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5화 (5/153)

5화.

아몬은 방을 나서는 리엘리의 뒷모습이 방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홀로 남겨진 아몬은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이 닿았던 부분에 살짝 겹쳐 보았다.

역시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다디단 꿈속이라는 가정에 한층 더 무게가 실렸다.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비로소 다시 현실로 돌아갈, 그런 허황된 환상.

그러나 아몬은 이 환상 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잠들지 않으면 꿈에서 깨어날 일도 없겠지.’

만약 꿈이 아니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꿈이라면 조금 더 이 행복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

나는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그며 천장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리엘리가 되고 나서 누군가와 아침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혼자 먹는데 식당까지 가는 것이 번거로워 아침은 방에서 간단하게 때웠었는데….

‘이제 아침도 시간 맞춰 챙겨 먹어야겠네.’

아몬이 기다리지 않게 하려면.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시녀들은 바꾸는 게 좋겠어.”

에이미와 카렌. 원래의 리엘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했던 두 사람이니만큼, 이 몸에 들어왔을 때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고히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는 역시….

주인인 내가 아몬을 무시하는 발언을 흘렸다 해도 거기에 즉각 동조하는 사용인이라니.

‘시녀라 해도 귀족가 여식들이라 그런가?’

태세 전환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시녀는 하녀와 달리 귀족들로만 이루어진 고급인력들이다. 주로 하급 귀족이 많은데 에이미와 카렌도 이에 해당했다.

내가 아몬을 없는 사람 취급하니 곧장 동조해 오던 카렌과 장단 맞춰 웃던 에이미.

물론 내가 말실수를 한 잘못이 컸다.

당황한 나머지 아이 앞에서 꺼내면 안 될 발언을 해버렸고, 그녀들은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며칠간 내 옆에서 웃으며 사근사근 굴던 모습과 대비되어,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솔직히 좀 충격이기도 했고.’

그런 사람들이 항시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거북하게 느껴졌다.

에이미와 카렌을 대신할 시녀들을 새로 뽑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 이런….”

씻다가 생각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빨리 내려가야 하는데…!

***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누님.”

“좋은 아침, 아몬. 잘 잤어?”

내가 급히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해 있던 아몬이 일어나 인사를 건네 왔다.

시녀장을 불러 저택에 근무하는 시녀들의 리스트를 준비하라 이르고 바로 내려온 건데, 이 작은 아이가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구나. 반성해야겠다.

“네, 누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아몬의 맞은편에 착석하니 내게 사르르 웃으며 말하는 아이의 모습이 솔직히… 귀여웠다, 젠장.

무심코 헤벌쭉 웃어버릴 것 같아서 볼 안쪽을 깨물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분명 애들은 안 좋아하고 관심도 전혀 없었는데, 쟤는 이제부터 내 동생이라는 생각이 박혀서 그런지 자꾸 눈길이 갔다.

참, 알아보니 아몬은 이제 아홉 살이라고 한다.

‘아홉 살이라니….’

저 말을 전해 듣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이가 많아 순간 머리가 띵했었다.

얼마나 영양 섭취를 못 하고 자랐으면 아홉 살 아이가 일곱 살도 안 돼 보인단 말인가. 새삼 또 가여워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또래보다 현저히 작은 아이가 원작에서는 훌쩍 커져 장신이 된다니….

‘지금부터 잘 먹이면 더 쑥쑥 자랄 수 있겠지?’

뭐… 일곱 살이든, 아홉 살이든. 내 기준에서는 한참 어린아이라는 것은 동일한 사항이었다.

어제 아몬의 방을 나와 잠이 들기 전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이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하나뿐인 아버지가 제구실을 못 하니 나라도 아몬의 보호자로서 부족함 없이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에.

‘하지만 내가 애들을 챙겨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친절하게 잘 대해줄 수 있을지부터 걱정되었다.

나도 참 단순하다.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은 또 아몬이 마냥 예뻐 보인다.

그렇게 혼자 생각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침묵이 길어져 버렸다.

순간 아차 싶었던 나는 재빨리 밝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침 먹는 건 처음이라고 했던가? 우선 조금씩 먹는 습관을 들이고, 익숙해지면 양을 늘려보자. 아침은 많이 먹어두는 편이 좋아.”

“네, 노력하겠습니다. 누님.”

아몬의 진지한 대답에 내 표정이 오묘해졌다.

…밥 먹는 게 노력까지 해야 할 일이야?

“아냐, 별로 노력하라고 말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먹어.”

“네, 누님.”

“그리고… 그 호칭. 우리가 그래도 가족인데 딱딱하게 누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말도 좀 편하게 하고.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어. 집에서는 원래 편하게 있는 거야.”

이런 작은 애가 꼬박꼬박 누님, 누님, 거리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무슨 조폭 누님이라도 된 것 같잖아.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아몬은 누나라는 단어를 입에서 곱씹어 보듯이 중얼거렸다.

“…누나, 네, 누나라고, 부르겠습니다.”

“말은 한 번에 놓기 불편하면 천천히 하자. 시간은 많으니까, 응?”

그러니까 그렇게 촉촉한 눈망울로 보지는 말아주라….

애를 방치하고 이렇게 아이답지 않은 아이로 만든 이는 원래의 리엘리와 공작인데, 내 양심이 아파야 한다니…! 억울했다.

“…네, 누님. 아니, 누나.”

아몬이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로 내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감조차 잘 잡히지 않지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응, 어서 먹자.”

“네, 누나.”

아몬은 앞에 세팅되어 있는 작은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

아침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정원을 거닐었다.

그러다 잠시 앉아서 쉰다는 게 졸음이 몰려와 그대로 정원 벤치에서 졸고 있는데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시녀장이었다. 그녀는 잘 정리된 서류를 내게 건네 왔다.

“아가씨, 말씀하셨던 리스트를 준비해 왔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 달라고 말은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네.

“고마워, 아침에 말했던 건?”

“함께 정리해 두었습니다.”

어제 잠이 들기 직전, 문득 아몬에게 시종을 붙여줘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시녀장에게 후보 목록을 뽑아 달라고 말해두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식사 전, 내 새로운 전속 시녀를 들이기 위해 공작가의 모든 시녀 목록도 함께 부탁했는데 일 처리가 정말 빨랐다.

나는 받아든 리스트를 빠르게 훑어내리며 대략적인 프로필을 파악했다.

그러자 단번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베르크 백작가의 삼남으로 시종이 된 지는 불과 반년.

“에드가 베르크.”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에드가는 원작이 시작할 때부터 아몬의 보좌관으로 등장한다.

그는 여주 르미엘에게서 병으로 떠나보낸 제 누나의 모습을 겹쳐 본다.

그냥 머리 색이 같다는 이유가 전부였지만 하여튼 그 때문에 여주를 돕고자 사서 고생하게 되는데….

‘원작이 워낙 꿈도 희망도 뭣도 없는 소설이니만큼 르미엘의 피폐함에 보탬만 되는 역할이지.’

에드가는 후에 르미엘이 공작저에서 도망가는 것을 돕는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도주에 실패.

이후 지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게 되는 비운의 남자였다.

“그 아이는 최근에 들어온 아이인데, 머리가 아주 좋습니다.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필요한 교육을 모두 이수하였고 모자람은 없다 판단하여 도련님의 시종 후보에 포함시켰습니다.”

내가 에드가 베르크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시녀장이 설명을 덧붙여왔다.

에드가라면 원작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만큼 이미 검증된 인재였다.

“흠…. 에드가랑 한 명 정도 더 뽑고 싶은데. 추천할 만한 사람은 없어?”

“릭 데바로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공작저에서 일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전에 근무했던 후작가에서 추천장을 받고 들어온 아이입니다.”

“오, 그래?”

“예. 후작가에서도 둘째 도련님의 전속 시종으로 일했던 아이라 부족함은 없을 듯합니다.”

내가 물어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시녀장의 입에서는 거침없이 릭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 애로 하자. 에드가랑 릭은 아몬에게 붙여 주고, 난 이 애들을 좀 만나보고 싶은데.”

리스트의 가장 뒷장에 꽂혀 있던 서류를 뽑아 시녀장에게 건네주었다.

서류를 건네받은 시녀장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무래도 내 선택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이 아이들은 아직 아가씨를 모시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모든 시녀의 명단을 준비하라 명하셔서 리스트에는 포함시켰습니다만….”

“알아. 거기 이력 정리해 둔 거 대충 봤어. 내가 뭐 대단한 일 시킬 것도 아니고 잔심부름 정도만 할 수 있으면 되니까, 일단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바로 올려보내면 될까요?”

“응. 지금 들어가 볼 거니까 바로 올라오라고 해.”

“예, 올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고른 시녀들은 리스트의 맨 뒤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파릇파릇한 신참 쌍둥이였다.

쌍둥이라 더 눈이 갔던 것이 사실이지만, 가장 중요하게 봤던 건 이 공작가에서 얼마나 근무를 해왔는지다.

이 쌍둥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공작가에서 근무한 지는 이제 겨우 2개월.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물들지 않았고, 원래의 리엘리를 모르는 이들과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