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25화 (25/153)

25화.

그런 내 마음이 얼굴에도 드러났는지, 아르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막사 없는 흙바닥에서도 잘 수 있으니, 그런 표정 지으실 것 없습니다.”

내 얼굴이 어떻길래 그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래도 저 혼자만 너무 편하게 가는 것 같아서… 죄송해서요.”

“…….”

“다들 말을 타고 가는데 저만 마차로 이동하고, 자는 것도… 솔직히 이런 것까지 준비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이런 것까진 준비하지 않았어도 아무 상관 없었을 텐데.

나를 배려해준 그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거기다 마차의 크기가 어찌나 넉넉한지, 두 사람 정도는 편하게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연신 손가락을 얽어대며 그에게 시선을 던지자 아르반이 나와 눈을 맞춰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으니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희는 전쟁을 겪으며 수도 없이 야영을 해왔고 밤을 지새우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 정도 잠자리에는 누구도 불만이 없을 테니, 공녀는 공녀 자신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내뱉는 그의 음성이 어쩐지 나를 달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을 일게 만들었다.

‘전쟁이라….’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이라는 걸.

또한 그의 말을 듣고 한 가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르반이 전쟁 영웅이란 칭호로 불릴 수 있는 이유를.

그는 살육이 난무하는 전투에서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초를 수도 없이 넘어왔을 것이다.

전쟁 영웅이라 불리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존재했겠지. 소설에는 고작 몇 마디로 축약되었던 이야기를 실제로 살아왔을 저 사람은.

그 사실이 머리에 박히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르반이 가엽고, 또 안타까웠다.

“저는 너무 마음 쓰실 것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혹여 제 말이 공녀께 상처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는 처음 보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긴 속눈썹이 음영을 만들어 안 그래도 깊은 눈매를 부각시켜 한층 더 애처로워 보였다.

“…그 표정은 거둬주십시오.”

그의 곤란해하는 모습이 내게는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이건 울적해진 내 착각이겠지.

만감이 교차해 나 자신의 표정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밤이란 사람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에요, 사과라니… 오히려 감사한걸요. 그런데 저 혼자 자기에는 좀 넓은데, 아델 경만 괜찮다고 하면 같이 자면 안 될까요?”

이런 마음으로 혼자 잠이 들면 청승 떨면서 감성에 젖어 들 것 같았다.

남자들 사이에 세이린을 혼자 재우는 것도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여성분이신데, 다른 분들이랑 주무시는 것보다 저랑 함께 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군요. 제가 가서 아델에게 전하도록 하죠.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네, 각하도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르반은 끝까지 내 시선을 회피하다 임시 막사로 향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빠르게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말랑해졌다.

그를 처음 봤을 때는 원작에서 드물게 정상적인 인물이라 내적 친밀감도 높았고, 잘생긴 외모에 호감이 갔었다.

‘첫인상은 정말 귀족의 정석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완벽한 조형물에 가깝다 느꼈던 남자였는데….’

이렇게 보니 귀여운 면도 있었다.

내가 조금 울적한 티를 내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생긴 사람이 서툴게 변명을 하다 자리를 피한다.

마치 어리숙한 소년과도 같은 모습에 남몰래 웃었다.

아르반이 막사로 향하고 잠시 뒤, 세이린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자신이 왜 쫓겨났는지 의아한 듯,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세이린은 이내 내게 다가왔다.

“각하께서 공녀님이랑 함께 자라고 하시던데,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전혀요.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요. 여자라고는 저랑 경 둘뿐인데, 매트리스도 넓고 같이 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큰 침대로 변해있는 마차 내부를 살핀 세이린이 수긍해왔다.

“아아… 그러셨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간단히 씻고 잘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숲 한가운데서 무슨 수로 씻는단 말인가.

“여기서 씻을 수도 있어요?”

“각하께서 아공간 마법이 걸린 물병을 가져오셨습니다. 트여 있는 곳이라 샤워는 무리여도 간단하게 씻는 정도는 가능하니까요.”

“아, 그런 물건도 있군요. 신기하다….”

휴대용 물탱크라니. 정말 어떤 면에서는 21세기 지구보다 발달한 부분이 있는 세계였다. 마법이란 놀라워.

“아무래도 마법 물품은 귀하니까요.”

세이린은 빙긋 웃어 보이고는 짐을 뒤져 하얀 물병을 꺼내왔다.

세숫대야가 없었기에 세이린과 나는 서로 물병을 들어주며 번갈아 가면서 씻어야 했다.

내가 먼저 씻고 세이린이 씻은 후, 그녀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 그대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나려 하길래 미리 준비해둔 수건을 얼른 건넸다.

이게 바로 잘생긴 스포츠 선수에게 수건을 건네주는 매니저의 기분인가.

혼자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세이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공녀님은 평생 시중을 받기만 하시며 살아오셨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제 시중을 들어주시네요.”

“응? 이게 딱히 시중이랄게 있나요…? 서로 도와주는 거잖아요.”

이게 시중 측에나 들어갈 수 있나? 머리 감겨주고 수건으로 직접 머리도 말려주고, 뭐 그 정도는 돼야 시중이라 할 수 있지.

시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세이린이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대답해 왔다.

“각하께서도 저를 편하게 대하시지만 이런 도움을 주시거나 잠자리를 나누어 쓰자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냥 사람의 성향 차이 아닐까요? 아델 경도 귀족인데 제 시중을 들어준 거잖아요.”

“작위는 있지만 저는 귀족이라기에는 거리가 멉니다. 그저 한 사람의 기사일 뿐이죠.”

대화하면서 모포를 꺼내 마차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창문 밖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별들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옆에 나란히 누운 세이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도 귀족이시잖아요.”

“음, 귀족이라고 다 같지는 않으니까요. 애초에 귀족가의 여자가 검을 드는 일 자체가 드물죠. 개중 기사가 되는 이는 더욱 적고요.”

“와… 대단한 거네요, 그러면. 아델 경은 검이 좋아서 기사가 되신 건가요?”

귀족가의 영애였던 세이린은 어떤 이유로 단순히 검을 수련하는 것을 넘어 기사가 된 것일까.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긴 이야기입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말씀드리고 싶네요.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평온하기만 한 세이린의 태도와 달리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지 못했다.

평화롭고 그립기만 한 유년 시절과는 거리가 먼, 그저 한 소녀의 살아남기 위한 여정.

세이린은 사실상 평민과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는 가난한 남작가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전대 아델 남작은 가문의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며 살아가는, 귀족으로서의 위신보다 가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 백작가의 기사로 일하게 된 남작은 가족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며 상황이 급변했다.

둘째를 출산하며 병을 얻은 아내의 치료를 위해 남작은 전 재산을 털었지만 필요한 금액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남작에게 손을 내민 것은 그의 고용주인 백작이었다.

백작은 나이도, 돈도, 탐욕도 많은 자였다. 전부터 세이린을 눈여겨보고 있던 백작은 남작에게 그 더러운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세이린과 자신의 결혼을 조건으로, 남작 부인의 치료비를 대주겠다는 제시를 해 온 것이다.

하지만 아내만큼이나 딸을 사랑한 남작은 탐욕스러운 늙은이에게 어린 딸을 팔아버릴 수 없었다.

남작은 제안을 거절했고, 그에 백작은 태도를 바꾸어 그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작은 특단의 조치로 제 딸에게 남작의 작위를 물려주며 딸을 백작에게 보낼 의사가 없음을 피력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백작은 나날이 남작의 숨통을 조여왔고, 결국 그는 아픈 아내와 아이들을 이끌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떠난 여정이 평탄할 리 만무했다.

병든 아내는 장시간의 이동을 힘겨워했고, 수중에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한밤중 숲에서 맨몸으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러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웠지만 한편으론 조금 안심도 되었죠. 더는 가난에 시달리지도, 백작의 협박에 숨죽일 필요도 없이 편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

“그때 기적처럼 칼 부단장이 이끌던 부대와 마주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어떤 심정으로 내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문득 두려워졌다.

하지만 세이린의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부단장이 했던 말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발버둥 쳐 살아남아라.’ 그리 말하며 저를 바라보는데….”

세이린은 그 당시를 회상하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부단장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습니다.”

“…….”

“부끄러웠습니다. 무엇 하나 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놔버리려 했던 자신이. 그리고 저도 부단장처럼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죠. 다행히 어릴 적부터 조금씩 익혔던 검에 재능이 있어 그 뒤로 악착같이 검에만 매진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감은 세이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두 번 다시 목숨을 포기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겠노라. 또한 가족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지켜내 보이겠노라.”

“…….”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카넬로웰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죠.”

“…아델 경, 미안해요. 힘든 이야기를 꺼내게 했네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기대에 부풀어 꺼낸 말이었는데, 내 생각 없는 말이 세이린의 아픈 상처를 들쑤셔버렸다는 죄책감에 눈을 꾹 감아버렸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면목이 없었다.

“아뇨, 공녀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어서 했을 뿐인걸요. 항상 언젠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얼굴에 닿는 감촉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세이린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옅게 웃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