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이는 제 남는 시간 전부를 온전히 체력 훈련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지, 미친 듯이 훈련에 몰두하는 아몬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려야 했다.
적정량 이상의 훈련은 아직 어린 아몬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며, 로드릭은 혀를 내둘렀다.
악착같이 살아가는 평민의 아이 중에서도 이처럼 독한 아이는 보기 드물 것이다.
그러나 아몬에게는 자신을 말리는 로드릭의 잔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최대한의 성과를 내서 누님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욕구만이 아몬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기사조차 학을 떼게 만들던 아몬의 훈련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리엘리의 한마디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몬, 요즘 너무 과하게 운동만 하는 거 아냐?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으니까 몸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해.”
“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훈련하도록 할게요.”
아몬의 일상은 모두 리엘리에 의해 변해 갔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
열흘이란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아르반이 방문하기로 약속했던 날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참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무엇보다 텅텅 비어 있는 아몬의 드레스 룸을 꽉 채워주고 싶은 마음에 옷을 한가득 구매해 버렸다.
기성품은 물론이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옷은 맞춤도 여러 벌 주문해둔 상태였다.
어린 남자아이의 옷이라 별다른 기대 없이 카탈로그를 펼쳤었는데, 어느 시대나 자본의 힘이란… 돈이 많아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새삼 카탈로그의 존재를 보고 감탄했다.
상당히 조잡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시대에 카탈로그라는 것이 존재한다니!
돈 많은 이들의 특권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또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물건은 눈에 띄는 족족 쓸어 담으며 간만에 알찬 쇼핑을 즐겼다.
“분명 아몬한테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했는데… 왜 내 욕심을 채운 것 같지…?”
이것저것 사들이면서 아몬보다 내가 더 뿌듯해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쇼핑을 마치고는 아몬의 일과를 정해주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기도 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정교사를 들이고 공부를 시작할 때였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나이대 애들만큼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내가 아홉 살 때는 뭘 배웠더라?’
학교 갔다 와서 피아노학원 가고, 수학학원 가고, 태권도장 가고… 피아노 빼고는 다니기 싫었었는데.
여기서는 필요한 과목의 가정교사를 고용해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되도록 아이의 의견을 반영해서 배우고 싶은 것 위주로만 교육받게 해주고 싶었다.
정말이지, 사교육의 폐해를 몸소 경험한 입장에서 과도한 교육은 정신건강에 해롭기만 했으니까.
다행히 아몬은 내가 짜놓은 일정을 잘 소화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애가 검술에 너무 진심인 것 같달까. 아니면 역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 교사로 채용한 기사, 로드릭의 말에 따르면 아몬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연무장으로 향해 쉬지 않고 훈련을 강행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연무장이 잘 내다보이는 방에 죽치고 앉아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러모로 극단적이구나, 내 동생….’
애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그동안 잘 먹지 못해 또래보다 작은데 갑자기 활동량이 확 늘어버려서 건강을 해칠까 봐 여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넌지시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을 흘렸는데, 다행히 착한 아몬은 내 말을 잘 들어주어서 이제 과하다 여겨질 정도의 훈련은 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아몬이 소설의 주인공이고 그만한 재능 역시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걱정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그렇게 훈련 시간이 줄어들자 아몬은 남는 시간에 방이나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도 아니면 적당히 자율 운동을 하거나. 너무 모범적인 아이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친구라도 만들어 줘야 하나.’
난 저 나이 때 공부하기도 싫었고,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운동? 열 내고 땀 흘리는 건 질색이었다. 그저 친구들이랑 놀고 게임을 하는 게 인생의 낙이었는데….
아이가 좀 더 흥미를 느낄 만한 취미 거리나 친구를 만들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내가 권하면 뭐든 다 좋다고만 할 것 같아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거울을 살펴봤다.
거울 속의 나는 고급스러운 아이보리색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열흘간 많이 가까워진 쌍둥이와 머리를 맞대고 나름 심사숙고해서 고른 드레스였다.
‘지난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이 아닌 이상 대공을 맞이하는 데 어느 정도 신경을 쓰는 게 보통이니까.’
내가 아몬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을 때 도착한 아르반은 현재 공작과 마정석 광산의 지분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 것이다.
초대한 손님보다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기에 조금 일찍 준비를 마쳤다.
시계를 확인했다. 아몬의 얼굴을 보고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몬만 쏙 빼놓고 식사를 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러니 얼굴이라도 보고 식사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다.
“아몬, 잠깐 들어가도 될까?”
문 앞에서 작게 노크하며 말을 걸자 안쪽에서 곧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아몬은 읽던 책을 덮고 내게 다가왔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어서 소파를 뒤로한 채 아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몬, 말했다시피 오늘 카넬로웰 대공이 방문해서 저녁은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그래도 주방장한테 당부해뒀으니까, 평소처럼 잘 챙겨줄 거야.”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내 말에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아몬이 어찌나 의젓한지.
그 모습이 대견한 한편으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을 텐데, 저리 티도 내지 않고 웃어준다.
아몬과는 매일 얼굴을 마주 보며 식사하고 가끔은 산책도 즐기며 꽤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자주 봐서 그럴까, 벌써 정이 들어 버렸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입을 열면 나오는 말도 얼마나 고운지.’
이런 아이한테 정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고마워. 그럼 저녁 맛있게 먹고, 내일 아침은 평소처럼 같이 먹자.”
“네. 언제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누나.”
“감사는.”
말투만 보면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 꼬마 신사가 따로 없어, 아주.
귀족가 아이들은 보통 집에서도 이런 걸까, 아니면 아몬이 유독 예의를 차리는 걸까.
아몬의 작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보았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앞머리를 살짝 넘기며 쓰다듬었다.
내 손도 그리 큰 편은 아닌데 그보다 더 작은 아몬의 얼굴은 한 손으로 다 가려질 만큼 조막만 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누나 먼저 일어날게. 내일 보자.”
“좋은 저녁 되세요.”
“그래, 너도.”
방을 나서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옅게 웃어 주기에 반사적으로 마주 웃어 보이고는 다시 발을 뗐다.
막냇동생을 혼자 집에 내버려 두고 외식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묘한 죄책감이 스며들어왔다.
식당으로 내려와 기다린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르반과 공작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찍 나온다고 나온 거였는데 좀만 더 늦장 부렸으면 꼼짝없이 지각할 뻔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아르반에게 인사했다.
“열흘 만에 뵙네요, 각하. 그간 잘 지내셨나요?”
“무탈했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로베르 공녀.”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아르반을 눈치껏 찬찬히 뜯어보았다.
앞머리를 반만 넘겨 세팅한 검은 머리칼과 도톰한 입술, 짙은 바다 빛의 눈동자, 그리고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결.
그가 입고 있는 어두운 남색 정장은 제법 맵시가 좋았는데, 이상하게도 옷보다는 그 안에 가려진 다부진 육체가 부각되어 보였다.
음, 보기 좋네.
그의 고혹적인 자태에 괜히 내가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어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저희 쪽에서 감사드려야죠. 두 번이나 걸음 해 주신 만큼 만전을 기해 준비했어요. 이쪽으로….”
“감사합니다.”
아르반과 나는 공작을 뒤에 두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덩그러니 서 있던 공작도 착석했지만 따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알아서 처신하겠지.
지난번에 공작과 말을 섞은 이후, 그와 더욱 가깝게 지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음식은 입에 맞으신가요?”
“예, 훌륭하군요.”
아르반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며 간간이 대꾸만 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듣기 좋은 음성 때문인지 재수 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잘생겨서 그런 걸까?’
내가 이렇게 외모지상주의자였던가, 하는 자괴감이 샘솟았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미인은 항상 옳은 법이다.
그나저나,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는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 정말 미미했다.
이게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어 저런 얼굴인 건지, 아니면 그저 표정만 그러한 척 가장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기분 묘하네.’
저렇게 표정 없는 사람과 단답 일색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으니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로봇과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내 휴대폰이 저 남자보다 더 대답을 잘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음식을 꼭꼭 씹어 넘기며 시선을 그에게 고정했다.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으며 식사를 하니 두 배는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조연에 불과했던 이 남자도 이렇게 잘생겼는데, 남주인 아몬이 성장했을 때는 얼마나 잘생겨질지 벌써 기대가 됐다.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치는 거 아냐?’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아르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시간이 후루룩 흘러가 버렸다. 이럴 수가…!
별다른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손은 딸기 셔벗을 떠서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셔벗을 뒤적이는데,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