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리엘리가 보일 법한 반응을 예상하며, 아르반은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했다.
리엘리는 큰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즉각 반응해왔다.
“와… 정말요? 여태 다른 귀족가에 한 번도 안 가보셨어요? 저도 그런데! 그럼 각하도 저희 저택에 와보셨으니까, 다음에는 저도 각하의 저택에 초대해 주실 수 있나요?”
약간 놀란 듯 보였던 리엘리는 이내 반가운 듯, 조금 상기된 얼굴로 제안해왔다.
그녀의 표정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아르반은 순간 맥이 풀려버렸다.
별로 대수롭지 않아 하는 반응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 돌아왔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녀를 저택에 초대한다라,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다음을 기약할 구실을 만들어 두는 것도.
이후 필요 없다 여겨지면 그때 가서 쳐내도 그만이다.
일단은 잘라내야겠단 판단이 서기 전까지는 연을 이어가는 편이 좋겠지.
“…물론입니다. 공녀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아르반은 자신이 다른 귀족의 저택을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았다 오해하는 리엘리의 생각을 따로 정정해 주지 않았다.
“진짜요?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그럼 저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반의 허락에 리엘리는 신이 났다.
빙의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공작저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남의 집에 놀러 간다는 것이 매우 기껍게 다가왔다.
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반 카넬로웰의 저택을 방문한다니.
기분이 좋아진 리엘리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본론, 아르반에게 할 말을 떠올리니 긴장으로 얼굴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리엘리는 자신과 반걸음 정도 떨어진 뒤에서 걷고 있는 아르반에게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보고 섰다.
‘이 정도 안쪽까지 들어 왔으니 본론을 꺼내도 좋겠지.’
결코 작은 키가 아닌 리엘리도 장신의 아르반과 정면으로 마주 서니 고개를 살짝 꺾어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리엘리는 발끝부터 차오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아르반을 쳐다봤다. 맞잡은 두 손에 땀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림에도 아르반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시간을 끌던 리엘리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반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굳어 있던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저, 각하. 실은 각하께만 조용히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예, 말씀하십시오.”
“…음, 제가 잃어버린 성검… 그러니까, 슈페르네사 여신의 성검이 잠들어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면… 믿기 힘드시겠죠?”
제 입으로 내뱉으면서도 이게 아르반을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누가 듣더라도 코웃음만 칠 만한 이야기였다.
집에서 칩거하던 공녀가 갑자기 ‘제가 잃어버린 성검의 위치를 알고 있어요!’라고 떠든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특별히 좋은 수를 떠올릴 만큼 머리가 좋지도 않았고, 현재는 원작 소설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는 과거의 시점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패가 마땅치 않았다.
그저 무작정 부딪혀 볼 수밖에.
눈앞의 이 남자가 한쪽 팔을 잃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할 만큼, 그녀는 뻔뻔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리엘리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르반 카넬로웰이란 남자의 불행을 막고 싶었다.
“…….”
아르반은 제 모습을 담고 있는 투명한 자안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리엘리가 뜬금없이 성검에 대해 운운한 것보다, 그녀가 성검의 행방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성검이 ‘잠들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라….’
그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성검이 분실되었다는 것은 황족과 고위 귀족 몇을 제외하고는 아는 이가 없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성검이 분실되기 전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오직 황실의 핏줄을 이은 자들뿐.
대부분의 귀족과 평민들에게 성검은 황실 내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슈페르네사 여신의 성검은 샤루스 제국이 여신의 축복을 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강력한 무기였다.
초대 황제가 여신이 내린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성검에 깃들어 있는 드래곤의 수호를 받으며 세운, 여신의 축복이 머무는 땅임을 상징하는 물건임과 동시에 여신의 검이라는 이름값이 부끄럽지 않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무기.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은 자는 성검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의 주인으로서 인정받고 그 수호를 받게 된다.’
즉, 드래곤의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 황제의 서거 이후 성검의 선택을 받은 이가 없었기에, 성검과 드래곤은 수면기에 들어가 버렸다.
수면기에 들기 전 드래곤이 남긴 전언으로 성검은 에시트 산맥에 존재하던 여신의 신전에 안치되었었다.
그리고 수년 후, 그 일대에 일어난 대규모 지진으로 인해 신전이 무너져 내리며 성검의 행방 또한 묘연해졌다.
하지만 황실에서는 성검의 분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성검의 부재는 상징적인 의미를 떼어놓고 봐도 치명적이니.’
수백 년 동안 은밀히 수색 작업을 펼치고는 있지만, 여전히 그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한데 그런 유물의 행방을, 공녀가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아르반은 리엘리를 다그치는 대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공녀께서 성검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네, 정말이에요. 이번에 발견된 에시트 산맥의 마정석 광산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데… 자세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요.”
솔직히 설명하기 어렵지는 않지만,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가는 허무맹랑하다 못해 의심쩍어 오히려 신뢰도가 깎일 터였다.
“하지만 광산 앞까지 저를 데려다 주시면 성검을 찾아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확신하고 계시는데 어째서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작가에서 성검을 찾아 바친다면 황실에서 상당한 포상을 받으실 수 있을 텐데요.”
“뭐, 그렇겠죠… 근데 포상 같은 거 관심도 없고, 애초에 황실에서 제 말을 믿어주지도 않을 게 뻔하잖아요.”
아까의 긴장감이 벌써 풀려버린 리엘리는 다소 불퉁해 보이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저 혼자 성검의 행방을 알고 있다 열심히 외친들… 일단 증거가 없으니까요. 저희 아버지도 믿어주지 않으실걸요.”
제 말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여기는 그녀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지만 아르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까 자신에게 말했듯이 ‘잃어버린 성검이 잠들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황실에 고한다면, 황제는 주저 없이 그녀가 말하는 곳을 수색하리라 확신했다.
아르반은 문득 의아해졌다.
자신이 듣기에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정보였지만, 정작 정보의 본 출처인 공녀 자신은 확신도 갖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제게 꺼낸 그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 터무니없다고 판단하신 정보를 제게 말씀하신 건… 저라면 공녀의 이야기를 믿어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 안 믿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믿어줘라.’
리엘리는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은 진심을 눌러두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네, 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믿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각하께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잖아요? 더구나 이렇게 허술한 거짓을 입에 올릴 만큼 할 일이 없지는 않아서요.”
“공녀의 말이 모두 맞다 가정하더라도, 제게 성검의 행방을 알려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거래하자는 거예요. 제가 각하께 성검을 안겨드리고, 각하께서는 성검을 대가로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해요. 손해 보실 만한 얘기는 아니라고 봐요.”
“거래, 말입니까?”
아르반은 리엘리가 바라는 거래의 대가가 무엇일지 유추해 보려 했다.
하지만 리엘리는 아르반이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 거래요. 그리고 시기가 좀 이르긴 하겠지만, 한 번쯤 마정석 광산에 시찰은 가보실 거잖아요? 저랑 함께 방문한다 여기시면 될 일이죠.”
리엘리는 아르반이 끼어들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에요. 제 동생이 검술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 아이의 검술 스승이 되어주셨으면 해요. 만약 성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진짜 만약이지만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그에 대한 보상도 해드릴게요.”
긴장과 머뭇거림은 모두 털어버린 지 오래였다.
리엘리는 아르반을 향해 당당하다 못해 사뭇 도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태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차피 이런 짓 안 해도 너 나중에 내 동생 스승 될 운명인데 굳이 이런 거래하자는 이유가 뭐겠냐고! 나는 그냥 다 필요 없고, 바라는 거 당신 왼팔의 안녕. 딱, 그거 하나니까 제발 나랑 가자고! 간다고 말해!’
말하다 보니 속에 담아뒀던 답답함이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저랑 같이 성검 찾으러 가요!”
그 때문에 살살 설득해보려던 계획 또한 틀어져 버렸다.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편 아르반은 리엘리와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 반걸음 뒤로 물러나는 와중, 혼란에 사로잡혔다.
공녀의 눈동자에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었지만, 분명 절박함 또한 담겨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리도 절박하게 만드는 것일까.
확실히 아르반은 제국에서 가장 뛰어나다 정평이 나 있는 검사였다.
하지만 그 자신이 검을 잘 다루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것은 확연히 결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건 그저 자신의 직감에 불과하지만, 공녀의 절박함은 단순히 제게 동생의 검술 스승을 부탁하고자 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 듯했다.
아르반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분명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