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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9화 (9/153)

9화.

“…네게 손대고 싶지 않아.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어야 해….”

공작은 내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리리, 아빠를 떠나려 하지 말렴.”

그는 내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간절한 어조로 애원했다.

공작의 얼굴에 여태 보지 못했던 서글프고 간절한 바람이 묻어났다.

“…….”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버리고 가려는 부모에게 매달리는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그 모습이 조금 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공작의 얼굴과 대비되어 내게 기묘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돈이라면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다 써도 좋단다. …그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아낄 필요 없어. 다만 네 엄마가 남긴 유산은, 아빠가 보관하고 싶구나.”

그는 조금 진정된 듯, 본래의 온화한 낯으로 돌아와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게 특별한 물건이 아니잖아요. 아버지의 재산이나,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이나….”

그녀가 남긴 유산은 그저 돈이었다. 한때 타국의 왕녀였기에 보유하고 있던 액수가 좀 클 뿐인.

하지만 공작에게는 달랐나 보다. 그는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리리! 아무리 너라도 세리나가 남긴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 그것까지는 용납할 수 없구나.”

공작의 태도 변화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급격했다.

내가 당황해 침묵하자 다시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웃어 보였다.

“소리 질러 미안하구나. 하지만 리리. 네 엄마의, 세리나의 것이잖니… 응? 세리나가 남긴 것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지 말거라.”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뗐다가 도로 다물었다.

공작의 모습이 누가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왜 그렇게까지 아몬을 바라보지 않냐고, 이제는 공작부인의 죽음을 받아들일 만도 하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저렇게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한테 더 얘기한들, 무슨 답이 나오겠어.’

공작은 처음 나를 맞이할 때와 같은 낯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극심한 감정 변화를 목도한 내게는 그 모습이 괴이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공작의 손끝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제 손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긁어댔는지, 마치 누군가 난도질이라도 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제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건지, 손끝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보다 못해 몸을 일으켜 공작의 손을 잡아챘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그만 하세요.”

나는 공작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몸을 일으키며 선수를 쳤다.

“…먼저 일어날게요. 손은, 치료받으시고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왔다.

공작의 집무실에 오기 전까지 나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우선 공작에게 아몬의 양육비를 내줄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고, 거절하면 공작부인의 유산을 상속받아 나가 살기로.

씀씀이만 조심하면 둘이 먹고살기에 지장이 없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불편한 공작의 곁을 벗어나 당장이라도 따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작은 리엘리와 아몬의 아버지였다.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공작을 완전히 등지는 건 여러모로 걸리는 사항이 많았다.

어찌 보면 잘 해결되었다 볼 수도 있다. 분가하지 않고도 아몬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하지만 그 외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일단, 공작은 아직도 사망한 공작부인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발작하는 듯한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가장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공작이 리엘리를 제 후계자로 여기고 있다는 거지.’

사실 이 부분이 가장 미스터리였다.

아끼는 자식이니 작위를 물려줄 생각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 가는 사항이었다.

다만 그 후계자가 타국 귀족과 결혼해 이민을 간다면, 그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보아하니 공작은 리엘리를 타국에 시집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머리 아프네… 정말.”

뭐 하나 속 시원한 게 없다. 아몬의 문제도 솔직히 더 물고 늘어져 따지고 싶었다.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다 써라’라니.

돈이 그렇게 많다면 애초에 그놈의 돈이라도 줄 것이지.

예상외의 반응에 더 뭐라 하지도 못해 내 속만 터져나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리엘리. 네 가족은 아버지나 동생이나, 멀쩡한 사람이 없구나.

공작과의 대화 후, 심적으로 너무 피곤해져 입맛이 싹 가셔버렸다.

잠시 누워 있다 밥 먹기는 싫어도 애 얼굴은 봐야지, 하는 마음에 꾸역꾸역 식당으로 내려갔다.

간단하게 차 한 잔과 과일만 입에 넣으며 아몬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런데 나도 나지만 어째 아몬도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아몬, 많이 피곤하면 올라가서 일찍 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몬은 근심이 배어나는 내 목소리에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여간 기운 없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 계속 신경이 쓰여서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기 전에 아몬의 방으로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꿀을 타서 올려보내라 일러두었다.

마시고 피곤이 가시도록 푹 잤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방에 돌아오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참 고단한 하루였다.

***

다음 날, 나를 깨운 건 낯설지만 발랄한 음성의 소유자들이었다.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창문 열어드릴까요?”

“…….”

맞다. 너희가 오늘부터 내 전속 시녀로 일하기로 했었지.

비몽사몽한 상태로 들리는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명랑해서 다소 위화감이 느껴졌다.

“…응, 창문 열어줘.”

아침저녁으로 날이 쌀쌀했지만 잠이 깨려면 조금 추운 편이 낫다.

침대에 앉아 눈을 비비고 있으니 세숫물이 담긴 세면기가 들이 밀어졌다.

바람을 맞고 세수를 하니 몸은 좀 추웠지만 잠은 확실하게 달아났다. 그대로 보드라운 수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가 들었다.

“…….”

눈앞에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저 이걸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제는 분명 얘네 머리 모양이 달랐는데, 왜 오늘은 같은 거지?’

심지어 옷도 비슷했다.

너희는 진짜 너무 똑같이 생겨서 뭐라도 다른 부분이 있어야 구분할 수 있다고…!

물론 지금 당장 시킬 일이 있거나 둘을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함께 생활할 사이인데 누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에바…?”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둘을 보며 조심스레 에바를 불렀다.

그러자 왼쪽에 서 있던 에바가 힘차게 대답했다.

“네, 아가씨! 바로 환복을 도와드릴까요? 아니면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세요?”

과도한 열정으로 빛나는 다홍빛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사실 그냥 한 번 불러 봤어, 라고 말하면 실망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옷은 내가 알아서 갈아입을 거라 딱히 누구의 도움은 필요 없는데, 어쩌나….

저렇게 기대하며 바라보는 둘을 보니 무엇이라도 일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옷은 내가 직접 갈아입을게. 음, 뭘 입을지만 같이 골라줄래?”

“네. 성심성의껏 골라드릴게요, 아가씨!”

“…저도 열심히 고를게요!”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하자 쌍둥이는 곧장 나를 이끌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너희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구나…!

어영부영 둘이 골라오는 옷 중에 편해 보이는 것으로 아무거나 입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을 때, 액세서리를 모아놓은 보석함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얘들아, 잠깐 이쪽으로 와볼래?”

머리 모양이나 옷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 둘을 구분하기 위해 매일 둘이 서로 다른 옷과 머리 모양을 하고 다니라 명령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용주가 옷과 머리 모양까지 태클 걸고넘어지면 얼마나 스트레스받겠어.’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할 텐데, 이상한 갑질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 몸에 지닐 수 있는 물건을 선물하기로 했다.

옷에 달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주면 그래도 성의를 봐서 착용해 주겠지.

마침 오늘 꿈에서 보았던 기억은 얼마 전 리엘리가 액세서리를 정리하던 날이었다.

리엘리는 제 물건을 직접 정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적당한 물건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졸졸 따라 들어오는 쌍둥이의 앞에 커다란 보석함 하나를 내려놓았다.

“너희한테 줄 게 있어.”

말하며 동시에 함을 열었다.

큼직한 크기의 함에는 브로치가 한가득 들어차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

“브로치를 골라드릴까요?”

의문에 찬 두 쌍의 다홍빛 눈동자를 뒤로한 채 신중하게 브로치를 살폈다.

어차피 나는 액세서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사용할 일도 없는 물건을 썩히는 것보다는 선물이라도 해서 누군가 사용하는 편이 좋겠지.

빠르게 요리조리 살펴보며 쌍둥이에게 어울릴만한 브로치를 가늠해 보는데 적당한 게 눈에 띄었다.

한눈에 보아도 둘에게 잘 어울릴 법한 색상이다.

“세바니.”

“네, 아가씨.”

“자, 이거 줄게.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주는 거야. 에바도 받아.”

세바니의 눈동자 색보다 조금 더 진한 빛의 루비가 박혀 있는 브로치를 손에 쥐여주고 에바의 손에는 노란빛의 토파즈가 주를 이루는 브로치를 올려주었다.

붉은색과 노란색 모두 그녀들과 잘 매치되어 보였다.

나는 만족감에 씩 미소 지었다.

“아, 아가씨…!”

“정말… 주시는 거예요?”

“그럼.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리엘리가 소유하던 브로치이니 사실 그 값어치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너무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에든 브로치와 나를 번갈아 보기 바빴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마저 똑 닮아 있어 귀여웠다. 다소 정신 사납긴 했지만.

“자주 사용해 주면 고마울 것 같아. 자, 이제 다시 내 옷 좀 골라줘.”

둘에게 말하며 보석함을 닫아 제자리에 두고 자리를 옮기자, 에바와 세바니는 결국 브로치를 손에 꼭 쥐고 나를 따랐다.

“아가씨…! 정말 감사해요. 저희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실 줄 몰랐어요….”

“저도요, 아가씨. 이렇게 뜻깊은 선물을 주시다니… 너무 감사드려요.”

“응, 그래….”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못 본 척 다시 옷을 고르는 시늉을 했다.

이 쌍둥이.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편인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브로치 하나에 감동해서 저리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면….

앞으로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찌어찌 아무 옷이나 골라 입고 쌍둥이를 뒤에 매단 채 아몬과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도 나보다 먼저 와서 귀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아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

내 예상처럼 아몬은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귀여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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