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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5화 (15/153)

15화.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아르반의 입에서는 긍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죠. 성검을 찾아낸다면 소유권은 저에게 있으며, 대가로써 로베르 공자의 검술을 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밑져야 본전인 격이었다. 그저 시간과 발품만 들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다음에는 정말 황제를 찾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있지는 않지만, 굳이 그에게 힘을 실어줄 만한 일을 방치할 생각 역시 없었다.

그 외에 사소한 문제를 꼽자면 미혼의 남녀가 함께 여행길에 오른 다른 것인데… 이 정도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이었다.

현 황제는 제 동생인 전 대공보다 그 아들인 아르반을 더 견제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전쟁 영웅으로서 치하받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을 경계하고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재능 있는 마법사이자 유능한 황제는 제 동생과는 다르게 철두철미한 자였다.

황제는 거슬리는 제 동생, 전 대공을 전쟁터에서 치워버리고 그 빈자리에 아르반을 밀어 넣었다.

의도는 뻔했다. 눈에 거슬리는 아르반 역시 제거해버릴 속셈이었을 터.

하지만 그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살아남았다.

그에 황제는 더 이상 아르반을 건드리지 않고 전쟁 영웅으로서 대우해 주었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명료했다.

‘내가 살아 있는 쪽이 황실에 더 이득이 되니까.’

그간의 전쟁을 통해 집어삼킨 영토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다면 또다시 움직이려 들 터.

그때를 위해 거슬리는 제 존재를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자였다.

그 수단에는 물론 아르반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황제는 늘 아르반을 향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아르반의 쓸모가 다했다 여겨지면 다시금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황제는 아르반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그가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를 때 그의 어머니를 독에 중독시켰다.

그로 인해 아르반의 어머니는 아르반이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아르반이 자진하여 황제에게 성검을 가져다 바친다면 지금처럼 경계하고 숨통을 조이려 드는 일은 줄어들 것임이 자명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차라리 성검의 존재를 인멸해 버리고 싶다. 고작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그자가 바라마지 않는 것을 가져다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전에는 잃을 것이 있어 몸을 사렸다지만 이제는 달랐다.

성검은 그 존재만으로 아르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뭐가 되었든 손에 넣은 뒤에 결정해도 상관없겠지.’

그는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강제로 잘라냈다.

“진짜 잘 생각하셨어요! 저희 애가 착하고 똘똘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으실 거예요.”

리엘리는 아르반이 말을 도로 물리기라도 할까 싶어 냉큼 대답했다.

“참, 그럼 언제 출발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항상 집에만 있어서 시간은 아무래도 괜찮은데, 각하께선 언제가 편하시겠어요?”

“광산은 산맥의 중반부쯤에 위치해 있습니다. 적어도 왕복 열흘 정도는 소요될 테고, 산맥에 진입하면 마차를 이용할 수도 없습니다.”

“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동하는 동안 함께 노숙하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에요. 그리고 따로 시중 같은 거 없어도 괜찮으니까,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신 팔이 언제 떨어져 나가는지 모르니 가능한 한 빨리 움직이고 싶어.’

그리고 아몬을 며칠이나 혼자 두고 외출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리엘리는 아르반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별다른 의심 없이 제 말을 믿어주어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황당한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다니… 사람이 너무 의심이 없는 것 같아 좀 걱정도 되었다.

아르반은 리엘리의 시원한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공녀는 그의 예상보다 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 그녀나 결혼 적령기의 미혼 남녀였다.

그 때문에 함께 길을 나서는 것이 정말 괜찮은지의 여부를 함께 물어본 것인데, 돌아온 그녀의 대답에는 그런 걱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더 말을 붙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르반은 평생 귀하게 커왔을 그녀에게 노숙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리란 것을 경고하려다 말았다.

무어라 덧붙이더라도 직접 상황을 직면하기 전에는 크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공녀의 편의를 우선시해 준비해야겠군.’

잠시 조율해야 할 일정과 시간을 가늠해 보던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흘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 쪽에서 필요한 물품과 사람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사흘 후 아침에 모시러 가도록 하죠.”

아르반은 리엘리의 순수하게 기뻐하는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한테는 제가 알아서 잘 말씀드릴 테니까, 각하는 적당히 입만 맞춰주세요.”

저도 모르게 리엘리의 얼굴을 관찰하던 아르반은 그녀가 하는 말에 반사적으로 답했다.

“공작께서 쉽게 허락해 주시진 않으실 듯합니다만….”

“상관없어요. 허락 안 해주면… 뭐, 허락 안 해주는 대로 가면 되죠.”

리엘리 로베르는 이제 평생을 공작저 내에서만 나고 자라온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본래의 리엘리보다 오래 살아온 성인이다.

이제 생물학적으로 제 아버지가 된 이는 공작이지만, 그 어떤 결정권도 그에게 맡길 생각은 없었다.

‘공작이 허락 안 해주면 어쩔 수 없지. 그냥 강행하는 수밖에.’

자신이 이 몸에 들어온 이상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삶이었다.

이런 제 생각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연히 얻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어영부영 허비할 수는 없었다.

원래의 리엘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공작의 뜻대로 예전의 그녀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어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도 부족한 게 인생이다.

리엘리는 아르반이 옆에서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알지 못한 채 앞장서서 저택으로 향했다.

***

아르반과 나는 서서히 무채색으로 뒤덮여가는 후원을 뒤로한 채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거침없이 계약서를 작성해 나갔다.

모름지기 구두계약은 쌍방 간에 좋을 것이 없다.

나는 성검의 위치를 알려주고, 찾아낸 성검의 소유권은 아르반에게 있으며, 그는 성검의 대가로 아몬의 검술 스승이 된다는 간략한 내용의 계약서에 각자 서명하고 나누어 가졌다.

성검을 찾지 못할 시 어떤 보상을 원하느냐고 묻는 내 질문에 아르반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찾지 못하더라도 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전해왔다.

나는 정말 괜찮겠냐고 다시 물었지만 그의 답은 같았다.

‘세상에, 대공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해서야!’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아 보였다.

눈매도 제법 날카로운 편이고 절대 만만하게 보일 인상이나 피지컬이 아닌데, 이렇게 손해 볼지도 모를 계약을 진행하겠다니.

사람이 생긴 것과 영 딴판이다.

허무맹랑한 내 말을 철석같이 믿어주는 이 남자가 앞으로 거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 조명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아차 싶었다.

한밤중에도 환하기만 했던 도시에서 살아왔던지라 이곳의 밤은 한국에서보다 일찍 찾아온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아, 밖이 벌써 깜깜하네요. 밤에 돌아가시기 위험할 텐데, 주무시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자고 가. 여기가 수도에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대거 거주하는 구역이긴 하지만 한국처럼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 위험해.

빈방 많은데 하루 자고 내일 아침에 아몬이랑 셋이 밥 먹자. 내 동생 작고 귀엽고 착해….

은근슬쩍 던져본 제안에 아르반은 살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내일 아침 중요한 일정이 있습니다.”

아침에 둘이 인사시키는 장면까지 상상 중이었는데… 그래도 일이 있다는 사람을 더 잡기도 뭐 했다.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앞까지 배웅만 해드릴게요.”

내가 아쉽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잠시 침묵하던 아르반이 한 박자 늦게 답해왔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아르반의 모습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아쉬움에 미적거리며 일어나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돈 많은 공작가답게 저택의 내부는 물론이고 앞뜰까지도 마법으로 밝혀지는 램프들이 즐비하게 배치되어 시야를 환히 밝혀주었다.

밝은 조명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감상함에 있어 장애가 없다는 점이 내심 아주 흡족했다.

램프의 불빛에 의해 그의 얼굴 위로 음영이 드리워졌다.

그게 또 낮에 볼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있어, 나는 홀린 듯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잘 생겼네….’

시간이 늦어 사용인들도 돌아다니지 않아 단둘이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으니 꼭 밤마실을 나온 연인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상이 즐거워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언제나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바라는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는 금세 대기하고 있는 마차 앞에 다다랐고, 아르반은 전처럼 내게 손을 내밀어 왔다.

이제는 이 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는 부드럽게 내 손을 들어올린 뒤 소리 없이 입을 맞췄다.

그가 손을 잡고 있는 그대로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리자 내깔려 있던 푸른 눈동자에 내가 담겼다.

아르반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불빛과 어우러져 푸른 화염처럼 일렁였다.

“늦은 시간까지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좋은 밤 되시길.”

“…네, 각하께서도 좋은 밤 되세요. 잘 살펴 가시고요.”

하루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와는 며칠 있으면 다시 만날 테니 한 점 남은 미련을 그 자리에서 털어낸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르반과의 문제도 해결했겠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공작을 찾아가 아르반과 함께 산맥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이 몸의 유일한 보호자니까, 알리기는 해야겠지.’

시간이 좀 늦은 듯했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워커홀릭인 로베르 공작이 벌써 침대에 누웠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다 보니 멀리서부터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거봐라, 아직도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지.

하인은 내가 그 앞에 멈춰 서자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안쪽에 내가 왔다는 사실을 고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저예요, 리엘리.”

“우리 리리 왔구나. 어서 오렴.”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도 공작은 전과 같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공작의 태도에 잠시 몸을 굳혔다.

내심 그의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으리란 짐작이 틀려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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