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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3화 (13/153)

13화.

‘젠장, 제일 중요한 본론을 잊고 있었다니.’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는데….

그에게 기회를 틈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넌지시 던져볼 계획이었는데, 식사가 다 끝나갈 동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어떡하지. 공작이랑 일도 다 마쳤고, 식사도 거의 막바지니 이제 곧 돌아갈 거야.’

초조한 마음에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둘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만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봤었다.

결국 그때도 결론이 안 나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지만.

그나마 가장 무난하다 생각한 게 산책이라도 하자 권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 듣더라도 ‘너한테 관심 있으니 나랑 산책 좀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는 뜻으로 들릴 것 같아서 기각해 버렸었다.

사실 들이대는 것처럼 느껴져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실제로 그에게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노골적인 플러팅으로 느껴졌을 때 그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더는 남는 수가 없으니,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윽, 그래도 역시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잠시간 맹렬히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이판사판이다, 그냥 밀고 가자!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게 전부 그를 위한 건데 거절하면 나만 억울했다.

그러니까 거절하면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마음을 굳힌 나는 들고 있던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굳어 버린 안면 근육을 움직여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르반에게 말했다.

“각하, 저희 저택 후원에 유리 온실 있는데 이맘때쯤이면 노을이 드리워 정말 아름다워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가볍게 산책하시면서 둘러보심이 어떠신가요?”

내가 듣기에도 정말 노골적인 데이트 신청이다.

‘근데 어떡해, 다른 방법이 없는걸.’

얼굴에 철판 깔고 뻔뻔하게 밀고 나가려 했는데, 부끄러움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연기에는 소질이 없기도 했고.

“…….”

진짜 내가 쪽팔린 거 참아가면서 말한 건데, 대답이라도 좀 해줘라.

그렇게 사람 무안하게 바라보면 너무… 그윽하고 좋긴 한데, 여러모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민망함에 열이 올라 이대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발언에 얼굴이 굳어진 공작이 끼어들었다.

“리리, 아무리 그래도 둘만 산책은….”

“아버지, 전 대공 각하께 여쭤봤어요.”

나는 재빨리 공작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아르반한테 대답을 듣기 전에 공작에게 태클이 들어오면 답이 없었다.

아르반은 잠시 공작에게 눈길을 줬다가 내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좋은 제안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로베르 공녀께서 아름답다 말씀하시는 온실이 무척 궁금하군요.”

줄곧 나를 비추고 있는 아르반의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아르반 카넬로웰은 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여자, 리엘리 로베르를 에스코트하며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묘한 눈길로 기분이 좋은 듯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리엘리를 내려다봤다.

로베르 공녀는 여느 귀족 영애들과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었다.

아르반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당시부터 그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보아하니 사교계 데뷔가 머지않았을 텐데.’

과연 그곳에서도 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리 거침없이 행동할지 조금 궁금해졌다.

사교계에서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은 곧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다는 것과 같다.

로베르 공녀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신분이 아주 높거나, 앞뒤 분간 못 하는 천치거나.

하지만 아무리 신분이 높은 자라 한들 사교계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녀라는 신분이 있기에 앞에서는 모두 그녀를 찬양하겠지만 뒤에서 어떤 추문이 나돌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르반이 보기에 로베르 공녀는 거칠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전에는 자신을 보고 보내기 아깝다는 말을 입에 담더니, 지금은 먼저 산책을 권해 오기까지 했다.

귀족 영애가 보이는 모습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공의 지위를 물려받기 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가까이하지 않았을 법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반의 시선을 끈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으로 공녀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제가 스스로 감추지 않고 있는 것뿐.

특히나 그 눈에 떠오르는 다채로운 감정들이 너무도 선명히 들여다보여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처음 공녀와 마주했던 날,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던 놀람과 고양감, 그리고 희미한 동정심.

그녀가 어째서 자신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해 아르반은 쭉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지금은 사용인들이 없는 시간이라 조용하게 구경할 수 있는데….”

아르반은 옆에서 재잘거리며 자신을 이끄는 로베르 공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밝은 금빛 머리칼이 노을빛을 머금고 흩날리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리엘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르반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금빛 머리칼, 하얀 피부, 아이보리색의 드레스.

그 모든 것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그녀가 눈을 휘며 웃는다.

“왜요?”

그 옅은 웃음에 아르반은 불현듯,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전 대공인 아버지가 아직 제게 손을 뻗지 않았던 옛날. 노을을 등진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지어주시던 미소를. 그 평화롭던 한때를.

“…그저 춥지 않으실까 염려되어 보았습니다.”

“아, 괜찮아요! 추위를 타는 편은 아니라. 그리고 어차피 온실로 들어가면 따뜻할 거예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아르반은 리엘리를 빤히 바라봤다.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자유로운 사람.

그녀를 가까이하다 보면…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의 갈피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반의 머릿속에서는 이따금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이 맴돌고는 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너의 인생을 살아가렴. 너를 속박하던 각하도, 힘없이 두고 볼 수밖에 없던 나도 더는 없으니…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고, 네가 진짜 바라는 것을 이루고 살아가.”

아르반은 어머니의 유언을 상기할 때마다 폐부가 막혀버린 것과 같은 갑갑함을 느끼고는 했다.

‘바라는 것이라….’

무엇 하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평생이라 불러 무방한 시간을 전 대공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다.

일찍부터 감정을 죽이고 숨기는 법을 배웠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해야 했고, 품위를 잃지 않아야만 했다.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을 전 대공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 행동했다.

그것은 곧 습관이 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고착화되어 더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구속에서 벗어난 지금도 아르반은 전 대공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런 내 생각을 알게 된다면 형태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좇으려 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놈이라 비웃겠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쥐고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유일하게 잡고 있던 어머니의 죽음. 그 부재가 아르반을 이루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어머니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던 전 대공의 바람도 이제는 제 알 바가 아니었다.

공허하고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홀로 걷게 된 아르반에게는 새로이 그러쥘 것이 필요했다.

***

“보세요. 온실은 엄청 따뜻하죠? 들어가요.”

“예, 들어가시죠.”

아르반이 문을 열자 리엘리가 종종걸음으로 먼저 쏙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적막이 흐르는 온실로 들어서며, 아르반은 어머니의 유언을 반추했다.

그는 이채 어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단지 살아 있기에, 공허하기 그지없는 삶을 연명해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갈피조차 잡지 못한 채.

제 눈앞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빛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러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작은 불씨를 발견한다면,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 발버둥 치겠지.

아르반이 미동 없이 서 있자 리엘리가 안쪽에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어서 오지 않고 뭐하냐고 그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안쪽이 보기보다 넓어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예요.”

“그렇군요. 온실에 들어와 본 건 처음입니다.”

대화를 잇는 가운데 잠시 망설임이 섞였다. 체면상 말해봐야 좋을 것 하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왠지 그녀를 떠보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답지 않은 충동에 갈등하던 아르반은 결국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귀족의 저택을 둘러본 적이 없어 식견이 짧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아름답습니다.”

어찌 보면 치부라 볼 수도 있는 말이었으며, 여태까지 다른 이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닌, 오늘과 같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필요에 의해 방문했을 뿐.

그는 의무가 동반되지 않은 초대장에는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사교계의 영애들이라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위로해 줄 터였다.

그리고 그를 저택에 초대하고자 부모를 통해 초대장을 보내올 것이다. 대다수의 미혼 남녀가 그러하듯이.

그도 아니라면 앞에서는 동정을 표하고, 뒤돌아서는 그를 업신여기며 즐거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가식을 떨고 표정을 그려내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르반은 어릴 적부터 타인의 표정과 눈빛을 읽는 훈련을 받아왔다. 어지간한 연기로는 그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과연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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