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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21화 (21/153)

21화.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설명에 집중하느라 그 의문은 잠시 잊혔다.

“그러시면 시안을 몇 가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미 디자인은 나와 있는데 아직 작업에 들어가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요.”

그는 내게 얘기함과 동시에 어디선가 도안을 꺼내 슥, 내밀었다.

그 묘한 눈빛에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눈앞에 들이 밀어진 도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총 4가지의 디자인이 있었다.

그중 가장 보석이 돋보일 수 있을 만한 디자인이 눈에 띄었기에 지체 없이 그것으로 주문했다.

그러다 문득 내게 애인이나 약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지 오래였다.

‘뭐… 어차피 다시 찾을 생각은 없으니까 상관없나.’

이전의 리엘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가 보석상 주인을 피할 이유는 충분했다.

더불어 혼자 이상한 오해까지 해버린 듯하니, 이 기회에 거래하는 보석상을 바꾸는 것도 좋을 듯했다.

짧으면 이주, 길면 삼 주 후에 완성품을 저택으로 보내주겠다는 밀러의 말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오늘의 기나긴 쇼핑을 마무리하고 마차에 몸을 실었다.

빙의하고 처음 하는 외출이 꽤 피곤해서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집에 가면 고단함에 또다시 잊어버릴지 모를 노릇이었기에, 나는 곧장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몬에게 입을 열었다.

“아몬, 내가 한 열흘 정도 일이 있어서 저택을 비울 거야.”

“열… 흘이요?”

“응, 열흘. 내일모레 출발할 거야. 나 없는 동안에도 식사 잘 챙겨 먹고. 또 무리하게 운동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말을 꺼내니 아몬은 내 갑작스러운 외박 소식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손끝이 아몬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듯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아몬은 이내 제 양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잘 다듬어진 목소리로 내게 답해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걸요. 누나가 안심하고 다녀오실 수 있게, 잘 처신하고 있을게요.”

아몬의 의젓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금 네가 한 말이 아홉 살 어린이 입에서 나올 단어 조합은 아닌 것 같다, 얘야. 제 한 몸 건사한다느니, 처신하겠다느니….

그래도 처음 마주했을 때에 비하면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다 싶어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왕이면 그 나이대 아이처럼 편하게 반말을 듣고 싶지만, 뭐든지 성급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언젠가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미안해, 갑자기 저택을 비우게 돼서. 진짜 딱, 열흘만 있다가 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올 때 선물도 사 올게.”

아몬과 말을 트고 친해진 것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집을 비우게 되어 정말이지, 너무 미안했다.

내가 없더라도 이제는 사용인들이 알아서 잘 챙겨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몬의 보호자는 나 하나뿐인지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으니….

“저는 괜찮아요. 어디를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번만, 정말 이번만 다녀오고 다음부터는 네 옆에 꼭 붙어 있을게, 동생아.

괜찮다고 말해주는 아몬의 앞에서 나는 혼자 양심이 찔려 속으로 변명을 줄줄 읊어댔다.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양심이 너무 아팠다.

“그냥 광산 시찰 때문에… 이번만 다녀오면 이렇게 오래 집 비우는 일 없을 거야.”

내 변명에 아몬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풀어지며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돌았다.

그렇게 공작저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식사 때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도 아몬도 처음 해보는 외출에 피곤하고 입맛이 없어 둘이 간단하게 허기만 달래고는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전생에는 이렇게 잠이 많지 않았는데…. 빙의한 뒤로 부쩍 잠이 늘어났다. 대낮에 눈을 붙이는 일도 허다해졌고.

뭐, 이건 그냥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기절하듯 잠이 든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리엘리의 기억을 생생한 4D로 체험하고 있었다.

배경은 작년 이맘때.

어쩐 일인지 이번 꿈에는 로베르 공작이 등장했다.

공작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리엘리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작은 밝은 얼굴로 리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게 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해 보였다.

“리리, 이번 달에는 예산이 많이 남았던데…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니? 옷만 몇 벌 사고, 액세서리는 구매한 내역이 없더구나. 제국 내에 우리 리리 마음에 차는 물건이 없으면 아빠가 다른 나라의 상단을 불러줄까?”

그는 리엘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구해다 줄 기세였다.

그러나 리엘리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답했다.

“아뇨, 아직 구매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내일 사람을 불러 구매할 예정이었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세요.”

내게는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이 다분히 느껴졌지만, 뱉어지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그래도 요즘 너무 산 게 없던데… 아빠가 신경이 쓰여서 드레스 몇 벌이랑 함께 어울릴 만한 것들로 좀 준비해 봤단다.”

공작이 손을 들어 올리자 하인들이 여러 개의 커다란 상자를 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식사 중이니 네 방에 가져다 두라고 이르마. 올라가서 풀어보렴. 리리,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네, 감사해요.”

건조하기 그지없는 형식적인 인사치레에도 공작은 그저 웃기만 했다.

리엘리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그녀가 식당에 들어서고부터 먹은 음식은 채 다섯 입을 넘기지 못했다.

더부룩한 느낌이 나는 게 아무래도 체한 것 같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기억인지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몸도 마음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리리, 맛이 없니? 아까부터 잘 먹지를 못하는구나. 흠…. 주방장을 바꿔야 하나.”

아주 작게 자른 계란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기만 하는 리엘리의 모습에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에 리엘리는 입안에서 거의 분해되다시피 한 계란을 억지로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다만 낮에 과식을 해서 그런지 소화가 잘되질 않네요.”

“이런… 많이 안 좋니? 주치의를 불러주마.”

공작이 시종을 부르려 하자 리엘리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냥 소화제를 먹고 좀 쉬고 싶어요. 에이미에게 약 심부름을 보내면 되니 이만 먼저 일어나 볼게요.”

“그래, 알겠다. 들어가 쉬렴.”

리엘리는 공작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리엘리는 잘 보이는 곳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보고는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는 시녀들도 부르지 않고 혼자 묵묵히 상자들을 드레스 룸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옷가지였기에 무게가 나가지는 않았지만 부피가 상당해서 혼자 옮기기 불편함에도 리엘리는 끝까지 홀로 몸을 움직였다.

드레스 룸의 가장 구석진, 잘 보이지 않는 공간에 상자들을 전부 쑤셔 넣고 나서야 리엘리는 에이미를 불렀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차분한 노크 소리와 함께 에이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엘리는 그런 에이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명했다.

“상단에 연락해서 옷을 주문하겠다고 해. 내일 방문하라고. 보석도 항상 주문하던 금액에 맞춰서 발주해줘. 이번에는 목걸이로 가지고 오라 전달하고.”

에이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짧게 대답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자 리엘리는 침대에 누워 바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

과거의 리엘리는 공작을 상당히 꺼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감 능력이 제로에 가까울 만큼 없어 보이는 공작이 자꾸 돈을 안 쓴다고 부담을 주었으니,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 듯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리엘리가 공작의 쓸데없는 관심을 피하고자 돈을 의무적으로 소비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타이밍이 맞아서 리엘리가 왜 그런 식으로 돈을 썼는지는 알게 됐네.’

그녀가 어째서 공작에게 저리 반응을 하는 건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것까진 이 기억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나는 잠기운을 떨쳐내고자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내일부터 산맥을 올라야 하니, 오늘은 체력비축을 위해 짐만 싸고 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나는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어른이었기에 놀랍도록 정직하게 밥만 먹고 쉬기만 했다.

집에만 있으면 시간이 안 간다고 누가 그러던가!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집이 최고였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며 뒹굴뒹굴 굴러다니는데, 에바와 세바니가 내 드레스 룸을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했다.

시킨 일도 없는데 뭐 저리 바쁘게 움직이나 싶어 말을 걸었다.

“내가 뭐 시킨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 바빠?”

“앗, 아가씨! 가주님께서 아가씨의 여행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하셔서요.”

“네, 가주님께서 부족함 없이 완벽히 준비하라고 명하셨어요.”

“허…?”

내 여행 가방은 어제 내가 미리 챙겨뒀다.

왜 남의 짐을 그쪽이 챙기라고 명령하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어 즉각 시녀장을 불러 캐물었다. 그리고 듣게 된 이야기가 가관이라 헛웃음이 나오더라.

내일부터 예정된 내 마정석 광산 시찰을 위해 여행용 마차 두 대와 에바와 세바니, 하녀 셋, 호위 기사 열댓 명 등이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그야말로 질겁했다.

나는 정색하고 시녀장에게 말했다.

“대공 측에서 모두 준비하기로 했으니 필요치 않다고, 아버지께 그리 전해.”

“예.”

그러나 공작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온 시녀장의 표정을 보고 짜증이 치밀었다.

‘보아하니 그래도 딸려 보내라고 했나 보네.’

하여튼 뭐 하나 뜻대로 착착 진행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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