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아몬은 이 저택에서 가장 자신과 마주치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누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누님을 뵈었던 것이 작년 겨울이었다.
누님과 마주치는 것은 아몬에게 있어 흔치 않은 일 중 하나였다.
‘누님은 항상 나를 피해 다니시니까….’
아몬이 세 살이 되던 해, 유모가 저택을 나가게 되었던 날.
그날 로베르 공작의 명에 의해 방을 옮긴 이후, 아몬은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삶을 연명해오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누님의 맞은편 방을 사용하였기에 종종 마주쳤지만 이제는 거리가 멀뿐더러 죽은 듯이 존재해야 했기에 감히 먼저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님과 마주치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 겨울, 누님과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날을 기점으로 깨달았다. 누님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계셨다는 것을.
우연히 복도에서 누님과 마주쳤던 그때, 자신과 눈이 마주친 누님이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시는 것을 보고서야.
‘멍청하게도. 누님께서 아둔한 내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질려 하셨을까.’
그날 이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처음 마주한 것이었다.
아니, 마주친 것을 떠나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아몬은 누님이 자신을 찾아왔던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갓난아이였던 아몬을 찾아온 지금보다 작은 모습의 리엘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인 로베르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 손을 뻗어 왔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살의로 번들거리던 공작의 시선과는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조심스레 아몬을 안아 든 그녀의 눈동자에 투명한 물이 고여 들었다.
이윽고 한 방울, 두 방울.
아몬의 볼을 적시며 떨어지던 눈물방울은 점점 굵어지더니 마침내 봇물이 터지듯, 리엘리는 아이를 안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 당시의 아몬은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안고 우는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같이 울먹이고 있었다.
마침내 아몬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 그녀는 그를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게 아몬이 처음 마주한 누님, 리엘리의 모습이었다.
또한 아몬이 제 누님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때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리엘리는 아몬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몬이 어눌하게 말을 시작했을 무렵.
잔뜩 새는 발음으로 불렀던 ‘누아-’라는 말에 그를 내려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한 그녀가 대답이 없어도, 아몬은 꼬박꼬박 제 누님에게 인사를 하고는 했다.
비록 돌아오는 대답은 없을지라도 그녀는 아몬의 누님이며, 유일하게 가족이라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몬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직 어머니의 배 속에 자리하던 시절. 자신을 사랑한다, 만나고 싶다 말하던 누님의 목소리를.
아몬은 누나인 리엘리에게만큼은 기대하는 마음을 품었다.
언젠가 누님께서 나를 돌아봐 주시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 내게 마주 인사를 해주시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좀 더 누님께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된다면….
그때는 나를 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허황된 꿈일 뿐이지만, 그리 기대를 품었던 적이 있었다.
‘누님께서는 그래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으시니까, 내가 노력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마도.
뒷말을 삼키며, 아몬은 애써 그리 생각했었다.
누님이 자신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급히 되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어쩌면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줌뿐이 남지 않은 희망을 놓아버린다면, 제게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누님께서 언젠가 자신을 돌아봐 주셨을 때, 아둔하고 초라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되니까.
다행히 로베르 공작가에는 예법과 관련된 서적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아몬은 그 모든 책을 정독하며 혼자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누님? 나한테 동생이 있었어?”
그리고 그 노력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의 누님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붙여 주었다.
비록 그녀의 시녀가 아몬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며 비웃었지만, 아몬에게 그런 것은 신경 쓸 만한 사항이 되지 못했다.
누님이 자신을 돌아봐 주셨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다만 아직 많이 부족한 모습에 동생으로서 인정받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그건 더 노력하면 돼.’
누님이 드디어 자신을 피하지 않고 봐주셨다. 오직 그 사실이 아몬을 기쁘고 설레게 만들었다.
***
입안에서 살살 녹아 사라지는 고기를 씹으며, 아몬은 순간 엄습해 오는 불안과 두려움에 심장이 덜컹거림을 느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누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제법 그럴듯한 꿈이라 여기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누님이 자신을 찾아오셨던 순간은 마치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제 방은 저택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 곳까지 누님께서 몸소 찾아와 식사를 권하시다니…. 상상 속에서나 그려보던 일이었다.
또 조금 전에는 어땠는가. 누님께서 제 편의를 위해 사용인들에게 직접 명을 내리셨다.
거기다 칼질을 해보지 못해 못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을 다그치는 대신 직접 고기를 썰어주시기까지….
어제부터 아몬에게는 생에 처음 겪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행복감에 불안한 마음이 피어날 만큼.
평생 먹어온 음식 중 가장 훌륭하고 풍족한 식사를 마친 아몬은 제 누님을 따라 3층으로 향했다.
그녀가 아몬을 이끌고 들어간 방은 예전, 유모가 그를 돌봐주던 때에 사용했던 방이었다.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면 돼. 여태까지는 신경 못써줬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창고만도 못한 방에서 지내게 두고 보지는 않을 거야.”
리엘리는 제 뒤에 시립해 있는 시녀들을 슬쩍 돌아보고는 조금 큰 목소리로 아몬에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일부터는 나랑 계속 식사도 같이할 거야. 필요한 물건은 전부 새로 맞출 거고. 공작가의 체면이 있지, 공자가 이렇게 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응?”
리엘리는 시녀 에이미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네, 네. 맞아요. 아가씨.”
에이미는 절절매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엎드려 절받는 꼴이었지만 리엘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베르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자인데 그동안 너무 신경을 못 써줬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에이미?”
“네. 아가씨….”
“그래,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아야지. 에이미, 카렌. 앞으로 아몬에게 공자로서 예를 다하지 않는 자들은 내 귀에 들어오는 즉시 처벌 대상이니까, 다들 알아서 처신하라고 전해.”
서늘한 무표정으로 시녀들에게 통보한 리엘리는 아몬을 데리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아몬은 자신이 사용했을 때와는 많이 바뀐 방을 훑어보았다.
‘예전과 같은 것이 전혀 없어.’
같은 방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어릴 적 그가 지냈을 때는 제대로 된 물건 하나 없던 방이 지금은 커다란 침대와 책장, 소파, 테이블 등의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몬이 방을 살펴보는 사이, 마찬가지로 방을 유심히 돌아보던 리엘리는 아몬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 좋은데 가구가 너무 커. 빨리 가구랑 옷부터 맞춰야겠는데….”
가까운 곳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빼보던 아몬에게 리엘리가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 오는 아몬의 눈높이를 고려해 쪼그려 앉은 리엘리가 입을 열었다.
“아몬, 이제부터는 좀 바빠질 거 같아. 음, 일단 내일은 적당한 시종을 뽑아 줄게. 그동안은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야.”
리엘리는 말하는 중간에 절로 이가 갈리는 것을 꾹 눌러 참고 다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네 몸에 맞는 가구도 새로 맞추고, 입을 만한 옷이랑 신발도 사야겠다.”
또 뭐가 필요한지 생각하던 리엘리는 다른 것들은 생각나는 대로 구입하고, 일단 급한 것들부터 채워 넣기로 했다.
“일단 그 정도만 채워 넣고 다른 건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들이자. 혹시 더 필요한 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하고. 알았지? 이 방 맞은편이 내 방이니까.”
아몬은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며 진지하게 당부하는 누님의 모습에 목이 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공작가의 체면을 위해, 귀족답지 못한 생활을 하는 자신을 알게 된 누님께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이러한 조치를 취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누님이 직접 시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옆에서 함께 듣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누님의 호의가 아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로베르 공작가의 공자를 위함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누님의 관심이었으니까.
“…네, 누님. 명심하겠습니다.”
아몬은 자신의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그가 읽었던 책에서 말하는 귀족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것.
아몬은 누님에게 있어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동생이고 싶었다.
“그래, 푹 쉬고 내일 보자.”
“좋은 밤 보내십시오, 누님”
리엘리는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몬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쓸어준 리엘리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