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놀라 입만 뻐끔거리는 와중, 문득 녀석의 작은 몸체에 눈길이 갔다.
검을 감싸고 동그랗게 말려 있을 때도 작다고 했지만….
‘무슨 드래곤이 작은 강아지만 하네.’
몸을 피고 날아오른 녀석은 기껏해야 소형견 정도의 크기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자기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연신 방싯거리며 신이 난 듯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몇백 년이나 잠들어 있었어! 이렇게 오래 자게 될 줄 몰라서 여기 자리 잡은 거였는데, 꼼짝없이 폭주할 뻔했지 뭐야!”
“…….”
“그래도 주인이 날 찾으러 와줘서 다행이야! 엄청 걱정했는데!”
드래곤은 연신 제 몸보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즐거운 듯, 높은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아무래도 이 녀석, 제국 초대 황제와 함께했다는 그 드래곤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발랄한 거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드래곤의 성격을 떠나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로서도 드래곤이 어떤 생물인지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초대 황제가 여신의 선택을 받아 성검을 하사받고 그 검을 수호하는 드래곤이 있었다, 는 정도가 내가 드래곤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원작에는 드래곤이 등장하지도 않았으니, 나의 무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그리고 폭주는 또 무슨 말인데? 위험한 거 아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궁금증은 순식간에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결국 작은 드래곤을 향해 의문을 토해냈다.
“저기, 너. 성검을 수호하는 드래곤…? 맞지? 폭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 마음속에서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지만 한 번 물어나 봤다.
아니나 다를까, 드래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내가 성검을 수호하는 드래곤이야. 카르세이가 죽은 뒤로 계속 여기 잠들어서 두 번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어. 근데 아무도 날 깨우러 안 와서….”
“…….”
드래곤은 활기차게 대답을 하다가 곧바로 보는 사람이 기운 빠져버릴 것같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후우… 보다시피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어. 아, 그리고 폭주에 대해 물어봤지.”
드래곤은 침울해졌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아주 말간 낯으로 조잘댔다.
“여기 이 에시트 산맥은 대륙에서 가장 마력이 높은 지대인데, 내가 예상보다 오래 수면기에 드는 바람에 몇백 년 동안 마력을 너무 많이 흡수해 버려서….”
드래곤은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설명하다 마력에 대해 언급할 때는 갑자기 또 축 처져 우울한 기색을 내비쳐왔다.
꼬리가 아래로 힘없이 늘어지며 날갯짓을 멈추고는 바닥에 톡, 가볍게 착지한 드래곤은 그대로 배를 깔고 온몸을 땅에 찰싹 붙여버렸다.
감정변화가 참 급격한 사람… 아니, 드래곤이군.
살면서 이렇게까지 태도 변화가 극명한 사람을 만나본 경험이 없었기에 솔직히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심지어 작고 하찮아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나는 아르반의 뒤에서 빠져나와 드래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르반도 눈앞의 드래곤이 우리를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고 검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의 굳은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미약한 경계심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서, 마력량이 너무 많아져서 폭주할 뻔한 거야?”
정황상 그렇게 들렸는데, 좀 의아하긴 했다.
‘보통 소설에서 드래곤은 마법의 정점, 뭐 이런 이미지 아닌가?’
마력이 많아져서 폭주라니,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지….
“응, 원래 마력이랑 신성력은 서로 상충하잖아. 근데 나는 여신님의 드래곤이라 일종의 신수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드래곤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당연히 다른 드래곤들처럼 마력만 가지고 있지 않고 신성력도 가지고 있거든.”
녀석은 여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지 바닥과 하나가 된 몸을 발딱 일으켜 제가 새끼 고양이라도 되는 양,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드래곤은 다시 눈을 내리깔고 거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신성력보다는 마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게 돼서, 마력을 과도하게 흡수해 신성력과 균형이 무너져 버렸어. 그래서 폭주할 뻔했고….”
“폭주할 뻔했지만 무사히 넘어간 건, 내가 성검을 뽑았기 때문인가?”
조용히 드래곤과 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르반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에 드래곤은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니! 아냐. 음… 말하자면 긴데, 사실 내가 이 산맥에 있던 신전에서 잠이 든 이유는 이 근방에 마력이 너무 밀집돼 들끓고 있어서였어. 그것 때문에 지대가 불안정했거든.”
“…….”
“나는 가만히 있어도 마력을 끌어당기고 흡수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내가 여기에 머물면 흘러넘치는 마력이 나한테 흡수되면서 지대가 약간이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고.”
녀석의 설명에 팔짱을 끼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반이 질문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의 마정석 광산이 발견된 것도 너와 관계가 있나?”
“마정석 광산? 아, 이 위쪽에 마력이 뭉쳐있는 곳이라면 내 영향이 맞아.”
녀석의 긍정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소설에서 다루지 않은 이런 세부 설정이 있었구나.
“산맥 전체에 퍼져 있던 마력이 나를 중심으로 몰려든 지 몇백 년이나 되었으니까, 마정석 광산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렇군.”
“그리고… 결론만 말하자면, 나 사실 얼마 전에 폭주할 뻔해서 가지고 있던 마력을 전부 버렸어.”
“…버려?”
“응… 수면 상태라 움직이지 못하는데 곧 폭주할 것처럼 마력이 울렁거리더라고. 근데 마침 가까운 곳에서 차원의 균열이 발생했지.”
“차원의 균열? 그건 또 뭔데?”
나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물었다.
“말 그대로 차원 간에 발생하는 균열이야. 균열은 그 근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마력을 흡수해서 제 빈틈을 메우지.”
“…근데 그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일단 들어봐. 차원의 균열이란 발생한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급속으로 마력을 빨아드리는 특징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쪽으로 마력을 떼어내 던질 수 있었던 거고.”
드래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 균열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마력을 떼버렸다 하더라도 다시 내게 돌아오려 했을 테니까. 그런데….”
말끝을 흐린 녀석은 아몬드 모양으로 바짝 올라간 눈매가 반달처럼 접힐 만큼 환하게 웃었다.
파충류인데 저런 표정 변화가 가능하다니….
인간인 아르반 보다 표정이 다채로운 모습에 신기함과 경악이 버무려진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드래곤은 그대로 총총 걸어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려왔다.
“어…!”
놀랍게도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파충류면서!
“너.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네가 내 마력을 흡수했구나!”
…뭐? 아, 그리고 보니 아까 녀석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런 소리를 했던 것도 같았다.
‘내 마력을 흡수한 인간.’
그게 나를 뜻하는 거였나.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마력인데 어떻게 살아 있나 했더니, 가까이서 보니까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흡수된 거였어. 나도 이런 건 처음 봐!”
“…내 영혼에? 마력이 흡수됐다고?”
드래곤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다 눈을 샐쭉하니 뜨고는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응, 최근 한 달 정도 안쪽으로 별다른 일 없었어? 어떻게 영혼으로 내 마력을 흡수한 거야? 살아 있는 인간이 영혼으로 마력을 흡수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
있었지. 딱 그 정도쯤 전에 내가 이 몸에 빙의했으니까.
영혼에 흡수된 마력과 내가 이 몸에 빙의할 수 있었던 이유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곁눈질로 아르반을 살폈다. 저 남자가 있는데 얘기를 꺼낼 수는 없으니 참아야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물어봐야지.
그러니 지금은 적당히 걸러낸 진실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다른 일은 없었고, 그맘때쯤부터 꿈을 꾸면 항상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경험하게 됐는데… 이게 네 마력과 관계있는 일일까?”
“맞을 거야! 나는 꿈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거든. 꿈을 통해서 미래도 조금 내다볼 수 있고.”
“호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니, 그건 정말 흥미로웠다.
“내 마력에 담겨 있는 힘의 영향을 받아서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나 봐.”
난 그냥 리엘리의 몸에 빙의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억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여겼는데… 이게 빙의 버프가 아니었구나.
하긴, 돌이켜 보면 이상하긴 했다. 단순한 꿈이라 여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으니까. 지나치게 생생하기도 했고.
“원래는 이렇게까지 모든 마력을 다 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미래의 내가 폭주하면서 주인에게 해를 입히는 걸 예지몽을 통해 봐버려서, 다른 수가 없었어. 후우….”
잔뜩 의기소침해진 드래곤이 내 무릎에 머리를 툭 떨구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왜? 마력을 버리면 나중에 다시 회복이 안 되거나, 뭐 그래?”
내 말에 드래곤은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니… 예상보다 더 조절이 안 돼서 마력이 바닥이긴 한데, 회복은 시간이 지나면 되긴 할 거야. 내 마력을 지닌 네 옆에 붙어 있으면 더 빨라질 거고. 근데….”
“근데?”
“보다시피 마력이 없으면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유지해야 하니까….”
그리 중얼거리는 녀석이 하도 기운 없어 보여 내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볼품없기는, 귀엽기만 한데. 어차피 나중에 다시 회복될 거라며?”
“귀엽다니! 귀엽다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하지만 저쪽에서 원하는 위로는 아니었나 보다.
나는 빽, 하고 화를 내는 작고 하찮은 드래곤에게 얼떨결에 사과했다.
“미, 미안…?”
“후우… 본체를 구성할 만큼의 마력이 없어서 강제로 퇴화한 게 문제야. 이 모습의 영향을 받는지 감정조절이 안 되고 이상해. 아까 주인이랑 네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감정이 북받쳐서 울 뻔했다고.”
저런… 유아퇴행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이 말이군.
나는 심심한 위로의 뜻으로 녀석의 작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