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어… 그러니까, 위치를 찾으려고….”
얼떨떨한 기분에 말끝을 흐렸다.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처음 뇌리를 스친 것은 당신도 사람이었구나, 하는 얼빠진 생각이었다.
그만큼 그의 표정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마 한동안 머릿속을 계속 맴돌 것 같았다.
나는 조각상에 감정이 부여돼 움직이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처럼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으로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내 넋을 빼놓을 만큼 생소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그를 멀거니 바라보는 동안 금세 본래의 무덤덤한 낯으로 돌아온 아르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성검이 위치한 곳으로 향하는 통로가 절벽에 있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럼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서 계셨던 겁니까?”
분명 잘 정돈된 목소리고 여느 때와 같은 낯이었지만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절벽 아래에 통로를 열 수 있는 장치가 있어요. 그걸 누르면 통로가 열리는 구조인데….”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하죠. 공녀는 물러나 계세요.”
“네에….”
나는 다시금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다시 표정 없는 무감한 낯으로 돌아간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처음 마주한 그의 생동감 있는 표정이었는데, 이왕이면 웃는 얼굴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갈무리 하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절벽을 손으로 매만지며 그에게 설명했다.
“이렇게 절벽을 손으로 더듬다 보면 일반적인 바위가 아니라 매끄러운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거길 세게 누르면 돼요.”
“제가 할 테니 공녀는 제발, 절벽에서 물러나 계십시오.”
“아, 넵!”
그는 제발, 이란 단어에 묘하게 악센트를 주며 재차 같은 말을 반복해왔다.
그에 나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나를 대신해 절벽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한동안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더니, 이윽고 한 곳에서 멈췄다.
“찾은 것 같습니다.”
아르반이 옷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며 일어나자, 내 뒤에서 큰 굉음과 함께 엄청난 흙먼지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쿠구궁-쾅!!
“콜록, 콜록! 아, 이게 뭐… 콜록!”
눈물까지 찔끔 맺힐 만큼 격하게 기침을 하는데, 그사이 내 옆으로 다가온 아르반이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는 혼자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뭔가 억울해졌다.
열심히 기침을 하며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따라가 보니, 왜 흙무더기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지하 벙커의 입구처럼 활짝 열려있는 거대한 돌 석판.
바닥 깊이 묻혀 있던 저 돌 석판이 장치를 작동시키자 들어 올려졌고, 그 바람에 석판 위를 점령하던 흙무더기가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진 모양이다.
흙먼지가 아직까지도 시야를 뿌옇게 가려왔다.
“공녀, 괜찮으십니까?”
참 빨리도 물어본다.
“네… 뭐. 괜찮아요.”
“성검은, 아래로 내려가면 되는 겁니까?”
아르반은 석판 아래로 드러난, 어두워서 끝이 보이지도 않는 돌계단을 응시하며 내게 물었다.
“네, 네. 저 아래에 있을 거예요.”
“혹, 위험 요소는?”
“원래 이곳은 신전이어서 위험한 함정 같은 건 없어요. 대신 저 석판 같은 문을 열기 전에 거치는 과정이 많았는데, 신전이 허물어지면서 다 파괴된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에 나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안전하다고 하는데 왜 날 버리고 혼자 가려고 해? 나도 데려가야지.
“저도 같이 갈게요. 여기 있다가 몬스터라도 나오거나 하면 저 혼자 어떻게 해요? 같이 가는 편이 더 안전할 거예요.”
사실 몬스터에 대한 걱정보다는 이곳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지만.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그는 이내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을 위해 공녀는 제 뒤로 따라오십시오.”
“네! 그럴게요.”
아르반은 씩씩하게 대답하는 나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온통 깜깜한 어둠뿐이라 이 계단이 얼마나 길게 뚫려있는지 그 끝이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아래로 몇십 미터쯤 내려가다 보니 계단 양옆에 달린 조명에 저절로 불이 켜지며 시야를 밝게 트여 주었다.
‘아니, 이거 센서 등이야?’
멈추지 않고 내려가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멀리 있는 조명부터 하나둘 꺼져가는 것이 보였다.
뒤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에 물들어가는 모습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작게 소름이 돋았다.
‘으… 귀신은 쥐약인데.’
으슥한 분위기에 괜히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아 아르반의 뒤쪽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뭔 놈의 계단이 이렇게 많은 건지. 도대체 얼마나 깊게 파놓은 거야?
조용한 공간에는 우리 둘의 발소리만이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내려갈수록 점점 더 서늘해지는 기온에 손끝이 차가워짐을 느낀 나는 아르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각하. 여기 좀 춥지 않나요?”
입을 여니 미약하게 입김도 나오는 것 같아서 하, 하고 불어 보자 정말 입김이 뿌옇게 내뿜어졌다.
“입김도 나와요. 아직 그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는데….”
“내려갈수록 온도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많이 추우십니까?”
“아뇨, 아직 버틸 만해요. 옷도 두껍게 입었고.”
“견디기 힘드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왜요? 말하면 옷이라도 벗어주시게요?”
나는 슬쩍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공녀를 기사들 곁으로 모셔다드리고 저 혼자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
이 인간이… 농담이었는데 혼자 엄청 진지하네.
어이가 없어서 한 점 남아 있던 두려움마저 단번에 떨어져 나가버렸다.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앞서 걷던 아르반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갑자기 멈춰 서면 어떡해요! 넘어질 뻔했잖아요!”
“아무래도 거의 도착한 것 같아 자세히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 아르반의 어깨 너머로 아래쪽을 살펴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로 코앞에 있는 계단 몇 개가 전부였다.
너무 어두워서 그 아래쪽은 보이지 않았다.
‘…저 성격에 날 놀리지는 않을 텐데, 정말 뭐가 보이는 건가?’
아르반의 말에 답하는 내 목소리에 불신이 섞여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자세히 보시면 더 아래에는 계단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아래쪽을 바라봤지만 눈만 아파졌다. 여전히 보이는 거라고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진짜 뭐가 보이는 거라면 내가 야맹증이 있는 게 아니라 쟤가 비정상인 거지?’
그 뒤로 한참 더 아래로 내려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역시 아르반이 잘못 본 것이란 생각이 든 찰나.
아르반이 한 발 앞으로 내딛자 삽시간에 주변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켜진 수많은 조명 탓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곁눈질로 위쪽을 살피니 족히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조명이 천장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다.
조명의 빛이 어찌나 환한지, 어디에 서 있어도 마치 아이돌 콘서트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듯한 간접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대충 가늠해도 거의 축구 경기장만 한 크기의 돔 형태로 뚫려 있는 공간.
정말 아무것도 없이, 그저 공간 낭비로 보일 만큼 내부가 텅 비어 있다.
‘왜 공터를 이렇게 쓸데없이 넓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물건이 내 시야에 걸렸다.
넓은 공터 중앙에는 성검으로 추정되는 검이 덩그러니 꽂혀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별 특별할 것도 없는 검.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봐도 화려하게 생긴 검이라는 인상 말고는 딱히 느껴지는 감상이 없었다.
오히려 아래쪽에 검집을 감싸고 있는 은빛 드래곤 모양의 조각상이 더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검집 채로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몸으로 둥글게 감싸는 형태의 드래곤 모형.
대체 어떤 장인이 만들었는지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움직일 것만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굳이 이런 조각을 만들어 둔 건 초대 황제 전설에 드래곤의 가호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일까?
“각하, 이 드래곤 뭐로 만든 걸까요? 엄청 잘 만들었는데, 이거 가져가도 되겠죠?”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아르반은 내 질문에 무심하게 대답하며 성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뽑아 드는데 너무 시원하게, 무슨 무라도 뽑듯이 박혀 있던 성검이 단숨에 쑥 빠져나와 버렸다.
단단히 꽂혀 있으리라 여겼던 검이 너무 쉽게 뽑혀 나와 보는 내가 다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성검을 그의 손에 들려주었으니 목적은 달성했는데, 어째 결말이 시시하기 그지없군.
‘뭐랄까, 너무 임펙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성검이라고 해서 대단한 아우라를 풍기거나, 신전 지하니까 위엄 넘치는 유적같이 멋있거나, 대충 그런 것을 상상했는데….
“공녀, 뒤로 물러나십시오!”
대단히 실망스러워 그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성검을 뽑아 든 아르반이 어느새 내 앞을 가로막으며 무언가를 경계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태세 전환에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도, 아르반도 아닌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그리고 내 마력을 먹어버린 인간아! 반갑다! 진짜 반가워! 으아아아…! 드디어 일어났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높은 톤의 목소리가 발아래 쪽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들려서는 안 되는 제삼자의 목소리에 잔뜩 경계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자 작게 파닥이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아르반의 어깨 너머로 빼꼼 모습을 드러냈는데….
조금 전 내가 실컷 구경했던 드래곤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긴장한 내가 민망해질 만큼 깜찍한 표정을 하고.
‘…저건 또 뭐야?!’
저 드래곤 조각 살아 있는 거였어?! 아니, 근데 파충류면서 왜 그렇게 표정이 생생한 건데!
나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