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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3화 (3/153)

3화.

“…왜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됐어?”

“제가 어느 정도 자라 이제는 유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져,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지?

세 살이면 한참 부모님 손 잡고 아장아장 걸어 다닐 나이 아니던가.

그런 아기한테 이제는 유모가 필요 없으니 떠나보냈다니. 정말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겨우 세 살짜리 애를 방치할 수가 있냐고….”

이를 빠드득 갈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간 이곳에서 지내며 주변 환경도 새로운 몸도 모두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느닷없이 생긴 동생이고, 진짜 내 동생처럼 아껴줄 자신은 솔직히 말해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나라도 이 아이가 사람답게 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본다.

“아가씨,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에이미가 예상외로 발이 빨랐던 모양이다.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은 중년의 여성, 시녀장 미라가 내게 공손히 인사를 올려왔다.

미라는 후에 아몬이 이 저택을 물려받을 때까지도 쭉 시녀장의 자리를 지키며 원작에도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에게 하대하는 상황이 익숙지 않았지만 몇 번 말을 섞다 보니 또 못할 것도 없더라.

‘무엇보다 실수로라도 내가 존대를 하면 가장 이상하게 여길 인물이기도 하니.’

늘 주의하며 말을 높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 시녀장. 내가 오늘 어이없는 꼴을 봐서 말이야. 이 창고만도 못한 방을 아몬이 쓰고 있다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이때의 나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기에 원래의 리엘리가 아몬의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먼저 살피지 못했다.

“그….”

시녀장은 내 뒤에 서 있는 아몬을 바라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몬을 먼저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아몬, 먼저 식당으로 가 있을래? 잠깐 얘기만 하고 따라갈게.”

“네, 누님. 식당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아몬의 작은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침묵했다.

원작에서 시녀장 미라와 그녀의 아들, 총집사장 필은 로베르 공작가의 가신들로,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작중 그들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몬에게 은연중 동정심을 품고 있다 묘사되었다.

또한 둘은 후에 아몬이 강제로 결혼하다시피 해서 데려온 여주, 르미엘을 가엽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주인의 말을 따르는 수동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저런 방을 아몬에게 내어주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짐작 가는 인물은 하나뿐이다.

“아버지야? 아버지가 아몬한테 저런 방을 주셨어?”

“…가주님께서 가장 눈에 띄지 않고, 그저 없는 듯 살아가게 하라는 명하셨다고… 가주님의 수석 보좌관이신 레이먼드 님께서 직전 전달하신 말씀이셨습니다.”

“하…. 그래, 역시 그랬단 말이지.”

사실 이미 정해진 답변이었으나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었다.

내게는 다정하게 원하는 것이 없는지 물어봐 주고 신경 쓰는 모습에 어쩌면 원작에 언급되지 않은 변수가 존재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다.

공작은 리엘리와 아몬을 명백히 차별하고 있다.

아직 어려 원작에서의 미래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몬과 달리 공작은 원작에 언급된 그대로의 인물인 것이다.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걸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나도 참 멍청하구나.

어릴 적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도 또다시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그것도 불과 며칠 전 빙의된 몸의 아버지에게 약간이나마 기대를 품다니.

나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정신을 다시금 끌어올렸다.

그래, 헛된 기대 따위는 집어치우고 현실을 직시하자.

이제부터는 내가 아몬에게 신경을 써줘야 했다. 아이를 이런 식으로 방치하는 인간에게 양육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당장 방부터 옮겨야겠어. 제일 크고 좋은 방으로 준비해줘. 식사하고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비어 있는 방 중 가장 큰 곳은 아가씨 바로 맞은편 방인데, 괜찮으신가요?”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겠어. 아, 그리고 혹시라도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내가 지시했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녀장의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여주고 서둘러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

아몬과의 식사는 공작과 함께했던 식사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공작과의 식사는 내게만 집중되던 시선이 심히 부담스러웠던 데다가 케케묵은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어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반면 지금은 서로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음식을 입에 넣을 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아몬은 식사 예절 역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을 터였다.

나는 곁눈질로 아이를 바라봤다.

분명 사용법도 잘 모를 텐데, 눈앞의 아이는 군더더기 없는 모양새로 애피타이저를 떠먹고 있었다.

“식사 예절도 책으로 배웠어?”

“네, 누님. 대부분의 지식을 책을 통해 습득했습니다.”

가벼운 질문을 던지며 시녀에게 눈짓하자 빠르게 메인 디쉬인 양고기 스테이크를 세팅해주었다.

고기를 자르며 아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뭔가가 눈에 거슬렸다. 뭐지… 아.

아이가 들고 있는 포크와 나이프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포크와 나이프는 모두 은으로 만들어졌기에 한국에서 사용하던 것들보다 훨씬 무거웠고, 사이즈도 큰 편이다.

내가 사용하기에도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저 작은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더더욱 부적절했다.

아몬은 자연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었지만 아까와 달리 다루는 게 다소 어색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수프나 애피타이저 정도는 먹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뼈가 붙어 있는 고기를 자르는 건 전혀 다른 일일 테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심기 불편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포크랑 나이프, 좀 작은 거 없어? 애한테 너무 크잖아.”

내 지적에 대기하던 시녀가 조금 난감한 듯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포크와 나이프는 모두 지금 사용하고 계신 것과 같은 사이즈 밖에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릴 때 쓰던 거라도 있을 거 아냐?”

의아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내 목소리에 시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포크, 나이프, 그 외의 모든 식기류는 주기적으로 교체하여 사용하지 않는 것은 즉시 처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택에 어린 손님이 방문할 일 또한 없었던지라, 현재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그럼 당장 구비해 놔. 공작가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애가 있는 집에… 하.”

“네, 아가씨. 바로 구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긍정의 답을 들었음에도 답답함이 폐부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제 자식 방치하며 키운 공작의 잘못이지, 사용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알고 있지만 화가 났다.

아몬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다.

속에서 열이 났지만 꾸역꾸역 눌러 참았다. 그리고 서툴게 칼질을 하는 아몬의 접시를 내 앞으로 가져와 대신 고기를 썰어주었다.

그 어색해 보이는 칼질을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의 인내심이 내게는 없었다.

그러자 제 접시를 빼앗긴 아몬이 당황한 듯, 두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꼭 쥔 채로 말했다.

“…누님, 제가 하겠습니다. 나이프를 다뤄본 게 처음이라 미흡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그동안은 뭐로 먹었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애를 배려해서 나이프가 필요 없는 요리를 해 먹였을 것 같지는 않아 물었다.

“먹기에 간편한 음식만을 섭취해 와서, 정찬용 나이프를 사용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 정말 이러지 마라. 제발 먹는 거 가지고 그러지 말자.

속으로 간절히 되뇌며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물었다.

“…요 며칠간 뭐 먹었어? 먹었던 거 다 말해봐.”

“아침은 먹지 않고, 어제 점심에는 찐 감자를, 저녁에는 삶은 달걀과 샐러드를 먹었습니다. 그저께 점심은 토마토수프를….”

“아니, 됐어! 그만 말해도 돼. 잘 알겠으니까.”

더 들었다가는 애꿎은 아이 앞에서 화를 낼 것 같아 말을 잘랐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하지만 아이가 놀랐을 것을 염려해 애써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나랑 같이 식사하는 거로 하자. 내일부터는 아침도 챙겨 먹고, 사용하는 방도 옮길 거니까 식사하고 함께 올라가면 될 거야.”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영양실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빼빼 마른 애한테 뭐? 달걀에 샐러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다이어트고, 더 혐오하는 건 강제 다이어트였다.

혼자 분을 삭이며 스테이크를 입에 욱여넣고 씹었지만 분노로 인해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는데 내가 썰어준 고기를 콕 집어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아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동그란 얼굴이 음식을 머금고 우물거리니 더 동글동글해졌다.

그게 너무 귀여워 치밀던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대신 그 볼을 콕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았다.

어린아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 눈에도 이리 예뻐 보이는데, 남들 눈에는 얼마나 더 사랑스럽게 보일까.

‘불쌍한 아몬. 돈 있는 귀족가에서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 뭐 하냐고.’

정작 생활환경은 공작가 사용인들보다 못한 수준인데.

아몬은 공자면서도 공녀인 리엘리와는 흑과 백처럼 완전히 대조되는 삶을 살아왔다.

아마 내가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계속 그 창고 방에서 지내며 원작에서와 같이 자라났겠지.

하지만 내가 아몬의 누나가 된 이상 그런 꼴을 보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보호받아 마땅한 어린아이가 방치되는 꼴을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맛있어?”

“…네, 맛있습니다.”

우물우물. 살짝 상기된 얼굴의 아이가 입에 들어 있는 음식을 모두 씹어 넘기고는 눈을 맞춰 오며 대답했다.

많이 먹어, 아가야. 여태까지 못 먹었던 만큼 앞으로는 내가 많이 먹게 해줄게.

그리고 너희 아빠랑은 언제 날 잡아서 면담 좀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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