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전에 꿈을 통해 보았던 공작의 모습은 빙의하고 처음 식사를 했을 때처럼 딸을 아끼고, 무엇이든 더 해주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공작을 꿈속의 리엘리 로베르는 자연스럽게 받아넘겼지만 그녀가 확연히 공작을 꺼리고 있음 역시 알게 됐다.
아직 꿈속에 공작이 등장한 적은 몇 번 없는 데다 행동을 통제받는 입장에서 당연히 아버지를 불편하게 느낄 수 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아무튼 삼 일 후에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
“주치의를 불러드릴게요. 이번에는 제발 치료 좀 받으시고요.”
용건은 전달했고 더 할 말도 없었기에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올 동안 뒤에서 나를 부르거나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허나, 그래서 더 찝찝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공작을 가까이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자꾸 저런 모습을 보게 되니 완전히 무시해 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
지금 내가 꾸고 있는 꿈은 대략 3년 전쯤의 기억이다.
밤마다 본의 아니게 남의 기억을 들여다보느라 처음에는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지금은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지만….’
어찌 됐든 내가 리엘리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억들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법이다.
꿈속의 리엘리 로베르는 별관 3층 복도에 서 있었다.
건너편에 위치한 저택 본관의 서재가 가장 잘 들여다보이는 위치였다.
리엘리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커다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몬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몬을 훔쳐보며 리엘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남의 생각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고.
다만 조용히 아몬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는 리엘리의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울렁거려서, 내 숨이 다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것 또한 내가 아니라 기억 속의 리엘리가 느끼는 감각이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께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자리를 지키던 리엘리는 어느 순간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주저앉은 리엘리는 여전히 잘게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뭐,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우울해지는 건데…!’
당황스러울 만큼 급속도로 몰려드는 우울함과 서글픔. 여태 꿈을 꾸며 느껴온 감정 중 가장 큰 파동이었다.
급격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가듯, 정신없고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펑펑 울어버리고 싶을 만큼 울적한 감정이 밀어닥침에도 꿈속의 리엘리는 울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은 채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헉! 미친….”
눈이 번쩍 떠졌다.
현실로 돌아오니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진 우울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악몽이라면 지독한 악몽이었다.
이런 우울한 꿈은 가능한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찝찝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은근히 신경을 긁어댔다.
이게 대체 무슨 기억이지?
“원작에서처럼 동생한테 아무 관심 없던 게 아니었던 건가….”
혼란스럽다. 아침부터 정신을 못 차리겠네, 진짜.
덕분에 시녀들이 항상 깨워주던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버렸다.
머리가 너무 띵해서 샤워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욕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내가 씻는 소리를 들었는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둔 세바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응… 눈이 빨리 떠져서.”
아침부터 할 일도 없고, 내려가서 차나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아몬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도 덜 말린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오던 아몬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몬드같이 예쁜 눈매가 나를 인식하고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장면을 눈에 담은 순간. 나는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본능에 충실해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지금보다 훨씬 작은 아이가 홀로 서재에서 책을 읽던 모습이 쓸쓸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방금 전 꿈속 리엘리의 감정에 동화되었던 여파 때문일까.
“누… 누나?”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껴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러자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과 쏟아질 것처럼 크게 뜨인 동그란 눈매가 드러났다.
내가 저를 빤히 쳐다보니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하하!”
그 모습이 귀여워 소리 내서 크게 웃어버리자 여기서 더 빨개질 수도 있었는지, 목덜미까지 붉은 물이 들어버린 아몬을 다시 한번 꼭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귀여워라.
“항상 이렇게 일찍 나오는 거였어? 내일부터는 누나가 좀 더 일찍 일어나 볼게.”
“아니에요.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져서… 원래 오시던 시간에 와주시면 되세요….”
고개를 숙인 채로 웅얼거리는 아몬의 동그란 정수리 가마를 슬쩍 쓰다듬어 보았다.
요 며칠 좋은 제품을 사용해서 그런지 한눈에 봐도 머릿결이 전보다 많이 보들보들해졌다.
“그래, 그럴게. 너도 너무 일찍 나와 있을 필요 없어. 시간 맞춰서 와. 혼자 기다리면 심심하잖아.”
“네, 그럴게요.”
“흠… 저기 아몬, 우리 오늘은 저택 밖으로 놀러 나가 볼까?”
산맥에 열흘 남짓 다녀올 예정이니 필요한 물품을 구매해야 했다.
저번처럼 사람을 집에 부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게다가 공작에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나가서 돈지랄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다 주세요,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로망은 있었다.
나는 힐끗 아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이는 내가 한 말에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공작의 애정을 받는 리엘리도 통제를 받아왔는데 아몬이라고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녀 봤을 리 만무했다.
“누나가 원하신다면 당연히….”
“나만 밖에 놀러 가고 싶은 거야? 네가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거면 안 가도 돼. 아몬 너는 어때? 나가고 싶니?”
억압된 환경에서 자라온 아이라 그런지 무슨 말을 해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아이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네가 내 말에 무조건적인 긍정을 표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내게 투정도 부리고, 평범하게 웃고 떠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성급해선 안 되니까.
“…저도, 누나와 함께 나가보고 싶어요.”
우선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
일단 어딜 나가더라도 아침은 먹고 가야 했기에 사이좋게 식당으로 내려갔다.
나는 오렌지 주스로 가볍게 목을 축이며 아몬에게 물었다.
“아몬,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은 없어?”
“네, 아직 저택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저는 어딜 가도 좋아요.”
“그래….”
거의 열 살이 다 되도록 저택에서만 지내왔을 아이가 태연하게 저런 말을 입에 담는다.
하다못해 바다나 산, 평범한 거리, 그 어디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쯤은 해보았을 텐데….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사야 하는 물건이 있으니까, 일단 번화가를 둘러보자. 그리고 다음번에 나갈 때는 아몬 네가 가보고 싶은 곳에 가고. 그때까지 천천히 생각해 두면 돼.”
내 말에 아몬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보고 싶은 곳… 누나와 동행할 곳이니, 신중히 생각해 볼게요.”
“…부담 갖지 말고 가볍게 생각해도 돼. 이번이나 다음만이 기회가 아니잖아. 또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다 가보면 되니까.”
“네. 다음에도 누님과 함께….”
식사를 멈추고 대답하던 아몬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작게 말한 탓에 제대로 듣지 못한 나는 아몬에게 되물어 보았다.
“응? 뭐라고?”
“아니에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별것 아니겠거니, 넘겨버렸다.
“그럼 식사하고 바로 출발할까?”
“네, 좋아요.”
아몬의 즉답에 나는 곧장 세바니에게 말을 걸었다.
“세바니, 우리 식사하고 바로 외출할 수 있게 준비해 줄래? 시종도 한 명만 같이 대기시켜주고… 우선 지난번에 주문했던 로즈니 멜라니스라는 디자이너의 살롱으로 가보려고 해.”
“네, 아가씨. 준비해둘게요.”
원래 있는 사람이 돈을 써줘야 시장 경제도 잘 굴러가는 법이다.
그러니 돈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쇼핑을 즐겨줘야지.
***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입술이 주책없이 무슨 말을 뱉을지 몰라 미리 단속이 필요했다.
눈앞에는 아몬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도 귀여웠지만 외출복을 갖춰 입고 있는 아몬은 평소보다 배는 더 귀여웠다. 젠장.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조막만 한 얼굴에 아동용 정장을 입은 모습이 한국에서라면 당장 아역 모델로 캐스팅될 만큼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어린아이는 금방 자라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사진으로 남겨둬야 하는데, 카메라의 부재가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언제 화가라도 불러서 초상화라도 남겨둬야겠어.’
속으로 혼자 결심을 다졌다.
앞뜰로 걸어 나가니 멀리서 대기 중인 마차가 보였다.
어제 공작이 대답이 없어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사용인들에게 잘 언질을 해 둔 모양이다.
사실 좀 의외라는 생각이 우선 스쳤다. 내심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외출을 막으려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정말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 마차… 굴러가기는 하는 거지?’
실제로 타고 다니는 용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일 만큼 휘황찬란하기 짝이 없다.
아르반을 배웅하면서 봤던 대공가의 마차도 엄청 화려하고 비싸 보였는데, 이제 보니 우리 집 마차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마차와 같이 우아하고, 뭐랄까… 실생활에 사용하는 물건이라기보다 장식품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축약하자면,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마차 가까이로 다가서자 기사가 문을 열어주며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뭐지, 싶어 잠시 노려보다 잡고 올라가라는 의미 같아 손을 올렸다.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는데 턱이 생각보다 높아 올라가기 불편했다.
‘이 정도 높이라면 발판이라도 달아두는 편이 더 낫겠는데.’
미관상은 참 보기 좋은데, 생김새와 일맥상통하게 실용성이 떨어진다.
나는 속으로 불평하며 안쪽을 둘러봤다. 내부도 역시 부티가 흘러넘쳤다.
쭉 둘러보고는 자리 잡고 앉아 아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올라오기에는 마차가 상당히 높았다.
기사가 도와주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아몬을 올려주리라 생각했던 기사가 뒤로 물러나 말에 올라탈 준비를 하는 모습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뭐야…!
“저기, 경! 아몬은 안 도와주세요?”
어처구니없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호위 기사, 제롬은 바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예, 아가씨. 레이디께만 에스코트해 드리는 게 제국의 예법입니다.”
그것참, 지랄 같은 예법이구나.
나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을 제쳐두고 기사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