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가게의 쇼윈도 정 중앙에 진열된 원석은 확실히 임팩트가 있었다.
상상보다 훨씬 크기도 했고.
커봐야 손톱보다 조금 더 큰 정도를 예상했는데, 무슨 원석이 내 손가락만 했다.
가게로 들어서며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데, 안쪽에서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평범한 갈색 머리의 아저씨는 뭐가 그리 반가운지 빠른 걸음으로 내 앞에 서더니 아는 체를 해왔다.
“로베르 공녀님 아니십니까! 옆에 계신 작은 신사분은 공자님이신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 보석상을 운영하는 밀러 리닉스 남작입니다.”
“…반갑습니다, 아몬 로베르입니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렇게 저희 가게에 찾아와 주시고, 정말이지 영광입니다.”
“…….”
“항상 저택으로 물건만 받아보시더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 것 같습니다. 공녀님께서 직접 방문해 주시는 날도 다 있고요. 하하.”
“…네, 뭐. 기분 전환 삼아, 외출한 김에 들러봤어요.”
내 떨떠름한 태도에도 밀러는 연신 벙글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기분 전환 좋죠! 늘 저희 보석상을 애용해 주시는 귀중한 고객님께서 방문해 주셨는데,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에 있는 액세서리의 출처가 여기였나.
리엘리가 그동안 집 안에서만 생활해왔기 때문에 설마 아는 척을 해오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상대방은 날 알고 있는데, 내가 초면인 것처럼 반응하면 대형 사고였으니까.
“오늘은 어떤 액세서리가 필요하신가요?”
“딱히 필요한 건 없고, 그냥 둘러보려고요.”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단춧구멍보다 작던 밀러의 눈이 보통 사람만큼 확장되었다.
뭐야, 뭐에 저렇게 놀란 거지. 내가 딱히 못 할 말 한 건 아니잖아?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이것 참 실례했습니다. 평소와 같이 주문하실 거라 생각해 조금 놀랐습니다.”
“…제가 평소에 주문하던 게 왜요. 뭐가 이상한가요?”
내가 넌지시 질문하자 밀러는 별다른 기색 없이 답해왔다.
“그게, 이상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만 늘 한 번 구매하실 때면 항상 같은 종류의 액세서리로 통일해서 금액에 맞춰 사 가셨던지라….”
밀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한 듯 웃었다.
“지난달에는 브로치, 그 전달에는 목걸이를 주문하셨으니, 이번 달에는 팔찌나 귀걸이를 구매하시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예상했습니다. 직접 살펴보신다고 말씀하신 건 처음이신지라,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그게 뭐야. 여태 물건도 보지 않고, 금액에 맞춰서 그냥 샀다는 거잖아.’
그럼 그 많은 액세서리가 하나 같이 사용감 없고, 새것 같아 보이던 게 관리를 잘해서가 아니었어? 사두고 보관만 해서 그렇게 손때 탄 물건이 없었던 건가?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소비 패턴이었다.
물론 리엘리에게 단순히 액세서리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직접 물건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겠지. 이런 식으로 금액에 맞춰서 한 종류의 액세서리를 무작위로 구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뭐랄까….
‘그냥 돈을 쓰기 위해, 혹은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 의무적으로 행한 것 같잖아.’
꺼림칙하다. 여태까지 구매한 리스트가 있다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혹시 제가 전에 사 갔던 물건들, 리스트가 남아 있다면 좀 볼 수 있을까요?”
“예,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밀러는 몸을 숙여 아래쪽을 뒤적이더니 작은 수첩을 하나 꺼내주었다.
수첩에는 ‘리엘리 로베르 공녀’라고 이름까지 기재가 되어 있었다.
“공녀님께서 워낙 저희 가게에서 주문하시는 물건이 많으신지라, 장부도 따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 갔길래….
속으로 혀를 차며 따로 표시된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그곳엔 가장 최근에 구매해갔던 물품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일전에 에바와 세바니에게 선물해 주었던 토파즈와 루비 브로치에 대해 적혀 있는 것도 한눈에 들어왔다.
앞쪽으로 넘겨보니 정말 한 달 정도의 주기로 일정 금액만큼 구매해 갔다.
하지만 장부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렇게 구매해간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건 귀족 영애의 쇼핑이라기보다는, 어디에 납품하기 위해 일정한 금액을 주기적으로 거래했다 말하는 편이 더 납득이 갈 듯했다.
찜찜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수첩을 돌려주고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고민해 봐야 내 머리만 아프다.
나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밀러에게 아몬이 사용할 만한 커프스 버튼과 회중시계, 브로치를 보여달라 요청했다.
“아몬, 네가 사용할 물건을 좀 보려는데 뭐가 마음에 들어?”
“저는 아무거나 괜찮은데, 누나가 골라주신다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아몬이 웃으며 말하는데, 얼굴이 약간 창백해진 것이 보였다.
피곤한가? 첫 외출인데 너무 여기저기 돌아다녔나 보다.
워낙 조용한 아이라 잘 느끼지 못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가게에 들어서면 유독 더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로즈니의 살롱에서나, 레스토랑, 그리고 여기서도.
더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는 일절 소통이 없었다. 아까 밀러와도 통성명을 한 것이 대화의 전부였고.
아직 어리니까 그냥 낯을 가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첫 외출인데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만 둘러보고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그래도 아몬이 내게 골라 달라고 했으니, 이왕이면 예쁘고 좋은 것으로 사서 돌아가야지.’
눈앞에 있는 물건들을 신중히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개씩 골라 집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게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아까 아몬과 함께 보고 들어왔던 원석의 존재를 떠올렸다.
“저기, 그런데 쇼윈도에 전시된 원석은 뭐길래 저렇게 두신 거예요?”
“원석이요? 아, 저희 가게에는 입고되는 물건 중에서도 높은 가격이 책정된 원석은 디자인이 정해질 동안 전시해 두는 편입니다. 저렇게 전시해 두면 원하시는 분께서 말씀을 주시기도 하시거든요.”
“안 그래도 색이 예뻐서 눈이 가던데, 어떤 장신구로 세공될 예정인가요?”
“흠, 글쎄요. 아직 정해둔 바가 없습니다. 올해 들어온 보석 중에서도 돋보이는 상등품인지라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죠. 마음에 드시면 자세히 보여드리겠습니다.”
밀러는 의외로 날래게 움직여 원석을 가져왔다.
검은 벨벳 쿠션 위에 올려져 있는 원석은 가까이서 보니 아르반의 눈동자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밀러는 내가 따로 묻지 않았음에도 원석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블루 사파이어입니다. 품질도 최상급이고, 색상도 귀한 편이죠. 구매하시면 원하시는 어떤 형태로든 제작이 가능합니다.”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한눈에 아르반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옆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몬에게 원석을 보여주며 물었다.
“아몬, 어때? 우리 이거 때문에 여기 온 거였잖아. 아무거로나 세공할 수 있다고 하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이미 제 것은 많이 골라주셨는데, 아직 누나의 액세서리는 고르지 못하셨잖아요. 저는 괜찮으니 누나가 사용하실 물건을 고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세상에…! 여태 계속 내 물건만 샀는데도 날 챙기는 아몬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도…. 이게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야? 원하는 건 다 사줄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아뇨, 정말 괜찮은걸요.”
아몬의 괜찮다는 대답에 빈말인지의 여부를 가늠해 보는데 밀러가 슬쩍 내게 말을 걸었다.
“공녀님, 제 생각에 그 보석은 공자님께서 사용하시기에는 크기가 부담스러울 듯합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공녀님께서 사용하심이 어떠실는지요?”
“하지만….”
“맞아요. 누나가 이미 다른 좋은 물건들을 골라주셨으니,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밀러의 제안에 아몬이 거들어오기까지 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다시 보니 확실히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르반에게 선물해 주면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아까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몬이 마음에 들어 한다 확신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아이가 고개를 저었음에도 선뜻 구매하기가 뭐 했다.
내겐 그에게 이런 보석을 선물해 줄 만한 명분이 없었으니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주면 많이 부담스러우려나….’
그래도 일단 사서 가지고 있다가 생일이나 뭐 선물해 줄 만한 이유가 생기면 그때 줘도 되지 않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걸 살지, 말지에 대해 혼자 심각하게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귀족끼리 선물로 이 정도는 해줘야지.’
원래 인생은 타이밍이다.
마음에 드는 건 기회 있을 때 낚아채야 했다.
비록 아르반의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몬, 그럼 혹시 내가 이걸 다른 사람한테 선물해도 괜찮겠니?”
“누나가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아몬은 정말 원석에 관심이 없는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그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내가 밀러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고른 것들이랑 이 보석까지 구매하면 얼마 정도 나올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디 보자… 세공비 제외하고 원석 가격만 치면 항상 구매해 가시던 가격과 얼추 맞네요. 거기에 다른 것들까지 합하면….”
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원석을 내려다봤다.
늘 구매해 가던 가격이라면 아마 적어도 몇 세트 이상의 액세서리였을 터인데, 이 원석 하나의 가격이 그것들과 맞먹는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놀라 잠시 원석을 바라보고 있자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밀러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블루 사파이어는 세공이 완성돼 보내드릴 때 결제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대금은 상관없으니 일시불로 지불할게요.”
내 말에 밀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질문했다.
“그럼 제작을 원하시는 액세서리나, 디자인이 따로 있으신가요? 보통 이 정도 크기면 머리 장식, 특히나 티아라의 메인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브로치로도요.”
“남성분께 선물하려고 하는데요.”
“남성분이시라… 혹시 검을 다루시는 분이라면 검집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럴 경우에는 사용하시는 검을 가져오셔야 제작이 가능하죠.”
마침 성검도 찾으러 가야 하니 검집이 끌리긴 하는데… 아직 그놈의 검을 찾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들고 방문하려면 아르반이랑 같이 와야 할 텐데, 그럼 내가 그 남자한테 선물을 준비했다는 게 다 들통나잖는가!
“검을 사용하긴 하는데, 같이 오기 힘들어서 안 될 것 같네요. 브로치로 할게요.”
“호오… 공녀님께서 남성분께 브로치를 선물하신다니, 특별한 분인가 보군요. 음음, 하긴. 공녀님께서도 이제 애인이나 약혼자가 있으실 나이시니… 유행에 민감하실 만도 하죠.”
내 입에서 브로치, 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무섭게 밀러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나는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다.
‘내가 애인한테 선물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는지 조금 의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