무게는 그 이하랄까.
무거웠으면 애당초 내가 얘를 안고 계단을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까 너 엄청 가벼운데, 드래곤은 원래 몸체에 비해 무게가 덜 나가니?”
“응? 아니. 몸무게 정도는 마력이 없어도 조절할 수 있어. 원래는 이 크기에서도 되게 무거운데, 원래 무게로 돌아가 볼까?”
“…아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이 상태로 있어.”
“그래.”
“근데 어깨에 있으면 좀 불안하지 않아? 떨어지지만 않으면 나야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네가 물구나무만 서지 않으면 내가 떨어질 일은 없어!”
“그렇구나….”
절대 떨어질 일이 없다는 말을 정말 참신하게도 한다.
율렌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르반이 흑마를 몰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네 주인 드디어 왔나 보다. 가보자.”
“그래!”
그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총총 뛰어가자 재회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불과 수십 분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도 막상 아르반을 눈앞에 두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웃음이 났다.
“그래도 빨리 오셨네요.”
“공녀를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오르시죠.”
아르반은 내 얼굴에 눈길을 고정한 채 말에서 내려와 손을 내밀어 왔다.
자연스럽게 그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탄 내 뒤로 곧장 아르반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느 틈에 어깨에서 내려왔는지 모를 율렌이 내 다리 사이에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말 한 마리에 사람 둘, 드래곤 한 마리라니. 심지어 이번에는 교대할 다른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좀 걱정되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아르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율렌, 신성력은 사용할 수 있나?”
“응, 사용할 수 있어.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중상은 치료 못 해….”
“상관없다. 체력 회복 정도는 가능하겠지. 말이 지친 것 같으면 신성력을 사용해 회복시켜.”
“알겠어.”
율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은 아르반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반은 아까 왔던 길과 다른 곳으로 말을 몰며 내게 말했다.
“기사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면으로 돌파하면 시간은 단축할 수 있겠지만 몬스터들이 많은 구역을 지나야 하고 다른 길은 시간이 지체될 텐데, 어느 쪽이 괜찮으십니까.”
“음, 몬스터와 마주하는 것보다는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르반이 말 머리를 틀려는 찰나, 율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있으면 몬스터가 접근할 리가 없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평온한 율렌의 목소리에 나는 약간 흥분하여 격양된 어조로 되물었다.
안 그래도 다른 이들 없이 아르반과 둘만 있는 상황에 몬스터를 마주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나 드래곤이잖아. 마력이 없다고 해서 내 기운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 내 근처에 몬스터들이 접근할 일은 없어.”
“진짜? 와!”
말 위에 타고 있지만 않았어도 양손으로 들어 올려 꽉 끌어안아 줬을 만큼 기뻤다.
‘그 지긋지긋한 놈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니…!’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뚫고 가도 상관없겠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율렌의 능력에 아르반은 곧장 방향을 틀었다.
그는 터 있는 길에서 벗어나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갔다.
만들어진 길이 없어 불규칙적으로 자리한 나무들이 장해물이 되었음에도 달리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어찌나 요령 좋게 말을 모는지, 그 복잡한 숲을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안정감이 있어 신기하기도 했다.
오히려 뺨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마저도 기껍게 느껴졌다.
재밌다. 이런 맛에 말을 타는 건가 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허리와 허벅지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속도를 줄여달라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율렌이 말을 회복시킬 때 꼽사리 끼어서 나 또한 회복을 받았다.
한참을 더 달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땅을 밟았다.
나는 모포 한 장이 깔린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아르반이 건네주는 건량을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고는 바로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오늘부터는 저랑 각하 둘이서 불침번을 서야 하니까 저 먼저 잘게요.”
나는 모포를 목 끝까지 끌어올리며 얘기했다. 그러자 내 옆에 똬리를 틀고 있던 율렌이 뾰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도 있는데, 자꾸 잊어버리면 화낼 거야!”
“아… 미안, 미안. 너도 불침번같이 해줄 거야?”
“나는 안 자도 상관없는 몸이니까, 내가 일어나 있을게. 주인이랑 너는 자.”
“드래곤은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건가.”
율렌은 아르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응. 자고 싶으면 자고, 아니면 마는 거야. 그냥 시간 보내려고 자는 거지.”
“시간 때우기?”
“그렇지. 계속 깨어 있어 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난 원래 자는 거 좋아하는데, 이번에 너무 많이 자서 당분간은 자고 싶지 않아.”
하긴. 나 같아도 몇백 년 동안 잠들어 있었으면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납득 가는 이유라 나는 아르반의 모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각하도 누우세요. 어차피 몬스터 걱정도 없고 이 산맥까지 들어올 사람도 없잖아요. 율렌이 봐준다니까 편하게 자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아르반을 향해 인심 쓰듯 얘기하자 율렌이 작은 머리를 모로 기울이며 궁금증을 토로했다.
“근데 리엘리 너는 왜 주인을 각하라고 불렀다가 이름으로 불렀다가 해? 나랑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불렀잖아.”
갑작스러운 율렌의 발언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 그걸 말하면 어떡해! 그거야 당사자가 없으니까 어떻게 부르든 내 맘이니까 그랬지!’
하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뱉을 수도 없고, 부정하기에는 이미 당황한 내 모습을 그가 목격해 버렸다.
더는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바로 입을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화가 났을 아르반의 앞에서 드러누운 채로 눈을 감아버린 모양새가 되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그저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대단한 무례라는 것에만 생각이 닿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앞으로는 생각할 때도 꼬박꼬박 각하라고 부를게요. 그러니까 이번만 넘어가 주세요, 네?’
아르반에게는 들리지 않을 사죄의 말을 속으로 열심히 읊어댔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정말 미치겠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불호령이 내릴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노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아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께서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게 편하시다면,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나는 예상 밖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일?
“저, 정말요? 농담 아니고요?”
나는 덮고 있던 모포를 휙, 소리가 나도록 젖혀버리며 일어나 앉았다.
“제가 공녀께 이런 농담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아르반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무심한 목소리에서 약간의 웃음기가 전해져 왔다.
“저 진짜로 편하게 불러요? 이름으로 불러요?”
“예,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으니까, 사양 안 할게요. 아르반. 저도 편하게 리엘리라고 불러주세요! 엘리라고 부르시면 더 좋고.”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기가 힘들었다.
아직 세이린이랑도 서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데, 설마 아르반을 이름으로 부를 날이 올 줄이야.
뜻밖의 기분 좋은 상황에 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