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칼에게 괜찮다고 거절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내가 거절해도 묵묵부답으로 모포를 들이밀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실랑이를 하다가 그냥 받아주라는 세이린의 권유에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어정쩡하게 모포를 들고 서 있으니 세이린이 다가와 내 손에 들린 모포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내 잠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덧깔아 주었다.
나는 그곳에 꾸물꾸물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턱 끝까지 모포를 덮은 채 누웠다.
요 며칠간 마차 창문으로 내다보이던 아름다운 밤하늘 대신 어두컴컴한 천막만이 시야를 가득 채워왔다.
마법 물병이 존재하길래 마법 가방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했었다.
그럼 아무 물건이나 다 휴대할 수 있으니 편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법에도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서 액체만 들어간다는 것을 듣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마법도 만능은 아니라는 거지.’
이것저것 다 들어가는 마법 가방이 있으면 이부자리도 넣어 다닐 수 있고, 짐의 부피도 줄어들어 여러모로 편할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그대로 눈을 감으니 고요한 가운데 일행들의 얕은 숨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날이 선선해서인지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옆에서 세이린이 일어나는 듯한 인기척이 들어 눈을 떴다.
“…아델 경?”
“오늘은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서는 차례라서요. 누워 계십시오.”
“아….”
불침번, 생각도 못 했다.
여태 내가 편하게 자는 동안 다들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던 건가.
“불침번, 몰랐어요….”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저희는 하루 이틀 잠을 안 자도 크게 무리가 없지만 공녀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얼른 주무세요.”
“…네.”
맞는 말이다. 내가 의욕적으로 불침번을 서겠다 해도 어차피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이런 체력으로는 도리어 짐만 될 터였다.
지금도 온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이런 데다 밤까지 새운다면 다음 날 내 상태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리고 몇 번 뒤척거리다 잠이 든 것 같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뜨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으아….”
온몸이 뻐근하다. 종일 안 타던 말을 타고 이동한 데다, 바닥에서 잠까지 잤으니….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름 움직일 만했다.
‘못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네.’
역시 젊어서 그런지 회복 속도가 좋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일으켜드릴게요.”
세이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바닥을 짚고 앉아 있던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려 세워주었다.
“고마워요, 아델 경.”
“천만에요.”
말을 탈 때마다 계속 느끼는 거지만 다들 날 너무 휙휙 들어대서 내가 무슨 종이 인형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미적미적 밖으로 걸어 나가 잠을 깨기 위해 머리를 감았다.
시간 관계상 여유롭게 머리를 말릴 수가 없어서 덜 마른 상태 그대로 출발해야 했다.
허리까지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완전히 마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긴 머리 또 언제 해보겠냐는 심정으로 자르지 않고 있었다.
촉촉한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아르반에게 다가가니 그가 자연스레 손을 뻗어 왔다.
그는 나를 가뿐히 들어 말 위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햇볕을 쬐고 있을 때였다.
아르반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의아함에 그를 돌아보자 아르반이 나를 잡고 있는 반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사들이 순식간에 우리가 탄 말을 둘러싸며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돌연 살벌해진 분위기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예요?”
“쉿, 조용히….”
내 물음에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 그가 잔뜩 날선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쿵, 쿵, 쿵-
빠르고 묵직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여파로 근처의 나뭇잎들이 조금씩 흔들림을 더해 갔다.
내가 점차 가까워지는 무언가의 접근에 긴장해 있는 사이, 세이린과 릭스, 칼은 모두 말에서 내려와 검을 빼 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아르반 또한 뒤쪽으로 말을 물리고는 빠르게 뛰어내린 후 내게 팔을 뻗어 왔다.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상황 자체가 주는 무거운 분위기에 굳어 있다가 어색하게 그의 손에 이끌려 땅을 밟았을 때였다.
“쿠워어억!”
처음 듣는 희한한 울음소리에 무심코 고개가 돌아갔다.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야에 담긴 소리의 근원은 날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한 외향을 지니고 있었다.
‘…저게 뭐야?’
그것의 머리는 돼지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주둥이 안쪽으로 드러난 악어와 같이 뾰족한 이빨은 저것들이 돼지와 같은 가축이 아니란 사실을 역력히 드러내 왔다.
여기까진 그나마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그 돼지와 흡사한 것들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성난 들소 떼처럼 몰려오는 저 괴생명체들이 몬스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의 눈동자는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 차 동공과 홍채, 공막의 경계가 존재치 않았다.
그 탓에 놈들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괴해….’
녹색 파충류의 것과 같은 질겨 보이는 가죽으로 둘러싸여 있는 몬스터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무더기로 몰려오는데… 흉측하고 징그러운 그것들의 형상은 내 정신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토할 것 같아.’
아직 꽤 멀리 있는데도 밀려드는 혐오감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가 내 뒤에 서 있던 아르반과 툭, 부딪혀 버렸다.
하지만 미안하다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저 흉측한 것들이 땅이 진동할 만큼 미친 듯이 뛰어오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기괴하고 혐오스럽게 생겼을 줄이야….
가히 시각적 테러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나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한결같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온 몬스터 무리는 보이는 족족 기사들에 의해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빠르게 반응하면서 움직이는 게 실제로 가능할 줄이야.
‘이건… 진짜 현실감 없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대체 얼마나 수가 많은지, 기사들이 쉼 없이 베어넘김에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나는 그저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지켰다.
바람에 실려 오는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몬스터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 심장이 쿵, 쿵, 거세게 박동하는 것이 전신으로 느껴지는 데도 몸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그러다 운 좋게 내 앞까지 달려든 한 마리를 인지했을 때는 이미 그것이 양분되어 발아래 널브러진 후였다.
내게 달려든 몬스터를 단칼에 베어 버린 아르반은 피 묻은 검을 가볍게 휘둘러 털어낸 뒤,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빨리 정리하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듯하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공녀께서는 그대로 계십시오.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한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잠…!”
그는 제 할 말만을 던지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그에 기겁한 나는 황급히 아르반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눈 깜짝할 세에 그가 서 있던 위치가 바뀌고, 인근에 있던 몬스터들은 단말마조차 내지르지도 못한 채 죽어 나갔다.
나는 초조하고 다급해진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소리치듯 불러버렸다.
“아르반!!”
혼자 남겨진다는 불안감이 신경을 마비시켜 머릿속이 백지장 같았다.
무의식중에 마음속에서 부르던 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버렸지만 나는 거의 패닉에 빠지기 직전이었기에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공녀?”
비명과도 같은 내 부름에 우뚝 멈춰선 아르반이 나를 돌아봤다.
그 모습이 내게는 아주 느리게만 보였다. 마치 슬로모션처럼.
약간 놀란 듯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태양 빛으로 인해 평소보다 밝고 투명한 빛으로 흔들렸다.
그 모습이 꼭 출렁이는 파도를 연상시켰으나 애석하게도 당시의 나는 그 장면을 눈여겨보지 못했다.
일순 동요한 듯 보이던 아르반은 이윽고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을 내 모습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는 전방을 훑어보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몬스터들만을 치워버리곤 즉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아르반이 다시 내 옆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 상황이 몬스터에게 밀리지 않다는 것과 내가 위험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아르반이 나선다면 더 빠르게 정리될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 알고 있지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생명의 위협이었다. 맹수보다 위협적인 몬스터들은 존재만으로 내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불안해서…. 이제 괜찮으니까, 가보셔도 돼요.”
의연하게 말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긴장이 풀리면 목이 막혀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겁쟁이 일 줄 몰랐다.
“아닙니다. 상황정리도 잘 되어가고 있으니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아르반은 내 상태를 살피려는지 가까이 다가와 천천히,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많이 놀라신 듯한데,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와 시선이 교차했다.
나는 아르반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보기 싫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공포에 질려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조금만 지금 이대로 있고 싶어요. 제가 같이 오자고 제안해 놓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한심한 모습 보여서 죄송해요….”
눈을 감아버린 나는 그의 눈동자에 투영된 감정을 보지 못했다.
“충분히 놀라실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제 쪽에서 신경 써드리지 못한 불찰이 큽니다.”
“하하… 그럼 서로 미안한 거니까, 이번만 넘어가는 거로 해줘요. 다음번에는 이런 일 없도록 마음 단단히 먹을게요. 약속해요.”
힘없이 웃으며, 여전히 내 뺨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