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니나 다를까, 시녀장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혹시나가 역시나군.
그에 나는 확실하게 못을 박기 위해 구구절절 설명을 붙여야만 했다.
대공 측에 사람을 포함해 준비를 부탁드린 건 난데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면 내 체면을 깎아내리고 대공을 무시하는 처사로 보이니 모두 물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뒤로 조용한 것을 보면 공작도 어찌어찌 납득한 것 같다.
다행이다, 이번에도 시녀장이 되돌아왔다면 직접 공작을 보러 내려가야 할 판이었는데….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고 다시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다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대망의 당일.
몸은 힘들지만 눈이 호강하는 날이 밝아왔다.
나는 씻고 바지를 꿰입었다.
빙의하고 계속 치마만 입고 지내다가 바지를 입고 외출하려니 기분이 또 남달랐다.
그렇다고 치마에 불만이 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다.
내가 착용하는 실내용 원피스들은 비싸서 그런지 착용감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내게는 매우 다행으로 이곳에는 반드시 코르셋을 착용해야만 하는 문화가 없어서 드레스를 입고도 맛있고 즐거운 먹방이 가능했다.
비싼 옷, 비싼 음식 최고. 자본 최고.
옷을 다 갖춰 입고 빠진 물건은 없는지 체크해 보는데 에바가 다가와 아르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나는 그 말에 헐레벌떡 맞은 편 아몬의 방으로 노크하고 들어갔다.
안에서 들리는 대답과 동시에 벌컥 열어젖힌 문 때문에 놀랐는지 살짝 움찔거린 아몬이 내 복장을 보고는,
“가시는군요.”
라고 말하는데 그게 뭔가 너무 아련하게 들려서 나는 일부러 밝게 얘기했다.
“응, 말했다시피 며칠만 있다가 금방 올 거니까… 나 대신 집 잘 부탁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누나 보고 싶어도 좀만 참고. 올 때 선물도 꼭 사 올게. 알았지?”
티가 나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아몬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나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잘 지내고 있을게요.”
애가 너무 엄숙하게 말해서 솔직히 짠한 한편으로 좀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몬의 표정이 도저히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는 계속 씰룩이려는 입꼬리를 제어해야만 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아몬에게 인사를 건넸다.
“…흠흠, 그래. 그럼 누나 갔다 올게!”
“배웅해 드릴게요.”
“아냐! 괜찮으니까 그냥 있어.”
활기차게 말하며 아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저 작은 아이를 홀로 두고 간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다고 물릴 수도 없는 일.
나는 아몬에 대해 떠올리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욱 즐거운 생각만을 하고자 노력했다.
‘모처럼 바지도 입었는데 한 번 뛰어볼까?’
짐은 사용인들이 옮겨주니 몸만 가면 돼서 가뿐하겠다, 그대로 계단을 두세 칸씩 겅중겅중 뛰어서 내려갔다.
성격이 급해서 빙의 전에는 자주 이렇게 다녔었는데, 여기서는 보는 눈도 있고 팔랑거리는 치마를 입고는 걸리적거려서 하지 못했던지라 속이 다 시원했다.
오랜만에 뛰다 보니 정말 신이 났다.
그리고 보면 리엘리도 딱히 운동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기본적인 체력이나 근육량이 이전의 나보다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아니면 이 정도가 평균인데, 한국에서의 내가 너무 저질 체력을 가졌던 건가?
뛰어 내려오니 1층도 금방이었다. 열심히 발을 놀리다 문 앞에 대기 중인 시녀장이 보여 말을 붙였다.
“시녀장, 아버지는 안 나오셨어?”
아무리 나와 마찰이 있었어도 대공과 함께 떠나는 날에 얼굴도 안 비칠 인간이 아닌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영 이상했다.
“각하께서는 황성에서 보낸 급한 전보를 받고 일찍 출타하셨습니다.”
“아아, 어쩐지….”
납득 가는 이유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잊고 있던 문제에 대해 떠올렸다.
“참,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차에 발 받침대 좀 달아놔 줘. 높이는 높은데 밟고 올라갈 게 없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야.”
성인 여자인 내가 혼자 오르기 불편함을 체감할 정도였으니 어린 아몬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단 하루뿐인 외출이었음에도 타고 내릴 때마다 도움을 받으니 뭐랄까….
버스를 탈 때마다 계단이 없어서 사람의 손을 잡고 올라타야 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일이 익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정말 번거롭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내 명령에 시녀장은 왠지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가씨… 요즘은 마차에 발 받침대를 다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라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게 뭐 대단한 일도 아니고 한낱 발 받침대에 불과하다면 더욱이.
“한때 유행을 했었지만 이제는…. 정 불편하시다면 아가씨의 데뷔탕트 전까지라도 휴대할 수 있는 발 받침대를 구비해 두고 쓰시다가 후에 다는 것은 어떨지요.”
“그것도 매번 수고스럽잖아. 괜찮으니까 그냥 좀 달아줘. 어차피 유행이란 결국 돌고 도는 거기도 하고. 누가 내 마차에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겠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다가 이렇게 시간 끌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서둘러야겠는데?
“아무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부탁 좀 할게.”
“…알겠습니다, 아가씨.”
말을 마치고 마차가 대기하고 있을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역시 바지를 입으니까 이렇게 보폭도 크고, 세상 당당하게 걸어도 다리에 천이 엉겨 붙지 않는구나.
사소한 감동에 전율하는데 아르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봤던 화려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마차가 아니었다.
고급스럽지만 단출한 형태의 마차.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남자.
그의 뒤에서 대기 중인 기사들과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미모가 또다시 내 시야를 온통 잡아먹어 버렸다. 얼마나 자주 봐야 익숙해질는지 모르겠다.
그는 전에 봤을 때와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으로, 옷 자체만 놓고 보면 특별한 것 없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걸 걸치고 있는 이가 저 남자, 아르반 카넬로웰이다.
적당히 달라붙는 핏이 탄탄한 몸의 라인을 드러내 주어 보는 이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옷 한번 잘 골라 입혔다.’
속으로는 환호를 보내면서도 겉으로는 점잖은 척,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평안하셨습니까, 공녀.”
“예, 저야 평안했지요. 그런데 혹시 제가 기다리시게 했나요?”
내가 이런 미남을 길바닥에 서서 기다리게 했니?
“막 도착한 참입니다. 공녀께서는 … 승마복을 입고 오셨군요.”
아르반은 내 복장을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좀 의외였나 보다. 나름 열심히 고민해서 골라 입은 옷인데.
아니면 설마 여기 영애들은 산에 갈 때도 원피스나 드레스를 입고 가기라도 하는 거니?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났지만 이미 입고 왔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뻔뻔하게 나가면 이상한 것도 그럴듯해 보이는 법이다.
“아무래도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니, 드레스를 입고 가기에는 불편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그가 마차에 실리고 있는 짐가방을 바라보며 내게 물어왔다.
“짐은 저게 전부입니까?”
“네, 제가 필요한 물건만 간단히 챙겼어요.”
“잘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가볍게 긍정하자 손을 내밀어 오기에, 그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아르반의 손 위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있으니,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오르시죠.”
“아.”
마차에 올라가라고 내민 거였군. 그냥 눈앞에 불쑥 손을 내미니까, 나도 모르게….
괜히 혼자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빨리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붙잡은 손에 힘을 줘 몸을 지탱하며 마차에 올랐다.
어쩌다 보니 헤어질 때마다 손을 잡기는 했었지만 제대로 힘주어 잡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손 엄청 단단하고 따뜻하다.’
맞잡으면 그의 손에 내 손이 모두 감싸질 만큼 커 보였다. 신장만큼이나 손도 크구나.
그와 닿았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뒤를 따라 아르반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문을 닫은 후, 나지막하지만 빠르게 입을 열었다.
“공녀, 바로 출발해야 하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갈 길이 머니 후에 시간이 나면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죠.”
“어차피 같이 가는데, 그냥 가면서 얘기하면 되지 않나요?”
“저는 말을 타고 갈 겁니다.”
“네? 아니, 왜요?”
“장시간 여행길에 공녀와 함께 마차를 탈 수는 없습니다.”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싶었다. 겨우 마차일 뿐인데 같이 타면 뭐가 어때서.
“뭐 어때요.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같이 타고 가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럼.”
그는 내가 더 붙잡을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빠져나가 버렸다.
‘진짜 괜찮은데…. 같이 타고 가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데, 마차 문이 닫히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살폈다.
그러자 문 앞에 무슨 문지기처럼 미동 없이 버티고 선 아르반의 모습이 보였다.
출발한다 해놓고 마차 문도 열어둔 채로 서 있기만 하는 그의 행동이 이상해서 물었다.
“각하, 왜 그러세요?”
그러자 아르반은 뒤쪽에 대기 중인 시녀들을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전속 시녀로는 어떤 이가 동행하는 겁니까. 주인을 이리도 기다리게 만들다니.”
그의 낮은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이 콜라보를 이루어 살벌한데 잘생겼고, 무서운데 눈길이 갔다.
이 정도면 중증이지 싶었다.
‘내가 이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약했던가.’
아니면 아르반의 얼굴이 완벽히 내 취향에 부합하기 때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