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돌연 번뜩이는 그녀의 눈빛에 당황한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음에도 로즈니는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승마복은 샘플이 좀 있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승마복을 참 좋아해요.”
“…….”
“공녀님, 그거 아시나요?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노라스라는 작은 왕국에서는 여성분들도 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그곳의 의상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옷들이 있답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로즈니가 아까보다 격하게 손을 파닥였다.
그에 직원들은 드레스가 걸려 있는 행거를 물리고 이번에는 승마복으로 추정되는 옷들이 한가득 걸려있는 행거를 끌고 들어왔다.
행거를… 아니, 승마복을 바라보는 로즈니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성분들을 위한 바지로 된 정장도 취미 삼아 만들어 보았는데 한 번 봐보시겠어요?”
“아, 네, 네….”
드레스를 가져올 때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옷을 고르는 로즈니는 활기가 넘쳤다.
사실 내가 콕 집어서 승마복을 구매하려는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저 성검을 찾으려면 산맥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등산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지라, 활동성 좋은 옷이 급하게 필요했다.
문제는 이곳에 등산복이나 등산화가 있을 턱이 없었고, 대부분의 귀족 여자들은 치마를 입고 다닌다.
하지만 난 죽어도 치마 입고 산을 오르는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바로 승마복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언제부터 승마를 즐기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왠지 모를 기대로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을 슬쩍 회피했다.
저런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거짓말을 하려니 너무 양심에 찔렸다.
“승마를 즐기는 건 아니지만… 한번 배워볼까 해서요.”
승마를 배울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곧이곧대로 ‘대공 각하랑 같이 산타기로 했는데 그때 입으려고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내 변명에 불과한 말에 로즈니는 눈을 번뜩이며 속사포처럼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정말 멋진 생각이세요! 저는 승마를 자주 즐기는데, 아주 즐거운 운동이랍니다. 무엇보다 승마복은 참 멋진 옷이에요. 같은 바지라도 남성분이 입었을 때와 여성분이 입었을 때의 느낌이 매우 다르죠.”
로즈니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줄줄 말을 이어갔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드레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하답니다. 샘플들은 제 사이즈를 기준으로 제작했는데, 마침 공녀님께서 저와 체형이 비슷하시니 조금만 손을 보면 바로 착용이 가능하실 것 같아요.”
아무래도 로즈니는 승마복 마니아인 것 같다.
입으로는 설명을 하면서 손은 빠르게 행거를 뒤적여 벌써 몇 벌의 옷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진정해요, 언니… 눈에 불붙은 거 같아.
“그….”
“승마를 즐기시는 영애가 많이 없어서 항상 서글펐답니다. 아, 로베르 공녀님께는 이 색상이 잘 받으실 것 같네요! 어서 입어보세요.”
“…음, 네.”
어쩐지 벌써 피곤한 기분이다.
***
로즈니는 말이 많고 활달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주변에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없어서 기가 좀 빨렸지만, 그래도 성격이 좋아 호감이 갔다.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보며 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그로 인해 알게 된 정보도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일반적으로 귀족가에서 살롱을 방문할 때 예약은 필수라고 한다.
이번 같은 경우는 앞에 예약한 손님이 펑크를 냈기 때문에 타이밍이 좋았다고.
예약 없이 방문하면 맞춤은 불가능하고 기존에 제작되어 있는 제품의 구매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다 승마복에 함께 신을 부츠는 있냐는 로즈니의 물음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옷부터 고르고 나중에 적당히 눈에 띄는 가게에서 구매하려고 했는데, 예약 없이 살 수 있을지 여부가 문제였다.
그런 내 고민을 알아챘는지, 로즈니가 한 가게를 소개해 주었다.
최고급 가죽 신발만을 취급하는 가게로, 이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발 전문 매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약 없이 방문해도 괜찮을 만큼 기성 제품도 많이 취급한다고.
내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하마터면 구두 신고 등산할 뻔했네.’
내친김에 넌지시 근처에 식사할 만한 곳이 없냐는 질문을 했을 때도 괜찮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줄 테니 점심에 꼭 가보라는 친절까지 보여주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은 마치… 시골에서 도시로 막 상경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보는 듯해, 괜스레 찔린 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 제가 여기서 산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거기다 옷은 또 얼마나 많이 샀는지 모르겠다.
돈 아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막상 입어보니 옷이 너무 편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게 말이 승마복이지, 바지가 꼭 스키니 팬츠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축성이 뛰어나 몸에 착 감기고 감촉은 매끄러웠다.
상의는 길이가 짧은 정장 비스름한 모양임에도 팔을 움직이는 데 불편한 감이 전혀 없어서 나는 괜히 팔을 몇 번 돌려보았다.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확 다르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절도 있고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잠시 나 자신의 멋짐에 취해있는데, 옆에서 뭘 입어도 아름답다 찬사를 보내는 아몬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옷을 더 긁어오는 로즈니 때문에 얼떨결에 충동구매를 해버렸다.
이때 처음 알았다. 내가 이렇게 귀가 얇은 사람이었다는걸….
당장 입을 몇 벌만 챙기고 나머지는 수선해서 보내겠다는 로즈니의 말에 정신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로즈니의 살롱을 나설 때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딜 또 들리자니 시간이 애매해서 차라리 천천히 걸어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쪽을 택했다.
거리 구경도 해보고 싶었고, 정신적 휴식도 필요했기 때문에….
가는 길에 카페가 있어서 들어가 함께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단 게 입에 들어가니 기운이 좀 나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내 옷만 열심히 봤던 게 신경 쓰여서 얌전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몬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몬, 혹시 돌아다니면서 뭐 갖고 싶었던 거나… 필요해 보이는 물건은 없었어?”
“필요한 물건은 이미 모두 구매해 주셔서 넘치게 많은걸요.”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필요한 것만 갖고 살아. 필요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들거나 갖고 싶은 게 보이면 꼭 누나한테 말해줘.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예쁜 쓰레… 아니, 장식품이어도 괜찮으니까. 알겠지?”
나만 봐도 그렇다. 방금 실시간으로 필요 이상의 옷을 충동구매 해 버렸으니까.
원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거란다, 동생아.
“그럴게요.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꼭 말씀드릴게요.”
내 말에 대답하며 작은 입술이 방실, 호선을 그렸다.
그 웃는 얼굴의 통통한 뺨을 찔러보고 싶어 손가락이 움찔거렸지만, 누나로서의 체면을 생각해 참았다.
이렇게 예쁘고 순하디순한 아이가 원작의 미래에서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로 변모한다니….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속상한 마음에 가슴께가 저릿해졌다.
그래도 이 포근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 입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넣는 아몬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아이스크림은 좀 추울 때 먹어야 안 녹고 맛있어. 춥지는 않아?”
“네, 추위를 타지는 않아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니 로즈니가 예약해준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문한 레스토랑은 과연, 훌륭했다. 그녀가 자신 있게 추천해 줄 만큼 맛있고 서비스도 만족스러웠다.
식사 후에는 신발 가게에 들렀는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신발 가게에는 천만다행으로 로즈니 만큼 영업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었기에 무난하게 마음에 드는 부츠를 구매해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음, 우리 이제 어디 가볼까? 아무 곳이나 괜찮으니까 들르고 싶은 곳 없니? 그냥 눈에 띄었던 곳이라도 상관없는데.”
이렇게 돌아가기에는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쇼핑에 애꿎은 애를 끌고 다닌 격이 되니….
내 질문에 아몬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레이디 로즈니의 살롱 근처에서 보석을 취급하는 가게를 보았는데, 그곳에 전시되어 있던 보석이 좀 눈에 띄었어요.”
“보석? 어떤 보석이었데?”
“진한 푸른빛의, 아직 세공되지 않은 원석이었는데… 투박하지만 색이 아름답고 제법 커서 눈길이 갔어요.”
“그럼 그 가게 구경하러 갈까? 생각해 보니까 전에 필요한 것만 급하게 사느라 액세서리는 많이 못 샀는데, 가서 봐보자.”
아몬은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한 날씨였지만 가게까지 가는 길은 따뜻한 햇볕이 들어 매우 포근했다.
더불어, 뒤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는 기사들과 에드가의 존재가 걱정한 만큼 불편하지는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보니 종종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뭐, 저들은 사용인이니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저렇게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미덕임을 안다.
그거야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아몬도 그들과 비슷하게 반응한다는 데에 있었다.
아몬은 내가 말을 걸면 항상 대답은 잘해온다.
하지만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거의 뭐, 가물에 콩 나듯 했다.
그 때문에 아몬과 내 대화는 항상 내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아몬이 그것에 대해 긍정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네 의견을 말해 달라 덧붙이지 않는 이상 뭐가 됐든 내 말을 수긍하고 따르려 해서, 이걸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차차 더 깊게 고민해볼 일이었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몬을 알게 된 이후,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붙어 있는 현재.
“…….”
대화 소재 고갈로 인한 침묵이 불편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억지로 쥐어 짜내려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저 가게에 빨리 도착하길, 속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리고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그 보석 가게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거구나…!”
두런두런 이어가던 대화마저 끊기고, 침묵에 질식할 것 같을 때 도착하였기 때문일까.
나는 내 눈앞에 원석이 있다는 사실이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