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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10화 (10/153)

10화.

아니, 귀엽지 않은 건 또 아닌데….

‘얘가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 걸까.’

어제 점심에도 좀 기운이 없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정말 심각해 보였다.

그럼에도 고단한 얼굴의 아몬은 희미하게나마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안녕한데… 잠깐 누나 좀 볼까?”

어째 너는 안녕하지 못한 것 같다?

아이에게 다가가 작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살짝 들어 올렸다.

그에 아몬이 붉게 충혈되어 반쯤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시선을 마주해왔다.

안 그래도 밀가루 반죽처럼 뽀얗던 피부는 한층 더 창백하고 퀭해져 있었다.

마치 며칠 야근에 찌든 직장인 같은 얼굴이다.

…아니, 진짜 얘가 왜 이러지?! 좁은 방을 쓰다가 갑자기 넓은 방으로 옮겨서 잠을 설쳤나?

아무리 더 좋은 환경으로 바꿔줬다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면서 아이한테 좋지 못한 영향을 준 것일까. 침구라도 천천히 바꿨어야 했나.

머릿속에 별의별 가정이 다 스쳐 지나갔다.

아이를 대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내 기준에서 좋은 방향으로 바꿔준 것인데,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했나.

밀려드는 자책감에 표정이 굳어지려는 것을 애써 피며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잠자리가 불편했어? 얼굴이 반쪽이네… 갑자기 방이 너무 커져서 적응하기 힘들었니?”

“아뇨, 아니에요. 방도 너무 좋고, 잠도 잘 자고 있어요….”

“…….”

거짓말. 네 얼굴에 쓰여있다. 피곤해 죽겠다고.

음, 어린아이가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알 턱이 있나, 어린애와 마주해 본 적도 없는데.

애를 다그칠 수도 없고, 다시 잘 타일러봐야 하나. 아니면 정말 잠은 푹 잤는데 어디가 아파서 회복이 안 된 건가.

“정말 잘 잤니, 아몬?”

“…네, 그럼요.”

내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슬쩍 웃어 보이는데, 그 얼굴이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힘들면 억지로 웃어 보이지 않아도 된다. 몇 살이나 먹었다고 어린아이가 어른을 안심시키려 드는지, 원.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꺼내면 가뜩이나 상태도 안 좋아 보이는데 심적 부담만 주는 꼴이 될 것 같아 참았다.

“혹시 어디 아프지는 않고?”

“…저는 정말 괜찮아요, 누님. 아픈 곳도 없고, 누님께서 챙겨주신 우유도 전부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걸요.”

당황했구나. 다시 누님이라 부르네.

아몬은 의연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기에 세차게 흔들리는 동공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럼 주치의를 불러야겠다. 미안하지만 아몬, 누가 봐도 너 지금 상당히 안 좋아 보여. 그런데 아프지도 않다니, 그게 더 심각한 일이야. 에바, 주치의 좀 불러와 줄래?”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치의를 찾자 에바는 곧장 고개를 꾸벅이고는 식당을 나서려 했다.

아몬은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함을 숨기지 못한 채 내 소매를 붙잡아 왔다.

“아니, 아니에요! 누님. 저 정말로 아프지 않아요. 사실… 조금, 조금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이제는 불안과 초조함이 표정에도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무엇이 아이를 이토록 불안에 떨게 만들었을까.

나는 에바에게 손짓해 다시 대기시킨 뒤 여전히 내 소매를 꼭 붙들고 있는 아몬의 손을 떼어내 손안에 쥐었다.

작은 손은 불안감 때문인지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서늘하고 축축했다.

“그래, 아무래도 좀 더 자고 식사는 나중에 하는 편이 좋겠다. 올라가자.”

“…….”

아몬은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맞잡은 작은 손이 내 체온으로 인해 아까보다 따뜻해질 때쯤 방에 도착했다.

나는 곧장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아몬은 침대에 누워 나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방이 바뀌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란 생각을 못 했어. 그래도 다시 그 창고 방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조금만 참아줄래?”

“…방은 좋아요. 익숙하지 못해서 잠을 설친 것도 아니고요.”

“방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럼 왜 잠을 잘 못 잤을까. 혹시 너무 넓어서 무섭니? 그런 거라면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넓은 방이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무섭지는 않아요.”

대답하면서도 아이의 눈은 반 이상 감겨 있었고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억지로 잠들지 않고 버티려는지 눈을 심하게 깜빡인다.

아니… 얘가 잠을 자라고 눕혀 놨더니 안 자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네.

“졸리면 그냥 자. 더 말 안 걸게.”

“…안 졸려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누님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요.”

“벌써 눈이 반은 감겼는데?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침대에 걸터앉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겨 주며 작게 속삭였다.

아몬은 그런 나를 올려다보며 여전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누님, 저 때문에 식사도 못 하시고 죄송해요. 그리고….”

아몬은 내게 말을 걸어야 하는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억지로 말을 이으려 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냐, 배도 안 고팠어. 음… 자라고 눕혀 놨는데 나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것 같네. 나가 있을까? 역시 그쪽이 더 편하겠지.”

생각해보니 이 몸이 원래 아몬 누나였기는 해도 불과 며칠 전까지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런데 고작 며칠 가깝게 지냈다고 갑자기 편하게 느껴질 턱이 없었다.

옆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피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아몬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왔다.

작은 손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서늘하고 축축했다.

나는 작게 눈매를 좁혔다. 아몬에게 잡힌 팔로부터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아이의 창백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끝내 흐르지는 않았다.

제 감정을 삭이는 게 너무도 익숙하게만 보이는 그 모습이 나를 애달프게 만들었다.

아몬은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결국 결심이 섰는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사실은 잠들고 싶지 않아요.”

아직 내 손목에 머무는 작은 손을 떼어내 맞잡아주었다. 그렇게 손을 잡고 아이의 말을 경청했다.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가능하면 오래… 오래 누님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잠이 들면 역시 모두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잠들고 싶지 않았어요.”

“…….”

내가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목이 메어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을 꾸는 것 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인가.

이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그저 안타깝고, 또 화가 났다.

널 이렇게 내버려 둔 공작과 본래의 리엘리에게.

그리고 네가 이렇게까지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내면에서 뒤엉키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의도치 않게 가라앉은 음성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몬,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제오늘 한숨도 안 잤니?”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잔뜩 굳어졌을 내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아몬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지금이, 꿈속이라서. 잠이 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까 봐?”

“…네, 잠이 들지 않으면… 누님이 저를… 바라봐 주시는 이곳에… 계속… 계속…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대체 얼마나 현실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야 이런 발상이 가능한 걸까, 짐작도 되지 않는다.

얼마나 누나의… 아니, 가족의 관심을 바랐으면.

“난 널 외면할 생각이 없어, 아몬. 이제부터는 네가 싫다고 하더라도 난 너한테 간섭을 할 거야.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항상 네 보호자로서 옆에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네가 편히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잠이든 아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수면 부족으로 제정신이 아닌 아이의 상태를 알고 있지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지금껏 이런 사소한 관심조차 받아 본 적이 없었겠지.

고작해야 방을 바꿔주고, 식사를 함께하는 정도의, 누구나 베풀 수 있는 호의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릴 만큼.

잠든 아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방 앞에 대기하던 아몬의 시종, 에드가 베르크에게 말했다.

“아몬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고, 깨어나면 나한테 바로 보고해.”

“예, 아가씨.”

그대로 맞은편의 내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 팔로 눈을 가렸다.

“…진짜, 후….”

도대체 쟤가 잘못한 게 뭔데? 그런 거 없잖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울화가 치밀어 올라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하다 못해 똘똘해 보이는 아이.

하지만 그 내면을 파헤쳐 보면 속이 죄다 곪아 있다는 것을, 이제야 뼈저리게 절감했다.

가장 중요한 유년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자라난 아이였다.

제대로 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홀로 훌쩍 커버린.

난 아몬과 같은 환경에서 지내본 적이 없으니, 감히 그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이의 속이 다 곪아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 아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지금과 비슷한 수준이겠지.

앞날이 생각보다 훨씬 깜깜했다.

그렇지만 이미 아몬은 내 책임하에 들어와 있었다.

예상보다 막중한 한 아이에 대한 책임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무게로 인해 마음을 더 단단히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뭘 어쩌냐. 전혀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냥 최선을 다해야지.”

공작을 대신해 내가 더 관심 가져 주고, 칭찬도 해주고, 예뻐해 주자.

내가 스스로 아몬의 옆에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기로 결심했으니, 그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게 보호자로서의 내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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