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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26화 (26/153)

26화.

그런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이 응시하다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오늘 처음 만난 제가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 대단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오히려 가까운 사이라 더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법이죠.”

“그렇긴 하지만….”

“기사단 사람들이 제 과거사를 듣고 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글쎄요, 가만히 있을 자신은 없네요.”

낮은 웃음을 흘리던 세이린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있기에, 지금 기사로서의 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뭐, 결론적으로 가족들이 무사하고 현재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리 말할 수 있는 거겠죠.”

나는 그녀의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았다.

나약하고 불운했던 과거를 딛고, 누구보다 활기차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공녀님이라면 제 이야기를 듣고 저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발설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모습이 담겨 있는 세이린의 녹안에 시선을 맞추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연히 경의 이야기는 저만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혹시라도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소문내기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거겠죠.”

세이린은 웃음기 띈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해주시는 공녀님께서 제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하실 일은 없을 듯하니, 역시 제 판단이 옳은 것 같군요.”

“…아델 경이 날 믿고 얘기해줬다는데, 믿음을 배신할 순 없잖아요.”

정말이지… 딱 그 상사에 그 부하였다.

아르반도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똑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의도보다 부루퉁한 목소리가 튀어 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들려온 세이린의 음성이 날 수줍게 만들었다.

“공녀님은 제가 보아온 그 어떤 귀족보다 다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이 불만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세이린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데, 이런 종류의 칭찬은 처음 들어보는지라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내가 입만 뻐끔거리는 와중에 세이린은 창밖의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대공의 작위를 물려받으시고 몇 번인가 함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참석은 했지만, 갈 때마다 숨이 막히더군요.”

그 당시를 회상하는지 세이린의 미간이 작게 일그러졌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의복을 갖춰 입고 웃는 얼굴로 서로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하며, 앞에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칭찬하다가도 돌아서면 흉을 보죠.”

세이린은 마치 과거의 그들에게 조소하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비틀린 미소가 당시 그녀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했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이에게는 찬사를, 지위가 낮은 이에게는 멸시와 조롱을 일삼는 그들에게 환멸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건 어디를 가나 사람이 여럿 모인 곳에서 비슷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보다 강한 이에게 약하고, 약한 이에게 강하다.

더구나 이곳은 철저한 계급 사회이니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공녀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죠. 사실 각하께서 저와 릭스를 이번 여행길에 데려간다고 하셨을 때 속으로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왜요?”

“여자가 검을 드는 것과 평민 출신 기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귀족들이 많으니까요.”

이곳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세계였다.

그러니 출발선이 완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남자라고 꼭히 여자보다 강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또한 평민이라고 귀족들과 다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선입견이 문제인 것이다.

‘꼭 뭣도 아닌 것들이 입만 나불거리더라.’

그렇게 불만이면 자기들이 기사 하면 되잖아.

나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기사니까 검만 잘 쓰면 되죠, 참나. 뭔 상관들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귀족들은 아닌가 보더군요.”

세이린이 양손을 깍지껴 머리에 베고는 활짝 웃었다.

그녀의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별이 비쳐 반짝였다.

나는 잠시 아름답게 빛나는 그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

그 뒤로 세이린과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세이린과 급속도로 가까워져 더 기분 좋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세이린의 도움을 받아 먼저 머리를 감았다.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에 수건을 칭칭 둘러 싸매고, 세이린을 위해 마법 물병을 들어주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에 소름이 돋아 부르르 몸을 떠는데 그때 마침 임시 막사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릭스가 품에 사과 몇 알을 안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눈이 저절로 그를 향해 돌아갔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마치 희한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눈을 연신 굴려대며 나와 세이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내가 자신의 그런 행동을 모두 주시하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채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 하하…. 공녀님, 아침은 간단하게 사과로 괜찮으신가요?”

“네, 좋아요. 저는 하나면 되는데, 아델 경은요?”

열심히 머리를 감고 있는 세이린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감은 상태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답해왔다.

“저도 사과 하나면 됩니다.”

대답은 세이린이 하고 있음에도 릭스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들고 있는 마법 물병으로.

“공녀님, 물 좀 잠시만 사용해도 될까요? 사과만 씻으면 되는데….”

“어, 아델 경. 릭스 경이 물 잠깐만 써도 되냐는데요?”

“잠시만요! 금방 씻겠습니다.”

세이린은 급히 거품을 벅벅 헹구며 대답했고, 그 앞에 물병을 든 나와 사과를 든 릭스가 멀뚱히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다 됐습니다.”

세이린이 머리의 물을 짜내며 말했다. 나는 어제처럼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자연스럽게 수건을 받아든 세이린이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머리를 털어댔다.

“자, 릭스 경. 사과 씻어요.”

내가 허공에 물병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자 릭스가 댕그랗게 커진 눈으로 사과를 꽉 끌어안았다.

저러다 사과 다 상하겠다.

“괜, 괜찮습니다, 공녀님. 이 정도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이거 혼자 쓰기 힘들던데, 빨리 씻어요. 자, 저 팔 떨어지겠어요.”

“어… 어어, 네.”

내가 팔을 휘휘 흔들고는 물병을 기울이자 릭스가 엉겁결에 사과를 씻기 시작했다.

그가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하나를 씻자 옆에서 머리를 말리던 세이린이 쓱,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릭스가 자연스럽게 사과를 건네자 세이린은 물기도 털지 않고 그대로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와삭-

아, 맛있겠다. 나도 사과… 다음 거 무조건 내 거다.

속으로 다짐하며 두 번째 사과를 씻고 있는 릭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 되었다, 싶을 즘 얼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릭스가 아까와 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공녀님?”

“저도 사과요. 사과 하나.”

“…직접 잘라 드시게요?”

“아뇨, 그냥 먹을 건데요.”

굳이 밖에 나와서까지 불편하게 그럴 필요 있나.

여전히 당황스러운 낯으로 우왕좌왕하는 릭스에게 다시 손을 쫙 펴서 내밀었다.

얼른 내 사과를 달라!

그러자 엉겁결에 사과를 건네준다. 좋아. 나도 세이린처럼 크게, 야무지게 베어먹어야지.

와삭-

기분 좋은 사과 씹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퍼지는 새콤달콤한 과즙이 환상적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꿀 박혔나? 엄청 다네. 릭스 경도 빨리 씻고 먹어봐요.”

“네!”

릭스는 내가 맛있게 사과를 먹는 모습을 보더니 나머지 사과를 다시 뽀득뽀득 열심히 씻었다.

마침 릭스가 사과를 다 씻었을 때, 아르반과 칼이 짐 정리를 마치고 다가왔다.

아르반은 걸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조금 멈칫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의문을 느꼈다.

릭스도 그러더니, 왜들 저러는 거야?

조금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냥 넘겨버렸다.

“각하, 사과 드세요.”

와삭-와삭-

옆의 세이린과 서로 와삭 소리를 내며 열심히 사과를 씹어 삼키는 와중에 그에게도 권했다.

내 것은 아니지만 맛있으니 먹으렴.

그러자 알 수 없는 표정이 된 아르반이 내 머리 위의 수건과 사과를 번갈아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릭스에게서 사과를 받아들었다.

수건으로 머리 올린 거 처음 보나? 그럼 신기해 보이기는 하겠다.

그나저나 사과 진짜 맛있네. 하나 더 먹는다고 할걸.

와삭-와삭-

칼에게도 권하려 했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벌써 먹고 있길래 관뒀다.

사과를 다 먹고 이불을 정리한 후, 돌아보니 다들 어느새 씻고 준비를 마쳤는지 마구를 살피고 있었다.

그 뒤로는 어제와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세이린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가끔 아르반에게도 말을 붙여 보았지만, 번번이 맥이 끊기고는 했다.

“각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넷입니다.”

“그럼 아델 경이랑 동갑이시네요?”

“네, 그렇게 되는군요.”

“…….”

대략 이런 식이다.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생일은 언제 인지, 키가 몇인지 등등 물어보고 싶은 것이야 많았지만 너무 집요하게 보일 것 같아 말을 줄였다.

아르반이랑은 어차피 오랫동안 보고 지낼 사이니까, 조바심 내서 질척거리지 말자.

그 덕에 세이린이랑 둘이 신나게 떠들었다.

***

“공녀,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네.”

아직 점심때가 아니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르반이 문을 열고 손을 내밀기에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잡고 내려섰다.

그리고 바로 마차를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산맥의 초입입니다. 마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라 이제부터는 함께 말을 타고 이동하셔야 합니다.”

확실히 마차가 다니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이는 길목이었다.

앞쪽에서 릭스와 칼이 필요한 짐들을 말에 옮겨 싣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 말 탈 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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