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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24화 (24/153)

24화.

잠시 뒤,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마차에서 내려 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삼두마차는 마부도 없이 칼과 릭스가 마부석에서 직접 말들을 몰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린은 마차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어.’

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대화 자체가 힘든 구조였다.

아, 마부석은 예외로 쳤다. 칼은 워낙 말수가 없었다.

아르반이 내다보이는 쪽의 반대편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내밀어 뒤쪽을 확인했다.

마차의 뒤꽁무니쯤에 붙어 따라오던 세이린의 말이 보였다.

내가 고개를 빼꼼 내밀자 세이린은 속도를 높여 마차에 가깝게 따라붙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공녀님! 위험하니 머리를 내미시면 안 됩니다!”

나는 곧장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내밀었던 고개를 다시 집어넣으며 얌전히 앉았다.

“그냥 경이랑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요. 잘 앉아 있을 테니까 지금 위치 유지해주시면 안 될까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내 안전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사실 머리를 다 내민 것도 아니고 정말 얼굴만 빼꼼 보였을 뿐인데 그녀의 반응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아까의 다정한 표정과 달리 단호하고 진지한 얼굴도 수려하기만 했다.

멋있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데, 안 되겠지.

세이린은 일행 중 유일하게 같은 여자이기도 해서 더 호감이 갔기에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내 목소리가 그녀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 했다.

고개를 창문 가까이 붙인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위치와 일직선상에서 말을 모는 세이린에게 향해 질문했다.

“저기, 아델 경.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스물넷입니다.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편하게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그럼… 릭스 경은 아델 경보다 어려 보이는데, 제가 맞게 본 건가요?”

“예, 릭스가 스물두 살로 기사단에서 가장 막내입니다. 그렇다고 실력이 뒤처지는 것은 아니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부단장은 서른여덟입니다.”

빙의 전 내가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이었으니, 이곳 나이로 치면 그녀와 동갑이었다. 신체나이로 따진다면 세이린 언니가 되겠지만.

‘…잠깐, 그럼 당당하게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거 아냐? 나중에 슬쩍 찔러볼까. 아냐, 여기는 가족 외에는 언니, 오빠라고 안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이런저런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세이린과의 대화에 열중했다.

“다들 젊네요. 각하가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차출해 오셨을 정도면 모두 실력이 좋으실 텐데….”

“카넬로웰의 기사단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운영되어 단원 모두 어디를 가나 한 명 이상의 몫을 해내는 이들입니다.”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지 이야기를 하는 세이린의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였다.

그 눈빛에서 그녀가 얼마나 카넬로웰 기사단의 기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그 마음이 전해져 왔다.

“아… 물론 제 자랑은 아닙니다.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막상 말하고 보니 무안한지 조금 상기된 얼굴이다.

“기사단 모두의 실력을 믿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은걸요? 함께하는 분들이 믿을 수 있는 실력자라니, 든든하겠어요.”

아직 세이린의 성격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가 과시하기를 좋아하거나 근거 없는 자만심에 취해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하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이린이 마주 웃어 보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을 몰고 있었기에 금방 다시 정면을 응시했지만, 순간적으로 내비친 표정이 밝게 피어 있었다.

그 무구해 보이는 얼굴이 내 시야에 박혀 들어왔다.

어쩌지, 이 잠깐 사이에 그녀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버렸다.

헤어질 생각을 하면 벌써 서운한 마음이 차오를 만큼.

***

세이린과의 대화는 한 번 물꼬를 트고 나니 술술 이어져갔다.

“아델 경의 가족들은 모두 대공령에 사는 거예요?”

“예, 아버지는 한때 기사셨지만 지금은 연세가 있으셔서 은퇴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작은 텃밭을 가꾸고 계십니다. 동생은 아직 어려 아버지께 간단한 훈련을 받고 있죠.”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제법 대화가 통해서인지 물어보지 않은 것도 곧잘 말해온다.

“오… 동생은 여자아이인가요, 남자아이인가요? 아델 경의 동생이면 되게 귀여울 것 같은데, 몇 살이나 됐어요?”

“저와는 터울이 좀 있는 편입니다. 남자아이고, 열 살이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확실히 뭘 해도 귀엽게만 보이더군요.”

동생 이야기가 나오니 얼굴이 환해지는 것으로 보아 동생을 상당히 아끼는 듯했다.

가족에 대한 말이 나오니 뭔가 호구조사 하는 기분이라 슬쩍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저물기 전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쯤 되니 계속 앉아 있는 것도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엉덩이 네모 될 것 같아.’

그런데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들 멀쩡하게만 보여서 그들과 나의 체력 차이를 절실히 실감하게 됐다.

정말 돌아가면 운동이라도 시작해야지, 안 되겠다. 나는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체력이 없는 편인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래도 지금이 한국에서 살았을 때보다는 나은 편인데….’

내가 현자 타임을 겪고 있는 동안 일행들은 날이 저물기 전에 머무를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얼른 마차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차가 멈추자마자 한달음에 폴짝 뛰어내려 땅을 밟았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서 임시 막사를 치기 위해 움직이는 기사들을 도우려 다가갔지만….

“괜찮아요, 공녀님. 이 정도는 저희만으로 충분하니 쉬고 계세요.”

라며 릭스가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래서 그냥 하릴없이 마차에 걸터앉아 다리나 흔들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가득 수놓고 있었다.

아마 지구에서 이런 광경을 보려면 몽골에나 가야 하지 않을까?

멍하니 하늘의 별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르반이 있었다.

그가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던 수려한 얼굴에 하얀 달빛이 드리워졌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보다 차가운 빛을 띠는 듯한 피부와 투명하고 깨끗한 푸른 눈동자는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각하?”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를 불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음에도 아르반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왔다.

“아침에 드린 이야기를 마저 나누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어 마차 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엉덩이를 떼고 안으로 자리를 옮기며 허둥거렸다.

“아, 네. 잠시만요,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아르반은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고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믿을 수 있는 이들로 선별해 데리고 왔지만 성검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가 많아져 봤자 좋지 않으리라 판단됩니다.”

“…….”

“성검이 제 손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누설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겁니다. 저도, 당신도.”

고요히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해 왔다.

“공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뜻대로 기사들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본격적으로 성검을 찾아 나설 때는 저와 둘이서만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나 역시 그의 의견이 옳다고 봤다. 말이라는 건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갈지 모르는 것이다.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겠지.’

어차피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르반이겠지만, 제국에 있어 중요한 상징을 품고 있는 물건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저도 가능하면 알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이들이라 해도 알고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본의 아니게 어디론가 흘러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성검이 잠들어 있는 장소가 혹시 위험한 곳입니까?”

그의 질문에 잠시 원작의 내용을 돌이켜봤다. 위협적이라 여겨질 만한 요소는 없었다.

“아뇨, 딱히 그렇지는… 지하에 매장되어 있어 찾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뿐이라, 위험이라고 하면 산맥에 사는 몬스터 정도지 아닐까 싶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까운 위치에 도달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잠시 내가 앉아 있는 쪽 의자를 바라본 아르반이 마차에서 내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내려 보시겠습니까.”

“…어, 네.”

혼자서도 알아서 내려갈 수 있지만 도와주려 내민 손을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밤이라 숲의 공기가 더 차갑기 때문일까, 맞닿은 손바닥이 아침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괜히 혼자 의식돼서 뒷짐을 지고 그와 닿았던 손을 꼼질거리는데, 아르반이 좌석의 한쪽을 가리키며 나를 돌아봤다.

“이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좌석 안쪽에 있는 간이침대가 나옵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작은 소음과 함께 양쪽 좌석 아래에서 매트리스가 튀어나와 연결되었다.

“와…!”

전혀 예상치 못한 신식 기술에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정도면 현대 기술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어쩐지 전에 그가 타고 왔던 마차보다 사이즈가 훨씬 크더라니…. 저건 아마 마법이겠지?

“이런 기능도 있어요? 저희 집 마차는 그냥 평범하던데.”

“여행용으로 특수 제작된 마차입니다. 시간이 없어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을 구매했는데, 마음에 드시는 듯하니 다행이군요.”

…나 때문에 구매했다는 거잖아.

아무 생각 없이 신기해하다 삽시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헐. 아니 이거 비쌌을 것 같은데, 저 때문에 산 거예요?”

“그렇게 비싸지는 않습니다. 두면 언제가 쓸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그의 심드렁한 말투로 보아, 저 마차는 이번 여행을 위한 일회용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끽 해봐야 대공저의 마차 보관소 한구석에서 자리나 차지하고 있을 운명이겠지.

공작저로 돌아가면 저 마차 값을 따로 보내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르반이 허를 찌르는 질문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보다 ‘헐’이 무슨 뜻입니까?”

“…….”

젠장, 진짜 말 좀 가려서 해야지.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나는 찰나의 순간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대강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놀랐을 때 사용하는 감탄사예요.”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단어인데….”

그렇겠지. 여기선 나밖에 모르는 단어일 테니까.

“아, 하하… 사실 놀랐을 때 저 혼자 사용하는 단어예요. 습관이라….”

다행히 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는 모습을 보았는지,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주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공녀께서는 마차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숲에서는 해가 지면 이동이 불가능하니,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각하께서는 어디서 주무시고요?”

“기사들과 막사에서 자면 됩니다.”

“…….”

실상 신분은 대공인 그가 더 높은데 대접은 나 혼자만 받고 있다.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이게 반복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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