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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23화 (23/153)

23화.

하지만 그 서릿발처럼 싸늘한 음성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나뿐인 듯했다.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냉랭한 가운이 감도는 아르반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 모습마저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해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시녀는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최소한의 인원으로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내 설명에도 그의 표정은 전혀 바뀐 바가 없었지만 분위기는 한결 풀어졌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데려온 이들은 요리사와 기사 몇이 전부입니다. 공녀께서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네, 근데 요리사도 동행하나요?”

“예, 공녀에게까지 건량을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혹시 다른 분들은 건량을 드시는 건가요?”

그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뉘앙스가 어째 그런 것 같다.

“예.”

짧지만 단호한 그 한마디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인원을 늘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시녀도 데려가지 않는 형국에 요리사라니, 가당치도 않다.

“왜요? 다들 건량을 먹는데, 저 때문에 요리사를…?”

“저와 기사들 몫까지 요리하려면 시간이 많이 지체됩니다. 전쟁을 겪으며 다들 건량에는 익숙해져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들 건량을 먹으면 저도 같이 건량을 먹으면 되잖아요? 왜 괜히 저 때문에 요리사를 데려가시냐고요.”

“…….”

아르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도로 다물렸다.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멈춰 있던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공녀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건량으로 식사를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이제 다 해결된 거죠?”

“예.”

아르반은 마차 문을 닫고 기사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말에 올랐고, 요리사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아르반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함께 마차에 타지 않고 그대로 말에 오른 아르반에게 마차의 창문을 열고 다시 한번 물었다.

“각하께서는 정말 같이 안 타고 가세요?”

한 번만 권하는 건 정 없어 보이니까.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저 혼자 타고 가기는 죄송해서요.”

“어차피 산맥에 도달하면 산세가 험해 마차를 탈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라도 편하게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으음, 네에….”

대공은 말을 타고, 공녀는 마차를 타고 간다니… 이 무슨 부조화란 말인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 있게 ‘나도 말을 타고 가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난 말을 탈 줄 모르니까. 아, 정말이지… 뜻밖의 복병이었다.

돌아오면 진짜 승마라도 배워둬야 하나.

***

에시트 산맥으로 향하는 길은 순조로웠다.

흙바닥을 달리는 마차는 전처럼 승차감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참아줄 만한 수준이었다.

공작가를 떠나와 몇 시간은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번화가를 구경할 때와는 전혀 다른 자연경관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도 들고, 창문을 타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마저도 제법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지만 묘한 벅차오름도 잠시뿐.

내내 비슷한 풍경만을 보고 있노라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심심해서 입이 근질거렸다.

누구한테 말이라도 걸고 싶은데, 그러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아르반을 제외하면 다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데다, 그들 사이에서도 출발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고 싶다. 심심해 죽겠네….’

하지만 나는 이 엄숙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철면피가 되지는 못했다.

그저 점심때가 되길 손꼽아 기다리면서 창문을 힐끗 내다보았다.

유일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아르반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마음을 달랬다.

‘아름다운 대자연보다 미남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더 즐겁구나.’

놀랍게도 질리질 않는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동행한 다른 기사들의 존재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열심히 창밖을 둘러보며 눈동자를 굴려보아도 위치상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보이는 이가 없었다. 실망이 컸다.

그리고 목 빠지게 기다리던 정오가 되어 잠시 쉬어 갈 때였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일행들과 통성명이라도 시도하기로 했다.

좋으나 싫으나 며칠 동안 함께 할 사이였다. 서로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지.

절대 내가 심심해서, 말이나 트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릇에 음식을 담고 있는 기사들을 돕기 위해 은근슬쩍 다가갔다.

“마차 안의 간이 테이블에서 드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괜찮아요! 저 땅에 앉아서도 잘 먹어서!”

기사들의 옆을 알짱거리는 내게 아르반이 권유해 왔지만, 그의 호의를 상큼하게 거절했다.

마차에서 침묵의 독방 생활을 영위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의 배려를 거절하는 건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너무 지루한걸…!

결국 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이 길바닥에 대충 천을 깔고 둘러앉았다.

나는 진한 갈색 머리카락의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넘겨준 접시를 받아들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제법 귀여운 인상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인사가 늦었네요. 카넬로웰 기사단의 릭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씩 웃으며 쾌활하게 말하는 릭스는 셋 중 가장 어려 보였다.

“반가워요, 릭스 경. 리엘리 로베르라고 해요.”

나와 릭스가 인사를 나누자 뒤이어 남색 머리에 에메랄드빛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 간단히 자신을 소개해 왔다.

“카넬로웰 기사단 소속, 세이린 아델입니다. 성심껏 호위하겠습니다, 공녀님.”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한 세이린이 곰같이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향해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 시선에 담긴 무언의 독촉 압박에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의 입이 열렸다.

“…카넬로웰 기사단의 부단장, 칼 폰레너입니다.”

목소리도 상당히 낮고 굵직했다. 칼의 무뚝뚝한 반응에도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리엘리 로베르예요. 다들 잘 부탁해요.”

“예, 공녀님.”

“…예.”

한 박자 늦는 칼의 대답에 세이린이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겼다.

그 옆에서 열심히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 넣던 릭스가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는 입을 열어왔다.

“부단장이 원래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편이세요. 자자, 공녀님도 어서 드셔 보세요. 첫날에만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야채가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인데, 진짜 맛있어요!”

릭스의 권유에 샌드위치를 들고 베어 물기 전, 아르반을 살펴봤다.

천상 귀족으로만 보이던 그가 스스럼없이 손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생김새로만 놓고 보면 일류 요리사가 만든 최고급 요리만 입에 댈 것 같은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기사들과 길바닥에 모여 앉아 샌드위치를 씹고 있다니, 의외네.

하지만 그 갭이 또 나쁘지 않았다.

아르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또 얼굴 한 번 보고, 다시 한 입 먹고.

맛있다. 전에 같이 식사할 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까 더 맛있다. 그러니까, 물론 음식이.

아르반은 내 열렬한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주저하는 듯하다 결국 입을 열어왔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네, 묻었네요. 잘생김. 이라고 되지도 않는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다.

이 사람들이 김이 뭔지나 알까?

아르반과 함께 있으면 여러모로 나 자신을 자제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안 묻었어요. 아주 멀끔하세요.”

“그럼 왜….”

이렇게 쳐다보냐고?

“잘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많이 드세요. 부족하시면 제 것 좀 나눠드릴까요?”

“…제 몫으로 충분합니다. 앞으로 체력을 소모할 일이 많을 테니, 공녀 몫의 식사는 전부 챙겨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네. 다 먹을게요.”

무심한 듯하지만 결국 날 위한 충고도 해주고. 약간 감동받을 뻔했다.

내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아르반을 위해 자꾸 그의 얼굴로 향하려는 눈동자를 억지로 돌렸다.

그가 다시금 내 시야에 잡히지 않게 눈앞의 기사들에게 더 집중했다.

장난기가 묻어나는 귀여운 얼굴의 릭스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먹고 있었다.

너무 맛있게 먹고 있어서 분명 나랑 같은 걸 먹고 있음에도 릭스의 입으로 들어가는 샌드위치가 더 맛있어 보였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먹방으로 대성했을지도.’

그만큼 복스럽게 잘 먹는다.

그 옆의 세이린 아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건 어찌 알았는지 바로 귀신같이 눈을 맞춰 온다.

그에 놀라 잠시 움찔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와, 예뻐.’

이쪽은 아르반과는 정반대 느낌의 미인이었다.

예상치 못한 미인의 웃음에 설레는 와중 세이린의 짧게 친 남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녹음을 머금은 듯 청아하기 그지없는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나는데….

일회성으로 휘발되어 사라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만큼, 그녀의 미소에는 성별을 떠나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예쁘고, 잘생겼다. 확실히 로판이 배경이라 그런지 미녀, 미남들이 많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로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 폰레너.

이쪽은 아무리 봐도 곰이라는 생각밖에 일지 않는다.

머리카락도 눈 색도 갈색이고, 2m는 가뿐히 넘길 듯한 큰 키와 덩치.

또 손은 어찌나 큰지, 꼭 솥뚜껑 같았다. 들고 있는 접시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니, 말 다 했지 뭐.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참… 개성이 뚜렷했다.

그게 외모가 되었든, 성격이 되었든.

그렇게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도우려는데 세이린과 릭스에 의해 저지당했다.

“공녀님께서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끼리도 충분한걸요.”

“맞아요, 공녀님! 마차에서 편하게 쉬고 계세요. 조금 있으면 출발할 거예요!”

“…어어! 그래도…!”

둘에 의해 뭐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마차에 고이 모셔졌다.

그렇게 나는 혼자 편하게 앉아 창문으로 기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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