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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6화 (16/153)

16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니?”

아까는 아르반에게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한결같은 공작의 태도가 도리어 소름이 끼쳤다.

상식적으로 자기 딸이 그런 식으로 반항하거들랑 다시 한번 얘기를 꺼내려는 시도라도 취하지 않던가.

하지만 공작은 마치 우리 사이의 트러블이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 웃는 얼굴에서 지난번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던 공작을 떠올렸다.

‘회까닥하기라도 한 거야 뭐야.’

그러나 저 소름 끼치는 태도를 제외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였기에 도리어 판단 내리기가 어려웠다.

묘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딴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말해보렴.”

“저 대공 각하와 함께 에시트 산맥의 마정석 광산에 시찰을 다녀오려고 해요.”

용건 외의 말을 섞을 생각은 없어 바로 본론을 던졌다.

그러자 잘 만들어진 가면처럼 변함없던 그의 얼굴에 금이 갔다.

공작의 눈이 순식간에 화등잔만큼 커지더니,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순식간에 사색이 된 공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리리… 그게 무, 무슨 말이니… 아빠는 도저히….”

“말 그대로예요. 카넬로웰 대공과 함께 에시트 산맥에 다녀오겠다고요. 이미 대공과는 얘기 끝냈어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공작은 성마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침묵하며 숨을 고른 그가 천천히 손을 내리고 다시 나를 마주했다.

평정을 되찾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조금 전보다는 차분한 어조로 재차 입을 열어왔다.

“…리리. 너도 이제 성인이고, 내 뒤를 이을 예정이긴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앉은 게 아니야.”

“후계 문제와 관련 없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고 이미 대공과는 이야기를 마쳤어요. 그러니….”

“아니, 대공께서 시찰이 필요하다 하셨다면 리리, 네가 아니라 아빠가 가는 게 맞아.”

“시찰 건은 제가 단독으로 제안드린 문제고 대공께서 이를 받아들이셨어요. 당연히 제안을 드린 제가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공작과 나는 서로의 의견을 귀담아듣기보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떠들어대기 바빴다.

공작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이미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리리, 대체 왜 그러는 거니. 뭐가 그리 불만이야. 응?”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이 정도는 충분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고, 대공께서도 이를 받아들이셨죠.”

“…….”

“뭐가 불만이냐고요? 전부요. 제 나이가 몇인데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못하게 막으시잖아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제멋대로 해보려고요.”

“그건…!”

“네,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거죠? 대체 언제까지 보호만 하실 생각인데요.”

“…….”

내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공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말로는 후계자다 뭐다 떠들어대지만, 그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성인이 되어서도 변화는 없을 것이 뻔했다.

아마 이전의 리엘리였다면 그에 대해서도 순응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쉽지만 저는 아버지의 애완동물이 아닌지라 언제까지고 말 잘 듣는 아이로 남지는 못할 것 같네요.”

빙의 첫날, 멋모르고 저택 밖으로 향하려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에 의해 제지받았었다.

혼자 밖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는 대답에 그럼 동행해 달라 요청하자 각하의 허가가 없이는 불가하다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왔다.

당시에는 다른 수가 없었기에 일단 후퇴했다.

그리고 시녀장을 통해 외출 허락을 구했으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에둘러진 거절.

이후에는 내심 포기하고 그냥저냥 저택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지냈지만 언젠가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노라 생각했었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첫 만남에는 당황해서, 두 번째는 아몬의 이야기를 하느라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이 문제를 꼭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계속 보호라는 명목하에 가둬두고 싶으시다면 저도 다른 수가 없어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저택에서 나가드리는 수밖에.”

사실상 협박이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버리겠다는.

아마 원래의 리엘리는 공작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집에만 박혀 있을 생각도 없었고, 공작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며 따라줄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생각에 잠긴 듯했던 공작이 예상외로 상식적인 이야기를 꺼내왔다.

“그보다 리리… 너도 이제 어엿한 숙녀잖니. 그런데 아무리 일이라지만 약혼자도 아닌 남자와 어딜 가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단다.”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려보고자 애를 쓴다.

‘그게 정설이긴 하지.’

이렇게 부득불 그와 맞서고 있지만 사실 나 역시 저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실상 보통의 부모라면 쉽사리 허락하는 편이 도리어 이상할 터였다.

나 또한 내 행동이 얼마나 철없어 보일지를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그냥 좀 철딱서니 없는 딸로서 행동하는 수밖에.’

나 자신의 자유와 그 남자의 앞날을 바꿔 놓을 유일한 길이었다.

비록 공작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겠지만, 그의 사정까지 고려해줄 여유는 없었다.

‘나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런 내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의 일생이 바뀔 수 있다.

공작은 내게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나를 좀 더 살살 구슬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향했다.

“아빠를 도와 가문의 일을 거들겠다는 생각은 물론 기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구나. 그리고 보니 우리 리리가 마지막으로 외출했던 게 꽤 오래되긴 했지. 답답해서 그러는 거라면 아빠가 호위들을 붙여주마. 어디 놀러라도….”

공작은 빤히 보이게 말을 돌렸다. 그는 단순히 내가 답답해서 집을 나가보고 싶어 한다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답답했다. 누군가 나를 통제하는 느낌은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잠깐의 일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앞으로 계속 내 의지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

“저는 단순히 바람을 쐬고 싶은 게 아니에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제 행동의 자유를 원하는 거죠.”

내 반박에 공작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이 입술을 떼는 모습을 보았지만, 나는 내 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가 대공과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일로써고, 호위들도 당연히 동행할 거예요.”

“…하지만 리리, 무슨 이유라 해도 미혼의 남자와 동행은 허락해 줄 수가 없단다.”

공작은 어느새 또 손을 갉작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불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삐딱하게 질문했다.

“그럼 대공이 기혼이었다면, 아니, 여성이었다면 허락해 주셨을 건가요?”

“그건….”

공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아니잖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아버지께 이런 말을 드린 건 허락을 받고자 했던 게 아니에요. 그냥 알아만 두시라고 말씀드리러 온 거죠.”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사흘 후에 카넬로웰 대공이 데리러 오겠다고 했어요. 며칠 정도 집을 비울 거니까….”

“아니, 리리…! 그래도… 그래도 아빠 말대로 하자. 그게 맞아. 여태까지 아빠 말에 잘 따라줬잖니. 응? 위험한 생각은 접어두고… 우리 리리는 안전하게, 계속, 아빠 곁에 있어야지….”

“대체 언제까지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계속 이렇게 저택에서만 지내게 할 생각이셨던 거 아닌가요?”

“…리리, 아빠가 왜 이러는지 알잖니.”

공작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빠는 단지 우리 리리가 전처럼 쓸데없는 행동을 하다 충격을 받거나, 밖에서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쓸데없는 행동?

‘이전의 리엘리도 공작에게 반항하고 밖으로 나갔던 적이 있었던 건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공작의 말에 순종적으로 굴었던 이전의 리엘리가 비정상인 것이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공작은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달래듯이 말했다.

“대신 다른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만 하렴. 새 옷을 사줄까?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고 오페라 공연이라도 보고 오면 기분 전환이 되고 좋을 거야.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잖니.”

“…….”

“다른 갖고 싶은 건 없고? 응? …그래, 아니면… 돈이 부족하지는 않니? 뭐든 말해보렴.”

공작은 이 중 하나쯤은 내 마음을 흔들 만한 것이 있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던지는 듯했다.

계속해서 내게 이것저것을 제안하는 그의 낯빛은 얼핏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공작의 표정에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그게 마치 얼어붙은 호수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손을 대면 곧장 깨져버릴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얼굴에 피가 돌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하얗게 탈색된 낯빛.

그런 얼굴로 나를 설득해보겠다고 저리 입을 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속에서 기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뭐라 형용하기는 어려웠지만, 결코 유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 공작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단순히 리엘리를 아끼기에 보호하려 드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으리란 묘한 확신이 삽시간에 뇌리를 뒤덮었다.

“돈이라면 지난번에 말씀하셨잖아요. 제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좋다고. 그리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전 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셔도 산맥에 다녀올 겁니다.”

“리…!”

“그리고, 앞으로 제 외출이나 사생활에 대해 통제하려 들지 마세요. 전 아버지가 마음대로 해도 좋은 물건이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도 제지하신다면, 전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딱 잘라 내 의사를 전달했다. 이 논쟁을 길게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공작이 원하는 방향과 내가 원하는 방향이 정 반대를 이루고 있으니, 누구 하나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는 상황.

“…….”

공작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요구를 묵살할 시 내가 정말 저택을 나가려 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기에 취하는 행동이었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공작의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제 손 가죽에 손톱을 세워 힘주어 눌러댔다.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게 자신이 아닌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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