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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8화 (18/153)

18화.

그는 제국의 귀족이라면 응당 알고 있어야 할 예법을 모르고 있는 나를 의아하게 보지 않았다.

아마 리엘리가 누군가와 함께 외출한 적이 없음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그렇기에 나는 주저 없이 현실적인 부분을 꼬집었다.

“아니, 그럼 어린 영식들은 어떻게 해요?”

“그건….”

의문은 삽시간에 해결됐다.

아까 기사 옆에 함께 대기하고 있던 아몬의 시종, 에드가가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장갑 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밟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였다.

…아니, 사람 손을 밟고 올라가는 거야? 애 하나 마차에 올려주겠다고? 굳이…?

그런데 저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듯했다.

심지어 아몬도 그 손을 밟고 올라오려는 모양인지, 태연하게 발을 올릴 것처럼 보였다.

그에 나는 황급히 둘의 행동을 제지했다.

“잠깐, 에드가! 그럴 필요 없어.”

매번 마차에 타고 내릴 때마다 남의 손을 밟아야 한다면 버려질 장갑이 대체 몇 개란 말인가.

물론 시종의 장갑 몇 개 버린다고 공작가의 재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쓸데없는 낭비를, 그것도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하냐, 이 말이다.

전처럼 집에서만 생활할 것도 아니고, 이제 아이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연히 마차를 이용할 일도 많아질 터였다.

그런데 자가용이나 마찬가지인 마차를 탈 때마다 이러는 건 정말 불편하고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냥 마차에 발 받침대를 달라고 해야지, 이게 뭐야 진짜….’

나는 속으로 불만스레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친절하게 말했다.

“내 손 잡고 올라오면 되니까, 물러나 있어.”

말을 꺼냄과 동시에 아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몬이 내 손과 마차를 번갈아 보며 갈등하는 것이 보였다.

“벌써 다 컸다고 누나 손은 안 잡아 주는 거니? 마음이 아프네….”

되지도 않는 연기 실력으로 서러운 시늉을 하는데, 이게 또 먹혔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제가 무거우니 누나가 힘드실까 염려되어서….”

잔뜩 당황한 아몬이 아니라며 식은땀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황급히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아 왔다.

손아귀에 들어온 작은 손을 꼭 쥐고 힘껏 끌어당겼다.

그러자 예상보다 가벼운 아몬의 몸이 훅, 하고 순식간에 딸려 올라왔다.

“무겁기는. 엄청 가벼운데?”

내가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하니 아몬이 약간 뚱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성장기이니 금방 자라 무거워질 거예요.”

“그래, 그래. 금방 쑥쑥 클 거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에드가가 조심스레 아몬의 옆에 올라타며 마차 문을 닫았다.

“출발해도 될까요, 아가씨?”

“그래.”

그는 내 대답에 마차 문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게 신호였는지 마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돈을 들이부은 듯한 디자인이라도 그래 봐야 마차라는 생각에 승차감은 기대 안 했는데, 지하철 보다 흔들림이 적어서 조금 놀랐다.

‘마차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마법이라도 걸려있나? 아니면 그냥 비싼 값을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현재 거주하는 곳이 수도의 내로라 하는 권세가들의 가택이 몰려 있는 구역인지라 잘 정비된 도로와 조경이 일품이었다.

함께 있으면 항상 내게만 집중하던 아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창문 밖의 세상에 온 신경을 다 빼앗겨 버린 듯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저택이 가득한 곳을 지나자 더 넓은 도로와 가게들, 길가를 거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 정장을 빼입은 젊은 남성, 깔끔한 원피스 차림으로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중년의 여성, 등등.

중세 유럽보다 좀 더 발전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제법 운치 있네.’

실제 유럽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먼 나라에 여행을 온 듯한 기분도 들어 조금 들떠버렸다.

그러다 창밖을 스치는 건물과 온갖 가게들이 즐비한 모습이 척 보기에도 도착지가 머지않은 것 같아 아몬 쪽을 살펴봤다.

아이는 아직도 밖의 풍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점잖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그렇듯 동그래진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천진해 보였다.

이제야 제 나이에 걸맞게 어린아이다운 아몬의 모습에 나도 모르는 세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전혀 흔들림 없는 매끄러운 주차에 순간 감탄할 뻔했다.

이건 마부가 스킬이 대단한 걸까, 아니면 역시 돈의 힘?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에드가의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에도 여전히 창밖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아몬이 귀여워서 절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아몬.”

그제야 화들짝 놀라 휙,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아몬의 얼굴이 미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아지경으로 집중해 있었던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내리자, 다 왔어.”

아몬은 내 말에 눈을 내리깔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누나.”

내가 먼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린 후 아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사양하는 대신 여전히 불그스름한 낯으로 살포시 웃어 보이며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왔다. 그런 아몬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이 맛에 아이를 키우는 건가. 귀여운 내 새끼… 는 아니고 동생.

맨 먼저 목적지로 정한 곳은 전에 아몬의 옷을 대량 구매할 때 보았던 카탈로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디자이너의 살롱이었다.

돈 많은 고위 귀족들을 위해 제작된 카탈로그였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조잡하여 아무런 기대도 없었는데 막상 옷을 받아보니 너무 만족스러워서 직접 와보고 싶었다.

깔끔한 외관의 건물 입구에는 멋스러운 글씨체로 로즈니라는 이름만이 달랑 새겨진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 건물이 전부 하나의 살롱인 건가?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컸다.

나는 그대로 아몬을 이끌고 들어가려다가, 준비 중이라 적혀 있는 팻말에 멈칫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아몬의 손을 잡고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안쪽에서 우리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나온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저희 살롱에 방문하시는 건 처음이십니까?”

“네, 그런데 시간을 잘 못 맞춰 온 것 같네요. 오픈 시간이 언제부터인가요?”

“예약이 없을 시 정상적인 오픈 시간은 11시부터입니다.”

“그럼 그때 다시 올게요.”

아직 10시가 좀 안 됐으니 주변 산책 좀 하고 다시 방문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주변도 둘러볼 예정이었으니까.

“성함을 알려주시면 오픈 시간에 맞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리엘리 로베르예요.”

“네, 리엘리 로베르… 로베르라면, 그 로베르 공작가의…?”

직원은 들고 있던 수첩에 이름을 받아 적다 말고 얼이 나간 표정이 됐다.

다소 경직된 듯한 직원의 상태를 보며 긍정했다.

“네, 로베르 공작가의 리엘리 로베르인데요.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문제라뇨. 실례가 많았습니다, 로베르 공녀님. 바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직원은 한껏 미소 지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영업시간 아직이라고 하셨잖아요. 좀 있다가 다시 와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본래 10시에 예약이 되어 계시던 분께서 갑작스럽게 예약을 취소하시는 바람에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로베르 공녀님과 공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바로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음, 그렇다면 안내 부탁드릴게요.”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예약 펑크 낸 사람의 몫을 나로 메우겠다는 건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 혜안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맞아, 나 오늘 아낌없이 돈 쓰고 갈 거야.

***

깔끔한 건물의 외관만큼이나 내부 인테리어도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였다.

우리가 안내받은 응접실은 상당히 널찍했다.

또한 군데군데 화려한 장식품이 상당수 배치되어 화려하지만 신기하게도 과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배치에 상당한 신경을 쓴 듯했다.

‘걸려 있는 그림들도 잘은 모르겠지만 액자부터 장난 아닌걸?’

여러 가지 장식품을 살펴보며 앉아 있으니 직원이 다과를 내어 왔다.

입이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냉큼 집어 먹었는데 맛이 꽤 좋았다. 맛있어서 오도카니 앉아만 있는 아몬의 입에도 하나 물려주었다.

그리고 나도 몇 개 더 먹어 치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문가에 서 있던 종업원이 나를 바라봐왔고,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에 종업원이 문을 열자 굉장히 눈에 띄는 인상의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분홍빛 도는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화려한 의상과 강렬한 색채가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룰 만큼의 미인이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와 그녀의 뒤에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내게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사르르 접혀 올라갔는데, 그 모습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살롱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베르 공녀님. 저는 이 살롱을 운영하고 있는 로즈니 멜라니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로즈니라고 불러주세요.”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가 넓은 응접실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나이도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능력 있는 디자이너라니, 참 멋져 보였다.

“반가워요, 레이디 로즈니.”

마주 인사를 하니 로즈니는 눈웃음 지으며 내 쪽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얼마 전에 로베르 공자님의 옷을 주문하셨었죠? 더 필요한 옷이 있으셔서 방문하셨나요?”

“당신이 디자인한 옷들이 마음에 들어서 방문해 보고 싶었어요. 이번에는 제 옷을 좀 보려고 하는데….”

“어머! 그러셨군요. 물론 제가 영애들의 드레스를 만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신사분들의 의복을 주로 취급하고 있어서 다른 살롱만큼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답니다.”

로즈니가 뒤쪽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어디론가 우르르 빠져나간 직원들이 드레스가 가득 걸려있는 행거를 끌고 나타났다.

드레스를 본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성격도 급하시지….

“아뇨! 드레스가 아니라 승마복을 보려고 하는데요.”

“아아, 승마복이요? 세상에… 승마를 즐기시나 보군요!”

내가 눈앞에 대령된 드레스를 망연히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승마복에 관해 언급하자 그 순간 로즈니의 눈빛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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