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몬스터 무리의 습격 사태는 금방 종결되었다. 그들은 바로 현장을 떠나 이동했다.
많은 몬스터가 죽어 나가며 흩뿌려진 피 냄새가 제법 멀리까지 퍼져나갔을 것이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간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다른 몬스터 무리와 맞닥뜨릴 확률이 높았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다시 길을 나서는데, 리엘리는 아르반의 품에 기대어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그녀가 떨어지지 않고 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아르반이 지탱해주는 덕분이었다.
아르반은 제 가슴팍에 톡, 톡, 힘없이 흔들리며 부딪히는 리엘리의 머리를 의식하며, 조금 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크를 맞닥뜨리고 시종일관 굳어 있던 그녀는 자신이 자리를 뜨려 하자 다급히 제 이름을 불러왔다.
리엘리는 아르반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하얗게 질려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아르반은 일순, 제 어린 시절을 겹쳐보았다.
아르반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교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어둡고 낯선 지하실에 구속되어 있는 몬스터, 습하고 축축한 공기, 그곳을 울리는 몬스터의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시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르반을 두려움에 얼어붙게 했다.
아르반이 처음 마주했던 몬스터 역시 오크였다.
그의 아버지인 전 카넬로웰 대공은 굳어 있는 아르반의 손에 억지로 검을 한 자루 쥐여주며,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목을 잘라 죽여라.”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아르반은 발버둥 치지 못하게 사지가 모두 결박된 채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드는 오크를 바라봤다.
곧 죽을 제 운명을 아는지, 내지르는 비명이 끔찍했다.
하지만….
‘죽여야만 한다.’
어린 아르반의 근력으로는 오크의 두꺼운 가죽을 뚫어내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 너무도 자명했다.
그러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어머니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아르반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반항했던 날.
제 눈앞에서 맞아 죽어가던 유모의 모습이 이리도 생생한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아르반은 오크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오크는 더욱더 심하게 발버둥 쳤다.
오크의 울부짖는 소리가 밀폐된 공간을 울리며 아르반의 고막을 강타했다.
사지는 묶여 있었지만 목을 자르려 시도하면 저것의 이빨에 물어 뜯겨 최악의 경우 손이 절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목구멍이 말라붙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검을 잡은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가 슬슬 저릴 때쯤, 뒤에서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탁.
차가운 돌바닥을 구두코로 일정하게 두드리는 소리.
그가 지루해하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크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만이 증폭되며 아르반의 감각을 지배해 왔다.
탁, 탁, 탁, 탁.
그 소리는 아르반을 재촉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는 결국 하얗게 표백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당시를 회상하던 아르반은 다시 눈앞의 리엘리를 내려다보았다.
검을 들어야만 했던 자신과 달리 공녀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녀의 공포를 잠시 못 본 척 외면했다면 상황은 더 빨리 파했을 것이다.
공녀가 겪은 상황과 예전 제가 직면했던 상황은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부름을 못 들은 척 외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자신 또한 그녀와 같은 두려움에 잠식되어 갈 때,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으니까.
그 마음 하나만큼은 같았으리라 확신한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일순 어린 날의 제 모습을 겹쳐보았다.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곁에 선 뒤였다.
항상 밝고 활기차기만 했던 그녀가 보였던, 이제는 낯설지만 한때 사무치게 익숙했던 감정.
‘두려움, 공포.’
그녀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불안이 자신으로 인해 사그라드는 것이 이상하게도 망막에 새겨지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서니 안 그래도 하얀 공녀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한 낯빛이라, 아르반은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댔다.
손바닥에 맞닿은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시 말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자신에게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리엘리였다면 진즉 재잘거리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을 텐데.
침묵을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째서인지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녀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이린과 릭스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근처를 배회했고, 칼 역시도 드문드문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불어온 돌풍에 의해 리엘리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아르반의 목덜미를 간질여 왔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앞쪽으로 넘겨주었다.
아르반의 손이 머리카락에 닿아오는 순간부터 그를 돌아보고 있던 리엘리가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역시 그녀에게는 웃는 모습이 어울렸다.
이후에는 많이 진정되었는지 점심을 먹으면서부터는 곧장 전처럼 생글거리더니, 세이린과 함께 이동하는 오후에는 전과 같이 수다를 떨어댔다.
눈치 빠른 아르반과 세이린은 리엘리가 억지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질녘쯤, 다시 한번 몬스터 무리와 접전이 벌어졌다.
그녀는 제법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제 곁을 지키는 세이린에게 괜찮으니 가서 싸워도 된다는 말까지 입에 올렸다.
비록 표정은 굳어져 있었지만 불과 반나절 만에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세이린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뛰쳐나가지는 않았다.
아르반이 보았을 때 리엘리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귀족 영애 중에서는 더욱 그랬다.
가녀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용감했고, 담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일반적인 병사나 기사들도 처음 몬스터를 목전에 두면 긴장하기 마련이지.’
평범한 야생동물과 몬스터는 뿜어져 나오는 기세부터 다르다.
그 사특한 기운에 압도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오크가 하급 몬스터에 불과하다지만 무리 지어 생활하기 때문에 검을 들기도 전부터 겁을 먹는 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그녀가 몬스터와 첫 대면을 한 것이 오늘 아침이란 것을 고려했을 때, 저 정도 반응은 사뭇 대견할 정도였다.
‘구토하거나 실신하는 경우의 수까지 염두에 두었음에도….’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 두었음에도, 그녀가 두려워하는 모습에 동요해 버린 것이 실책이었다.
밤이 되자 임시 막사에 누워 곧장 곯아떨어진 리엘리가 몸을 뒤척였다.
옆에서는 세이린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세이린은 이 고귀한 신분의 공녀님을 걱정하느라 하루 종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질 못했다.
‘첫인상부터 남다른 아가씨였지.’
아무리 목적지가 산맥이라지만 귀족 영애가 승마복 차림으로 나타날 줄은, 아마 그곳에 있던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더구나 요리사조차 거부하고, 시녀 한 명 없이 길을 나서겠다 말하는 공녀의 모습에 불길한 마음이 스멀스멀 따라붙기도 했다.
저리 거침없이 사용인들을 내치고 나중에 가서 힘들다며 자신들에게 온갖 허드렛일까지 맡기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내가 아는 사교계 영애들은 그러고도 남을 만한 위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의심을 했다는 사실이 미안해질 만큼, 공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황녀가 존재하지 않는 현시점에서 로베르 공작의 유일한 여식인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 중 한 명이다.
그러한 신분임에도 그녀는 거리낌 없이 자신들과 함께 식사하고, 시중을 원하기는커녕 손을 빌려줌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사실 성격만 놓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귀족가의 레이디 라기보다는 정 많고 조심성 없는 시골 소녀 같았다.
세이린은 그런 공녀를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제 남동생, 크리스가 떠오곤 했다.
‘혼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떻게든 내게 말을 붙이고 싶어 눈을 빛내는 게….’
그 고운 손으로 무얼 돕겠다고 빨빨대며 다가오는 모습이 딱 제 동생과 같이 어설프고 귀엽게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세이린이 제 과거사를 언급한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조차 없었다.
아마 다시 한번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세이린은 인간관계에 있어 복잡하고 계산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귀족들의 사교계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종류의 것들로 뒤덮인 곳이었다.
‘모든 것이 가식투성이지.’
겉보기만 화려하기 짝이 없는, 속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곳.
그곳이 바로 사교계였으니까.
세이린은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제 이득을 위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녀가 단순하고 가식 없는 인간관계를 선호한다고 해서 무식하고 눈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평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로서 생존을 위한 눈치는 필수였고, 그 때문에 더욱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그들의 행태에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세이린이 제 주군, 아르반 카넬로웰의 파트너로 얼렁뚱땅 사교계 데뷔를 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 한 줌의 설렘이 공중분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귀족 여성과 엮일 일은 주군이 결혼하지 않는 이상에야 없으리라, 그리 생각했는데….
‘어디서 이런 아가씨가 튀어나왔을까.’
세이린은 남몰래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이린으로서는 공녀가 무슨 연유로 주군과 함께 이 험준한 산맥을 오르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명목처럼 단순한 광산 시찰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림짐작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더 걱정되었다. 곱디곱게 자라왔을 것이 분명한 그녀가 굳이 이런 고생을 사서 하면서까지 산맥을 오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생각이 길어져 귀환한 후에 대한 것까지 닿자, 세이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정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
공녀가 주군께 호감이 있다는 것쯤은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주군께서도 공녀가 싫은 눈치는 아닌 듯했고.
신분도 잘 맞으니 어쩌면 대공비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나, 귀족가의 혼약은 상당한 이해관계가 얽혀들기 때문에 그저 한 가닥의 가능성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저택으로 귀환할 때쯤이면 머지않아 열리겠군.’
주군의 탄신 연회가.
그 생각이 수면으로 떠오르니 순식간에 골이 아파졌다.
그녀는 탐탁지 못한 초대자 명단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가뜩이나 지금 신경 쓰이는 것도 적지 않은데, 그 일까지 지금 생각하지 말자.’
세이린은 순식간에 피곤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몬스터 무리를 두 번 상대한 것보다 종일 공녀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정신적으로 지쳐버렸다.
세이린은 더 이상 뒤척이지 않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리엘리의 옆에 누웠다.
또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반 역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