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네 주인 되시는 분이 잘생겼으니까, 라고 말하자니 창피했다.
하지만 어차피 당사자도 없는데 뭐 어떠냐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그건 아르반이 너무 잘생겨서 그렇지. 그 얼굴 보고 설레지 않을 수 있으면 진짜 사람이 아니다.”
“…그렇구나. 주인이 잘생기긴 했지. 카르세이만큼 잘생겼어.”
율렌은 또 내 말에 금세 수긍해왔다. 정말 단순하구나, 너.
그나저나 그 미모는 초대 황제 때부터 타고 내려왔던 거군.
“그래? 카르세이도 엄청 미남이었겠다. 아르반이랑 닮았다면.”
아니다, 생각해 보니 아르반이 후손이니까 그가 초대 황제를 닮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터였다.
“응, 아리엘도 예뻤어. 내가 봤던 인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었지.”
드래곤이 인정하는 제일의 미인이라니… 나도 보고 싶다. 황궁에 초상화 하나쯤은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려는데, 다시 질문해오는 율렌으로 인해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럼 너는 왜 주인이랑 같이 나를 찾으러 온 거야? 둘만 비밀로 하고 나를 찾으러 온 거라며. 왜 비밀로 해?”
“…….”
아몬이랑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아이를 상대하며 발생하는 피로감을 지금 절실히 느끼게 됐다.
‘이 물음표 살인마 같으니라고…!’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착실히 율렌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이런 타입은 무시하면 더 귀찮게 굴 확률 오만 퍼센트다.
“으응… 내가 네 주인한테 성검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신 부탁을 좀 했거든. 비밀로 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아르반 손에 성검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복잡해지니까…?”
“복잡해져? 왜?”
“아르반은 황실의 일원이 아니니까. 아르반 샤루스가 아니라, 아르반 카넬로웰이잖아? 황실의 사람이 아닌 자가 드래곤의 주인이 되면 황실에서 어떻게 반응하겠어.”
비록 난 아르반이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도 불과 몇십 분 전에 알았지만.
그러다 문득 쎄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 뭔가 이상한데?’
원작에서는 그저 상징적일 뿐인 검이었다지만, 그래도 어찌 됐든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한테 초대 황제의 유물이 넘어가는 상황을 황제가 그냥 두었다는 거잖아.
자식이라고는 황태자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깐 사이 오만가지 생각이 떠돌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유가 뭘까 싶어 골똘히 상념에 빠지려는 순간, 율렌이 무엇에 그리 놀랐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뭐어?!”
“아,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 때문에 심장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율렌은 안중에도 없는지 입만 떡 벌릴 뿐이었다.
많이 충격받았는지 짧은 발을 부들거리면서 내 팔을 꾹 눌러왔다.
“…성이 다르길래 시간이 많이 지나서 황실의 성을 바꾼 줄 알았어. 성검을 계승한다는 건 여신의 선택을 받는다는 뜻인데… 여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 황제가 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이제는 나한테 말하고 있다기보다 혼자 의문을 토하는 것 같았다.
“카르세이도 여신님께 선택받고 황제가 된 건데….”
한없이 수그러져 가는 율렌의 고개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반도 대공이라 꽤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어. 아마 어지간한 왕국보다 영토가 넓을걸?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
나름 위로하려 꺼낸 말이었는데, 내 말을 듣고도 율렌은 잔뜩 익어버린 벼처럼 계속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그래도 황제가 아니잖아… 내 주인은 인간들의 가장 위에 있어야 하는데….”
황제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거니? 정말 드래곤다운 스케일이구나.
율렌의 기분이 너무 오락가락해서 심적으로 상당히 피곤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풀죽은 율렌을 달래고자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지금은 황제가 아니어도 네가 힘을 되찾아서 황제 시켜주면 되지, 뭘 그렇게 실망하고 그래. 아르반의 아버지가 현 황제랑 형제 사이라고 했잖아. 막말로 성만 다르지 그냥 황족이야, 황족.”
내가 아무 말을 하기 시작하자 율렌의 숙인 고개가 조금 위로 들렸다. 그걸 확인한 나는 더 마구 질러댔다.
그냥 말만 하는 건데 뭐 어때.
“황실의 피를 이었으니 황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겠고. 지금 따-악 마침 황제 아들도 하나밖에 없어. 아르반도 혈통으로 꿀릴 것 없고, 성검에 드래곤인 너까지 있겠다.”
“…….”
“거기다 아르반이 밖에서 전쟁 영웅으로 불리면서 제국민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니까? 이 정도면 누구보다 황좌에 가까운 사람 아니겠… 냐고.”
말하다 보니 내가 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막 뱉은 말인데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내 뒤숭숭한 마음을 모르는 율렌은 활짝 핀 얼굴로 해맑게 말했다.
“맞아! 지금 황제가 아니면 이제부터 황제가 되면 되지!”
“…….”
“네 옆에서 빨리 마력을 되찾고 본신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 우리 올라가야 해, 리엘리!”
그 말에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하니 정말 올라가야 할 때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올라가 볼까.”
“응, 나 진짜 밖에 나가고 싶었어!”
“그래, 그래. 나가자. 나가.”
그렇게 해맑은 율렌과 힘겨운 나의 계단 등반이 시작됐다.
요 작은 드래곤은 내 품에 안겨 편안하게 운반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몇백 년을 혼자 잠들어 있어서 그런지 상당한 수다쟁이다.
“…그래서 원래는 내 본체가 아까 그 지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니까!”
“그래, 너 원래 엄청나게 컸구나….”
드래곤이란 게 정말 엄청 크긴 하구나. 대체로 세계관 최강자로 많이 등장하던데, 몸집으로도 최고였군.
내 별 대단치도 않은 맞장구 한마디에 더욱 기고만장해진 율렌이 더 크게 떠들어댔다.
“그럼! 드래곤은 지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 가장 크고 강한걸. 내가 마음먹고 브레스를 쏘면 작은 왕국 정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어!”
잔뜩 고개를 치켜들고 잘난 체를 하는데 미안하지만 난 장단 맞춰 줄 기력이 없었다.
“이야… 대단하네….”
“진짜라니까! 나중에 내가 본체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너한테도 보여줄게!”
내 영혼 없는 대답에 제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보다.
율렌은 새침하게 외치며 꿈틀거렸다.
안 믿는 거 아니다… 드래곤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보여준다니. 어딜 날려버리려고…?
믿으니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입을 열 기운이 없었다.
“그래, 믿어. 후… 믿는데, 내가 힘들어서 그래… 하. 이제 너 혼자 날아서 올라갈래?”
내 공기 반 소리 반 섞인 목소리에 율렌이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힘들어? 걷기만 했는데? 그래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거였구나.”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는데 반박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 나 저질 체력이라 계단만 올라도 힘들다…! 근데 이런 살인적인 계단을 올라가면서 안 힘든 게 이상한 거라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니 율렌이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녀석의 작은 몸체에서 은은한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보는데 턱 끝까지 차오르던 숨이 점차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율렌을 감싸던 금빛의 오오라가 내 전신을 감쌀 만큼 번져왔을 때는 놀랍게도 몸이 멀쩡해졌다.
며칠 동안 말을 타며 시달리던 허리, 허벅지, 엉덩이의 통증까지도 말끔하게 사라지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현상에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율렌을 내려다봤다.
“뭐야? 율렌 네가 치료해 준 거야?”
“치료? 이건 치료라기보다 회복시켜 준 거야. 이제 괜찮지? 나 계속 안겨 있어도 돼?”
“응. 와… 진짜 멀쩡해졌네. 하나도 안 힘들어. 지금은 무능해진 거 아니었어?”
“무능이라니! 마력이 얼마 없긴 하지만 신성력은 아직 남아 있는걸.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낫게 해줄 수 있어!”
딜러로서는 힘을 잃었어도 힐러로서는 아직 살아 있다는 건가.
갑자기 이 드래곤이 엄청 예뻐 보였다.
몸이 쌩쌩해지니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 나는 율렌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보니 원작에서는 신성력을 가진 자가 매우 드물다는 설정이 있었다.
여신을 모시는 신관 중에서도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라고.
마력이 없어도 충분히 능력이 있다 싶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너 안 무능해. 완전 대단하잖아? 마력이 없어도 이렇게 치료도 해줄 수 있고, 역시 드래곤은 다르네.”
“맞아. 원래는 더 대단해. 나중에 꼭 내 본체도 보여줄게!”
“…본체는 좀 생각해 보고.”
“왜? 나 엄청 멋있어. 너랑 주인한테는 꼭 보여줄게!”
“멋있고 뭐고를 떠나서 네 존재가 드러나면 곤란하다니까?”
“내가 본체로 돌아갈 수 있으면 주인이 황제가 될 거니까 괜찮잖아!”
“…….”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근데 진짜 그렇게 되면 단순히 골치 아파지는 걸로는 안 끝날걸?
“…일단 네가 본체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그때 생각해 보자. 저기 봐봐. 거의 다 올라왔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가까워져 턱짓해 가리키니 율렌은 미어캣처럼 기다랗게 목을 쭉 빼고는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댔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날개까지 퍼덕이는 바람에 시야가 다 가려졌다.
“밖이다! 밖이야! 빨리! 빨리 나가자!”
“아우! 가만히 좀 있어 봐, 앞이 안 보이잖아. 그렇게 빨리 가고 싶으면 날아서 먼저 가든가!”
“그건 싫어….”
하도 정신없이 굴어서 신경질을 내니 율렌이 날개를 도로 접어 넣었다. 혼자 가는 건 또 그렇게 싫은가보다.
하는 짓이 겉모습을 그대로 따라가니 앞으로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러다 어른 같은 아이 하나, 아이 같은 드래곤 한 마리를 키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대체 무슨 조화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