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심지어 본래의 리엘리가 승마를 배웠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마차를 타고 가다 중간부터는 걸어서 올라가리라 생각했지, 말을 타게 될 줄이야. 생각이 너무 짧았다.
말은 타보기는커녕 가까이서 볼일조차 없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어쩌냐.
그래도 이걸 말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물을 머금고 사실을 얘기하기로 했다.
“저기… 각하. 죄송하지만 제가 말을 탈 줄 몰라요….”
“…….”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르반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저와 동승하시죠. 말의 피로도를 고려해서 저와 아델, 릭스와 교대로 함께 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부단장은 보시다시피 무게가 상당히 나가서, 공녀까지 동승하면 말이 견디지 못할 겁니다.”
“네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마차랑 말 한 마리는 어떻게 해요?”
“말은 풀어주고, 마차는 이곳에 두고 갈 겁니다. 인적도 드문 곳이고, 몬스터가 출몰하는 구간도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누가 훔쳐 가면….”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바로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이 비싸 보이는 마차를 누가 훔쳐 가도 어쩔 수 없다고 쿨하게 넘기다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마차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얼결에 아르반이 올려주는 대로 그의 말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느낌이 이상했다.
나도 모르게 몸을 경직시키고 얼어 있는데 아르반이 그런 내 뒤로 날렵하게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
뒤에서 아르반이 무어라 말을 거는 듯했지만 듣지 못했다.
살아 있는 생물의 위에 올라타 보기는 처음이라 좀 긴장되기도 하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 말이 몸을 살짝 트는 느낌에 몸을 바짝 굳혔다.
생경한 감각에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큰 손이 튀어나와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악!”
잠시 아르반의 존재를 잊고 있던지라 짧은 비명이 튀어 나갔다.
허리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내 뒤에 아르반이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긴장하지 마시고, 너무 앞으로 몸을 기울이지 마십시오. 적응되실 때까지 천천히 걸을 테니 불안하시면 저를 잡으셔도 됩니다.”
세상에… 혼이 나갈 것만 같다.
인간이 아니라 조각상이라도 되는지, 허리에 감겨 있는 팔이 대리석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내 허리와 옆구리 쪽을 감싸고 있는 손의 열기가 옷 너머로도 전해질 만큼 따뜻했다.
손은 몇 번 잡아보면서 체온이 높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손이 내 몸에 닿아 있으니 느낌이 오묘했다.
게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복근과 내 어깨선보다 넓고 단단한 흉근의 감촉이 내 신경을 한층 예민하게 만들었다.
‘미치겠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온몸의 신경이 등과 옆구리 쪽으로 쏠려버린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
누군가의 품에, 그것도 이렇게 몸 좋은 남자의 품에 폭 파묻혀보기는 또 처음이라 민망함이 몰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 둘 바를 모르겠어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의 시선이 따갑게 나를 때려왔다.
보지 마…!
민망함에 온몸이 타들어 가 버릴 것 같았다.
릭스는 왜인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칼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관심을 끄는 듯했다.
그리고 세이린은 잔뜩 상기됐을 내 얼굴을 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왠지 얄미워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았더니 짐짓 모른 척 시선을 돌린다.
그래 봐야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다 보였다.
그나마 위안인 건 내 얼굴에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이 내 뒤에 있어서 이 사태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차를 뒤로하고 이동하는데, 승마 초보인 나 때문에 일행 모두 사람이 걷는 수준보다 조금 빠른 정도로 슬슬 걸어가야 했다.
아르반이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기 때문일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지며 안정감이 느껴졌다.
좀 더 속도를 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허리에 둘려 있는 그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 각하. 조금 더 빨리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그 속도감에 엉덩이는 좀 아팠지만 괜히 신이 나서 감정이 고양된 나는 무의식중에 아르반의 팔을 양손으로 꽉 잡아버렸다.
갑작스레 내게 붙들린 그의 팔이 움찔, 하고 떨려왔다. 그에 너무 세게 잡았나 싶어 냉큼 사과했다.
“미안해요, 너무 세게 잡았나요?”
“…아닙니다. 불안하시면 그대로 잡고 계십시오.”
아르반이 작게 속삭였다.
내 허리를 잡고 있는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본래도 낮은 편인 그의 음성이 한층 더 나지막하게 들리는 듯했다.
가까이 붙어 앉아 있다 보니 작게 말해 그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사실 불안한 건 아님에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어서 굳이 그의 말을 정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일정한 속도로 달리다 보니 금세 또 익숙해져 나름의 여유가 생겼다.
다른 말로는 어느 정도 몸에 익으니 정신이 산만해졌달까.
마차에서부터 질리게 봐온 경치보다는 등 뒤의 남자에게 더 관심이 갔다.
내내 붙들고 있던 그의 한쪽 손 위에 내 손을 슬쩍 겹쳐보았다.
정확하게 손바닥끼리 맞대어 길이를 재보는 건 아니었지만 아르반의 손등 위로 올려진 내 손이 그의 손보다 현저히 작다는 게 단번에 체감되었다.
“핏줄 좀 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만드는 손이었다.
‘원래 손등에 핏줄 튀어나온 거 안 좋아하는데….’
이 남자는 하다못해 핏줄까지 잘 빠졌다. 뭐 한군데 모난 부분이 없네. 심지어 손톱도 예뻐.
무의식중에 손끝을 세워 핏줄을 따라 손등에서 손목으로, 그리고 팔뚝에 이르렀을 때, 아르반이 날 지탱하던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을 옭아매듯 붙잡아 버렸다.
엉겁결에 손이 잡혀버린 나는 고개를 꺾어 그를 쳐다봤다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아르반의 얼굴에 놀라서 빠르게 원상 복귀했다.
심장이 제 존재를 피력하며 격렬히 날뛰어댔다.
저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매일 본다면 심장이 열댓 개여도 금방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너무 만지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화가 난 건지, 난감해하는 건지 잘 분간이 가지는 않았지만.
“네, 죄송해요….”
미안하다, 나 때문에 정신 사나웠니?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게 만지작거린 감이 없잖아 있었기에 이제라도 얌전을 떨어보았다.
***
한동안 아르반의 품에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다 점심을 먹고부터는 세이린의 말에 몸을 실었다.
그녀와 함께 이동하는 건 아르반과 함께할 때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리엘리의 키가 한국의 평균 신장보다 약간 더 크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여기서도 평균 이상은 될 텐데, 세이린은 그런 나보다 십 센티는 더 큰 듯했다.
얼추 릭스와 비슷한 신장에 기사답게 잘 단련된 탄탄한 몸.
아르반만큼 크고 덩치가 좋지는 않았지만 나 하나 품에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피지컬이었다.
세이린과 동승하는 건 아무래도 아르반과 함께 할 때보다 여러모로 훨씬 편했다.
몸도 더 푹 기대 편하게 앉을 수 있었고, 엉덩이랑 허벅지가 아프다고 투덜거리기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산길을 올랐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내려다보는 세이린의 표정을 목격하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작고 무해한 소동물을 바라보는 양,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또한 의식 중이나 무의식중이나 은근히 나를 챙기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분 되게 이상하네.’
겉모습이 세이린보다 어리긴 하지만 알맹이는 동갑인데….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누가 나를 챙겨주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봐 주는 것이 기분 좋아 조용히 있었다.
생각해 보니 공작가 저택에서는 갑자기 생긴 아몬이라는 동생을 내가 챙겨줘야 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모두의 보살핌을 받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아몬도 이런 기분일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챙김받는 것을 반기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아몬에 대한 걱정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혼자 잘 있으려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중 슬슬 산세가 가팔라져서 이동 속도가 늦춰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릭스의 말에 올라탔다. 초반에는 어색했지만 릭스의 성격이 밝은 편인지라 금세 어색함을 던져버리고 함께 조잘거릴 수 있었다.
사교성이 좋고 어려서 그런지 말투도 무겁지 않고 친근한 편이라 나도 좀 더 편하게 말을 텄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버린 현재.
이제부터는 정말 마차도 아니고 임시 막사에서 다 같이 잠을 청해야 한다.
그게 약간 두근거리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대체로 머리만 붙이면 잘 자는 편이긴 했지만….’
그건 한국에서의 나였지, 이 몸은 침대 외의 곳에서 몸을 누여본 적도 없을 태생부터 아가씨였으니까.
그 걱정을 하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닌 모양인지 임시 막사를 준비 중인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내게로 모여들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주었다.
안심시키려고 웃어 보인 건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인 것 같다.
특히나 세이린과 릭스의 얼굴에는 걱정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거기다 내내 변변한 대화조차 나눈 적 없던 칼이 먼저 다가와 자신의 모포를 내게 내미는 바람에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그렇게 불안해 보이나?’
칼이 신경 써 줄 만큼?
조금 어이없는 기분이 되어 잠시 멍하니 모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