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드래곤 조각을 살펴본다고 얼쩡거리다가 스치듯이 잠깐이었지만 확실히 손이 닿았었다.
“검집이라 괜찮았던 건가….”
혼잣말에 가까운 내 중얼거림에 율렌이 곧장 대답했다.
“그건 네가 내 마력을 흡수해서 그런 것 같은데? 검집도 성검의 일부라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건 같아.”
“오….”
“네게 흡수된 내 마력과 신성력이 융화되면서 내가 묶여 있는 성검에게도 거부반응이 없어졌나 봐.”
“그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상당량의 마력을 흡수한 것 같은데, 정작 나는 체감되는 게 없다.
“근데 네 마력을 흡수했다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아. 꿈을 꾼다는 것만 빼면.”
“네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마력이 스며들어서 그래. 근데 육체로 흡수하지 않은 게 다행이야.”
“…그건 또 왜?”
“만약 그랬으면 감당 못 할 마력으로 인해 눈 깜짝할 사이에 육체가 터져버렸을걸?”
저기, 갑자기 로판에서 고어물로 장르가 바뀌어버리는데요…?
“그리고 조금씩이지만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긴 해. 아, 이건 나쁜 방향이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율렌의 해맑은 표정과 무시무시한 내용의 부조화를 느끼면서도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전달받았다.
나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율렌의 무구한 황금빛 눈동자를 슬쩍 피했다.
“그, 그래. 다행이다. 일단 언제까지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가기는 해야겠지….”
내가 나가자는 소리를 하자 이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아르반이 바로 말을 뱉어왔다.
“공녀께서는 드래곤과 잠시 이곳에 머물다가 올라오시죠. 제가 먼저 올라가서 기사들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아르반은 어느 틈에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성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화려한 예장용 검같이 보이던 성검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 진짜 쓸데없이 화려해.’
“검이 드래곤과 공명하는 것을 보면 그 드래곤이 이 성검에 묶여 있는 존재가 맞는 것 같습니다. 주인인 제 의지를 따를 테니 공녀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딱히 걱정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얘가 위험할 거라 생각했으면 이렇게 품에 안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아르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품 안에서 율렌이 꿈틀거리더니 목을 한껏 쳐들고는 소리쳤다.
“드래곤이 아니라, 율렌! 율렌이야!”
율렌은 아르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빽빽거렸다.
그런 율렌의 퉁퉁거림에 아르반은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율렌. 공녀와 함께 있어라. 그리고 공녀, 괜히 너무 일찍 올라오지 마시고 적어도 삼십 분 후에 올라오십시오.”
아르반은 말을 하며 성검을 다시 갈무리하고는 내게 내밀어왔다.
눈앞에 들이 밀어진 검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받으려는데, 그가 순간 검을 뒤로 물렸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네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이런 줬다가 뺏는 만행은 참아주기 힘든데.
조금 기분이 상하려는 찰나, 다음 순간 들려오는 아르반의 목소리에 불만은 깨끗이 공중분해 되어 사라졌다.
“공녀에게 검을 넘겨도 아무 문제 없는 게 확실한 거겠지?”
“응. 이렇게 가까이 가져다 댔는데 거부 반응이 없으면 문제없어.”
자신감 넘치는 율렌의 답변에 아르반은 다시 성검을 내 쪽으로 내밀어왔다.
“공녀께서 가지고 올라와 주시겠습니까? 제가 들고 가면 숨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확실히. 화려하고 검신도 긴 편이라 로브로 가려도 어느 정도 노출은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네, 이정도야.”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며 성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좀 놀랐다. 보이는 것에 비해 검이 너무 가벼워서.
아무리 그래도 이정도 길이의 검인데, 무게감이 너무 없어서 검이라기보다 모양만 흉내 낸 모형이라 말하는 편이 더 신빙성 있을 듯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가볍네요?”
“예. 그래도 위험하니 함부로 휘두르거나 하지는 마십시오.”
‘저 사람 내 생각이라도 읽었나….’
아르반이 먼저 올라가면 한 번 빼서 휘둘러 보려고 했는데, 순간 뜨끔했다.
나는 슬그머니 검을 허리춤에 매달며 입을 열었다.
“누, 누가 검을 함부로 막 다루겠어요? 걱정 그만하시고 올라가 보세요. 이따가 따라갈게요.”
당황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 목소리에 아르반이 불신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를 외면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율렌에게 고정한 채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빨리 올라가 보세요.
“…그럼,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런 내 기도가 통한 모양인지, 아르반이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랑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게 생겼네!’
그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아르반에게 재빨리 말했다.
“아, 각하! 아델 경이랑 다른 분들에게 인사 좀 전해주세요.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게 될 줄 몰라서 별다른 얘기도 못 했네요.”
무엇보다 세이린과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보지 못할 텐데… 여러모로 아쉬웠다.
“알겠습니다.”
아르반은 짧게 대답하며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쏜살같이 계단 위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뛰어올라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와, 내가 저택에서 뛰어 내려오면서 좋아했던 게 머쓱해질 만큼 잘 뛰네.
여기 계단 내려올 때도 엄청 많았는데, 이렇게 올려다보니 정말 까마득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율렌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있다가 어느 세월에 저길 올라간다니….”
“너도 주인처럼 뛰어 올라가면 금방일 거야!”
“…미안하지만 난 네 주인만큼 신체 능력이 좋지가 않아서 저렇게 뛰지도 못하고, 만약 뛸 수 있다 해도 반의반도 못가 쓰러질 거다.”
내 말에 율렌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작은 발로 내 팔을 토닥여 주었다.
“너 정말 약하구나. 그래도 괜찮아. 네가 약한 만큼 주인이 강하고 나도… 나도 마력만 되찾으면 원래는 엄청 강해.”
율렌은 아련한 눈빛으로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마력만 있었으면 폴리모프해서 널 업어줄 수도 있고, 바로 위까지 순간이동 할 수도 있고… 아니, 애초에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춰서 주인이랑 같이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남의 품에서 청승을 떨고 있는 작은 녀석을 아기 달래듯이 슬슬 흔들어 주었다.
“나랑 있으면 금방 회복한다면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지만… 주인이 없으니까 말하는 건데, 나도 이렇게까지 마력이 고갈된 적이 없어서 회복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
“간단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라도 되어야 회복을 가속화시킬 수 있을 텐데….”
“음, 완전히 방전됐구나. 근데 뭐, 우리가 너한테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서… 상관없지 않나?”
“…상관없다고?”
“응. 네가 능력 있고 강하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 될 건 없으니까.”
드래곤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는 난감함이 뒤따르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율렌의 꼬리 깨를 두드려 주었다. 녀석은 그런 내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나 아무 쓸모도 없는데 괜찮아? 지금 신성력도 잘 사용 못 해서 팔이나 다리가 날아가는 정도의 부상은 회복도 못 시켜주는데?”
얘가 드래곤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사고가 남다르게 하드하다.
미안하지만 난 사지가 날아갈 만큼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생각이 단 한 톨도 없었다.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건지, 원.
“애초에 안 날아가면 되잖아. 어디 전쟁 나갈 일 있니? 아르반이라면 또 몰라도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평화롭게 지낼 생각인데.”
율렌은 웅크리고 있던 목을 길게 빼며 결연하게 외쳤다.
“리엘리는 주인의 반려니까 궁에만 있어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주인의 검이니까 함께 싸워야 한다고!”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도대체 아르반과 내 어디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보이는 건지부터 납득이 안 간다.
물론 아르반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누가 누구의 반려야, 우리 그런 사이 아냐.”
“그렇지만 너, 주인을 볼 때마다 심박수가 올라가잖아. 인간들은 서로 좋아하면 심박이 올라간다고 했어. 그러니까 둘이서만 나 찾으러 온 거 아냐. 내가 모를 것 같아?”
곱게 접혀 있던 날개까지 퍼덕이며 열심히 자기가 추리한 이유를 대는데, 전부 오답이다.
“허….”
말도 안 나온다, 요놈아.
밤톨만 한 드래곤이 콧김을 뿜을 듯한 기세로 다 안다는 듯이 으스대는데, 진짜 저 은빛 주둥이를 한 대만 톡 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어른이고, 이 작은 드래곤은 유아 퇴행해버린 불쌍한 종자니까 내가 참아야겠지.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 친구야, 율렌아. 사람은 말이다, 응? 꼭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보고 심장이 뛰는 경우가 아-주 많단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보고 심장이 과도하게 뛰는 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아리엘이 알려줬어!”
감정이 격해진 율렌은 금세 씩씩거리며 눈을 홉 떴다.
“아리엘은 또 누군데?”
“카르세이의 반려. 황후였지. 아리엘이 해준 말인데, 틀렸을 리 없어.”
“아니, 틀렸다는 말은 아니야. 아리엘이 해준 말도 맞아. 다만 사람이 사람을 보고 심장이 뛰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어서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어.”
어쩌다 이런 설명까지 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명색이 드래곤이면서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보니 율렌 쪽이 분명 아몬보다 훨씬 연상일 텐데 말하는 게 더 어린아이 같네.’
상식도 좀 부족한 것 같고.
나는 그리 생각하며 사람이 심박수가 올라갈 만한 상황을 열거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보고 치가 떨리게 분노를 느낄 때도 심장은 미친 듯이 뛸 수 있어. 긴장감을 느껴도 그럴 수 있고. 화가 나서일 수도 있어. 마땅히 생각이 안 나는데 이유는 많아.”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율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주인을 보고 심장이 뛴 건 어떤 이유 때문인데?”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