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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1화 (11/153)

11화.

***

아몬은 밤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신경은 쓰였지만 어린 애가 이틀 밤을 새웠는데 자연히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래도 혹시나 새벽에 깨어나면 배가 고플까 봐 아몬에게 붙여 준 시종, 릭과 에드가에게 아이가 일어나면 간단하게 수프와 빵을 챙겨주라 이르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는 잠이 덜 깬 와중, 세바니에게 아몬이 언제 일어났는지 웅얼거리며 물어봤다.

그러자 잠시 후, 에드가가 내 방에 찾아왔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가씨.”

“…아직도 잔다고?”

“예. 인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호출용 종도 울리지 않으셔서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일어나신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잠이 확 깬다.

아무리 못 잤다 해도 그렇지… 얼추 시간을 확인하니 꼬박 23시간가량이 지나있었다. 이건 또 이거대로 문제였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거니!

“내가 잠깐 들어가 볼게.”

그대로 일어나 비틀비틀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틀간 날밤을 새우고 하루를 꼬박 잠으로 때우다니…. 너무 많이 자는 거 아냐?’

아니면 애들은 원래 이렇게 못 자면 미친 듯이 몰아 자는데 나만 몰랐다던가, 아니면 역시 주치의한테 보였어야 했나?

놀라운 한편으로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애가 탔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면 바로 주치의를 부르겠다 다짐하며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가 조심히 안쪽을 살펴보았다.

아몬은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임에도 어두운 실내를 밝히기 위해 커튼을 모두 모아서 묶고 창문도 열어 환기시켰다.

예전에 내가 늦잠을 자는 날이면 아빠가 항상 나를 깨우기 전에 이렇게 창문을 열어 찬바람이 들어오게 만들어주곤 했다.

그리고 놀라지 않게 살살 깨워주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그 당시를 회상하며 침대로 다가가 아이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보았다.

그러자 아몬의 눈꺼풀이 움찔하며 감겨 있는 눈동자가 움직였다.

혈색도 괜찮아 보이고, 손도 따뜻했다.

한결 나아진 모습에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안도감에 희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웃는 소리에 아몬의 손이 작게 반응했다.

닫혀 있는 눈꺼풀 아래 감춰진 눈동자 또한 요리조리 굴러다니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요놈, 이제 보니 일어나 있구만.’

근데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건지.

계속 눈을 감고 도록도록 눈동자만 움직이는 아몬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일어나야지, 왜 아직도 누워 있어. 설마 더 자고 싶은 건 아니지?”

오늘은 같이 아침 먹자. 어제 종일 혼자 밥 먹으니까 허전한 거 있지. 사람이 참 웃겨. 전에는 혼자 잘만 먹었는데, 어제는 네가 없어서인지 별로 맛이 없더라.

***

아몬은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던 누님과 눈이 마주쳤다.

‘전부 꿈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몬은 누님의 눈동자를 직시하고서야 비로소 제가 꿈이라 여긴 모든 것들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몬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누님….”

“이런,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어제도 그렇고 자꾸 누님이라고 부르네.”

타박하는 말임에도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아몬의 코끝을 톡 하고 치며 건네는 말에 아몬은 그제야 제가 리엘리를 누님이 아닌 누나라 부르는 것을 허락받았음을 상기해냈다.

“너 꼬박 하루를 잤어. 배고프지 않아? 어디 뻐근한 곳은 없고?”

“네… 큼, 네. 괜찮습니다.”

이토록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적도, 잠을 청했던 적도 없어서일까.

아몬은 목소리를 내는 게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지만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대답해 버렸다.

“자, 물 좀 마셔. 잠 깨면 내려가서 간단하게 수프라도 먹자.”

머리맡에 구비되어 있던 유리잔에 물을 따라 아몬의 손에 쥐여주며, 리엘리는 조금 큰 목소리로 시종을 불러 세숫물을 준비해 달라 요청했다.

아몬은 에드가가 들고 온 세면기에 손을 담그면서도 제 누님이 신경 쓰였다.

‘누님이 기다리고 계신데 태평하게 세수나 하고 있다니….’

죄송스러운 마음에 대강 얼굴을 씻고 누님이 앉아 계신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 옆의 의자에 앉아 아몬을 바라보는 리엘리의 금빛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몬은 제게로 향하고 있는 누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궈 세숫물에 비치는 제 눈동자를 비교해 보았다.

분명 같은 보랏빛의 눈동자임에도 그녀의 것은 아몬에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고아하며 다정한 빛깔.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꿈이라 여겨 가벼운 언동을 행했던 제 과거가 뇌리를 스쳐서, 아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누님께서 편히 하라 말씀하셨더라도 너무 풀어져 있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별것도 아닌데 뭐가 죄송해. 내가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건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아몬에게 다가가며 리엘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예를 차리고 깍듯하게 대하지 않아도 돼.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게 편하면 억지로 말을 놓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가족이잖아.”

당장은 힘들지라도 언젠가는 아이가 자신을 편하게 대했으면 했다.

“…네, 누나가 바라신다면 그렇게 할게요.”

가족. 리엘리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몬은 차오르는 만족감에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아몬은 제 누님에게만큼은 모난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환상과 현실도 구분해 내지 못하는 멍청한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추태는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부족한 자신을 가족이라 칭해주신 누님이 제게 바라는 모든 것을 완벽히 이행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누님이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을 주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 주신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어떤 사치보다 더없이 만족스럽겠지.’

리엘리는 자신이 바란다면 그리하겠다고 말하며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몬을 보고 질겁해 말했다.

“아니! 내 말은 내가 바라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고, 그냥 네가 편하게 날 대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누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에요.’

아몬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리엘리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누나. 이제 식사하러 가요.”

“…그래, 가자.”

아몬은 제 앞에서 걷고 있는 누님이 자신을 배려해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걷는 것을 보고는 더욱더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때로는 현실이 꿈보다 나은 경우도 존재함을, 아몬은 깨닫게 되었다.

고작 이틀 밤을 새운 것뿐이었음에도 제 다정한 누님께서는 매우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식당에 도착해서는 본인의 식사는 뒷전이고, 자신이 수프를 잘 먹는지 연신 확인하며 과일도 직접 건네줄 만큼.

식사하는 내내 누님의 시선은 자신을 따라다녔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누님의 관심이 기껍기만 했다.

아몬은 이토록 벅차오르는 감정을 겪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초라한 제 모습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봐 주시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희망이 고개를 쳐들려 할 만큼, 아몬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 아몬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누님은 자신을 걱정해 줄 것이고, 걱정은 곧 관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하지만 이후로도 아몬은 매일 제 누님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은 금세 기억의 한 켠으로 접혀 들어갔다.

리엘리는 아몬을 위해 사람을 불러 옷을 맞추고, 모자와 신발을 구매했다.

그리고 예고했던 대로 방 안의 모든 가구를 아몬의 신체 사이즈에 알맞은 것들로 바꿔버렸다.

또한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수도에서 알아주는 가정교사들을 대거 초빙해왔다.

아몬은 이제 혼자 책을 보고 익히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짜인 수업 일정에는 또래 아이들보다 활동량이 현저히 적은 아몬의 체력 증진을 위한 수업도 들어가 있었다.

그 수업에서 아몬은 체력이 또래에 비해 좋지 못하지만 운동신경은 아주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엘리는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타고난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먼 미래에는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아르반 카넬로웰 대공의 하나뿐인 제자가 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뭔들 놀라울까.

새삼스러운 사실을 듣고 리엘리는 그저 아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식으로 흘려 말했다.

“아몬, 너 운동신경이 특출나대. 이러다 나중에 네가 제국에서 제일 강한 기사가 되는 거 아냐?”

아닌 게 아니라 훗날 그리될 터였다.

남들이 듣는다면 팔불출이라 손가락질할 만한 말이라도 리엘리는 당당했다.

미래의 아몬은 십 대 중반부터 검을 잡고도 제국에서 최고라 불리는 검사가 된다.

아마 지금부터 훈련에 들어가면 능히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겠지.

하지만 리엘리가 무심코 뱉은 한 마디는 아몬의 머릿속에서 재해석 되어버렸다.

아몬은 리엘리의 칭찬에 매우 민감하고 기민하게 반응했다.

‘누님은 내가 제국 제일의 기사가 되기를 바라시는 거야.’

주어진 모든 교육에 성실히 임해야겠지만, 특히 체력을 빠르게 증진시켜야 한다.

하다못해 목검이라도 휘두를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뇌리에 박혀 버린 아몬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아몬의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교사로 초빙된 기사, 로드릭은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왜소한 체격의 아몬이 무리를 해서 체력을 늘리려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몬은 오직 검을 잡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에 난감한 것은 로드릭이었다. 처음에는 자율적으로 훈련하는 아몬을 흐뭇하게만 바라봤다.

그는 부모의 압박에 의해 억지로 수업을 듣는 귀족가 자제들을 숱하게 겪어왔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아이가 대견하기만 했는데… 아몬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하며 실상을 파악하게 된 그는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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