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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33화 (33/153)

33화. (NEWTOKI_지나가던 행인)

그러자 드래곤이 눈만 도록 굴려서 나를 쳐다봤다.

“이런 모습 카르세이라면 분명 싫어했을 거야. 원래 나는 강하고 위엄 있는 드래곤이라고.”

“그래도, 잘 선택한 거야. 네가 마력을 버린 덕에 이렇게 무사히 주인이랑도 만났잖아.”

“그렇지. 내가 그대로 폭주했으면 산맥의 몬스터들이 내 영향을 받아 같이 이성을 잃고 날뛰었을 테고 거기서… 거기서 주인이 나 때문에 팔이 잘리고….”

크고 동그란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여 들었다.

울먹이는 드래곤의 모습에 손을 뻗어 작은 몸을 안아 올리며 어설프게 녀석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그 사달이 났던 게 다 요 작은 녀석 때문이었다는 거네.

그래도 여러모로 다행이다. 너도 폭주 안 해서 살았고, 아르반도 팔 안 떨어지고 무사해서.

“울지 마. 이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잖아. 네 주인은 여기 멀쩡하게 서 있고.”

녀석이 멀쩡한 모습의 아르반을 잘 볼 수 있게 몸까지 틀어가며 확인시켜주었다.

그러자 드래곤은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아르반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 이렇게 작아졌어도 여기 인간 옆에 있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어.”

녀석의 발언에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네가 마력을 버려 몸이 작아졌다는 건, 다시 말해 모든 힘을 잃어버렸다는 건가?”

참으로 냉정하기 그지없는 한마디였다.

‘…이럴 때는 네가 궁금한 걸 묻는 게 아니라 위로를 해줘야지, 냉혈한아!’

하지만 차가운 아르반의 물음에도 드래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래도 신성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아주 쓸모없지는 않을 거야! 마력을 버리면서 신성력도 조금, 아니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는데….”

“신성력은 왜 함께 잃어버린 거지?”

“원래 마력만 버리려고 했는데, 수면 중에는 조절이 쉽지 않아서 같이 떨어져 나가버렸어….”

더 이상 울먹이지는 않았지만 울적하게 아르반의 눈치를 보는 드래곤이 불쌍해서 그에게 눈총을 보냈다.

내 따가운 눈빛을 받은 아르반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드래곤의 관심을 다른 곳을 돌리고자 질문했다.

“이 산맥에 마력이 넘쳐나 불안정하다면서. 근데 너는 우리랑 같이 여길 벗어날 거잖아. 그럼 여긴 어떻게 되는 거야?”

“여기는 이제 괜찮아. 내가 오래 머물며 마력을 흡수해서 많이 안정을 찾았어. 그전에는 지대가 불안정해서 지진도 자주 일어났는데 요즘은 훨씬 덜해.”

“여기 지진이 잘 일어나?”

“응, 얼마 전에도 작은 지진이 나서 산사태가 일어났던데?”

이곳 지대가 꽤 위험한 곳이었나 보다.

‘그리고 보니 공작이 아르반과의 약속에 늦게 된 것도 산사태 때문이라고 했었지.’

공작의 귀환 길에도 에시트 산맥을 끼고 있었으니, 그 부근에서 사고가 발생한 게 분명해 보였다.

“예전에 내가 여기 처음 자리 잡았을 때는 정말 심각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잠든 신전이 파괴될 정도의 대지진이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

“…….”

“그때 그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 들어오지도 않았을 텐데, 에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아르반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 그랬구나… 아! 각하, 우리 성검의 존재에 대해 숨기기로 했잖아요. 드래곤을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어쩌죠?”

생각해 보니 이쪽이 드래곤의 기분보다 중요하기도 했다.

존재만으로도 눈에 띄는 드래곤을 데리고 돌아가면 소문이 퍼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일 테니까.

“흠, 모습을 숨길 수는 없나?”

아르반의 질문에 드래곤은 여전히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원래는 가능한데… 지금은 마력이 너무 적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

소심한 녀석의 답변에 아르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율렌이야!”

그런 아르반의 태도에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던 드래곤은 자신을 율렌이라 밝혀왔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긴 채로 고개만 위로 꺾어 나와 시선을 마주해 오길래 나도 내 소개를 했다.

“율렌? 그래, 난 리엘리 로베르라고 해. 편하게 불러.”

“그래, 리엘리!”

감정변화가 급격한 작은 친구가 생긴 것 같다.

나는 서로 통성명을 하는 상황에서 아무 말도 없는 한 사람에게 눈을 부릅뜨며 압박을 주었다.

얘는 성검이랑 세트야. 너 얘랑 잘 지내야 한다고!

내 무언의 압박에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아르반 카넬로웰이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이름을 듣던 드래곤, 율렌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넬로웰?’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리엘리 옆에서 마력을 흡수해 힘을 되찾으면 주인한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아, 맞아. 그게 무슨 뜻이야? 내 옆에 있으면 네 마력이 충전된다는 건가?”

“원래 가만히 있어도 마력은 알아서 회복돼. 하지만 네가 흡수한 건 드래곤 하트 속에 있던 내 마력이라 다른 인간의 마력이나 공기 중의 마력이랑은 좀 달라.”

율렌은 꼬리를 양옆으로 살랑살랑 흔들며 내 품을 파고들어 왔다.

“너랑 이렇게 붙어 있거나 가까운 곳에 있으면, 네가 흡수한 내 마력의 영향으로 더 많은 마력을 급속도로 받아들일 수 있어.”

뭐가 그리 좋은지 턱이라도 긁어주면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은 표정이다.

‘한마디로 인간 급속충전기라는 말이네.’

“내 마력을 흡수해서 그런가, 리엘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이랑 섞였는데도 냄새가 좋아.”

“그래?”

“응, 주인 외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인간은 처음이야.”

율렌이 행동하는 게 딱 덕춘이 같았다. 참고로 덕춘이는 내 친구가 키우던 개냥이 이름이다.

덕춘이, 귀여웠는데. 걔네 집에 가는 이유가 덕춘이 보러 가는 거였지….

옛날 향수가 떠올라 어느새 손이 본능적으로 덕춘이를 쓰다듬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모습이 드러나는 건 곤란하니, 올라가서 기사들을 먼저 돌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르반은 항상 비슷한 무표정이지만, 지금 상황이 별로 마뜩잖은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근데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드래곤이 있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당장이야 무능하더라도 후를 생각하면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거고. 전쟁 영웅이란 호칭의 시너지 효과로 제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을 텐데.

“그렇긴 한데… 율렌이 있으면 언제까지 성검의 존재를 숨기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힘들더라도 숨겨야 합니다.”

“…….”

“드래곤의 존재를 황실에서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르반은 생각만으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알게 된다면 황실에서 데려가려고 하겠…. 아, 황실에서 율렌을 데려가려 하겠네요.”

내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했구나. 한 번 인식하니 이렇게 뻔히 보이는 미래인데.

무려 몇백 년 전에 분실됐던 성검과 드래곤이 발견된 것이다.

성검만 찾으면 집에서 아몬이나 돌보면서 우쭈쭈해줄 생각만 했지, 다른 쪽으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알았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원작에서 성검이란 그저 상징성 있는 명검 정도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원작의 황제가 성검을 회수하지 않았을지도….’

아니, 지금 정황으로 보아 그 이유 때문에 회수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응? 왜? 나 황궁으로 가는 거잖아. 가면 안 돼?”

아르반과 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이 없자 율렌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순진한 얼굴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얘는 또 왜 자기가 황궁으로 갈 거란 확신에 차 있는 거니?

“너, 초대 황제랑 함께했다고 당연히 황궁으로 가려는 생각한 건 아니지?”

“…맞는데?”

“지금 네 주인이랑 같이 가려면 황궁으로 가면 안 돼.”

“왜? 주인도 황족인데, 왜 황궁으로 가면 안 돼?”

“뭐, 어? 뭐라고?”

“…….”

“주인도 황족이잖아! 근데 왜 황궁에 가면 안 되냐고.”

율렌은 답답하다는 듯이 내 팔을 툭툭 치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내가 무의식중에 아르반을 바라보자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번갈아 보며 나 또한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난 불신과 의구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아르반에게 물었다.

“각하, 황족이셨어요?”

“혈족은 맞습니다. 카넬로웰 전 대공이 현 황제의 동복형제였죠.”

“…….”

원작에 나오지도 않은 설정이었다.

‘이놈의 원작은 대체 왜 이렇게 까도 까도 숨겨진 설정이 계속 나오는 건데!’

더구나 의아함이 가득 담긴 그의 눈빛으로 미루어 보아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공공연한 사실인 듯했다.

‘그래. 다른 귀족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빙의한 나만 몰랐고….’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가 집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영 알고 있는 정보가 없네요.”

은근슬쩍 넘어가려 방콕 생활을 들먹이는데, 아르반이 허를 찔러왔다.

“아무도 모르는 성검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여기까지 찾아오신 분이, 정보가 없으시다라….”

여전히 뜻 모를 표정을 하고 있는 아르반의 입을 당장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왜 그러니,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우리 그냥 넘어가자, 제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하… 하, 하하. 그으건 조금 사정이 있어서… 하여튼, 근데 율렌 넌 어떻게 각하가 황족인 걸 알았어?”

말해줘, 이왕이면 빨리. 이 곤란한 주제에서 날 구해줘라, 율렌.

다행히 율렌은 내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 왔다.

“그야 성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건 카르세이의 후손들뿐이니까. 평범한 인간은 성검에 손끝 하나 댈 수 없어.”

초대 황제의 이름이 카르세이였나 보다.

가만, 근데 나 아까 분명….

“…나 아까 네가 조각상인 줄 알고 둘러볼 때 성검에 손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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