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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2화 (2/153)

2화.

“에이미, 잠깐 들어와 볼래?”

“네, 아가씨.”

대기하고 있던 에이미는 내 부름에 조용히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인상도 좋고 마냥 순해 보이는데, 사람은 역시 겉모습만 봐서는 모르나 보다.

“아몬이랑 점심 식사를 함께할까 하는데, 그 아이 방이 어딘지 몰라서. 안내해줄래?”

“네…? 시, 식사요? 아가씨께서 도련님과요…?”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경악에 차 있어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응, 식사. 점심. 같이 먹을 거라고. 방, 어딘지 몰라?”

나는 그녀가 빨리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일부러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아뇨…. 하지만 아가씨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제가 가서 전달해 드리고 올게요.”

“아니, 내가 직접 갈 거니까 안내해줘.”

안절부절못하는 에이미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라는 뜻으로 손수 문까지 열어주었다.

그러자 에이미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알만 굴리다가 내 단호한 표정을 보고 천천히 발을 떼기 시작했다.

고작 동생이랑 밥 한 끼 먹자는 건데, 방 한번 찾아간다고 저런 반응이라니. 벌써 피곤해진다, 어휴….

***

그렇게 아몬의 방에 도착한 나는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말문이 막힌다. 이걸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까.

이미 아몬이 살아온 배경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좋은 방에 살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눈앞에는 내 상상 이상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원작 소설에서 아몬의 독백으로 나오는 과거 회상 장면과, 빙의해 알게 된 현 상황의 간극은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원작 소설에 서술되었던 부분은 내 예상보다 더 많이 축약된, 정말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현실은 원작에 나와 있는 상황보다 고구마밭이라는 거지.’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의 위치였다.

아몬의 방은 주방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식료품 창고로 쓰이던 곳 같았다.

워낙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기에 1층 가장 끝 쪽에 위치해 있고, 바람이 아주 잘 통하는 곳이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문 앞에 잠깐 서 있는 지금도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엄청 춥다는 뜻이다. 어린아이 방이 이렇게 추운 곳이라니….

방의 크기 또한 한순간 숨을 들이켤 정도로 놀라웠다.

‘아니, 이게 방이야? 교도소 독방도 이거보다 크겠다…!’

좁디좁은 공간에 가구라고는 조잡하고 작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삭막한 방이었음에도 내부는 이미 꽉 들어차 있었다.

“…하.”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가 죄수도 아니고….

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방은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개인 물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생활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한테는 그렇게 친절하게 웃어주고 우리 리리라고 예뻐해 줬으면서….’

같은 자식이고, 공자인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던 로베르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니 실망감에 치가 떨려왔다.

한순간이지만 그 다정해 보이는 얼굴에 흔들렸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최소한 평범한 방에서 지낼 줄 알았는데….

치미는 분노를 애써 눌러 삼켰다.

여기서 열 내고 펄펄 뛰어봐야 하등 득 될 것이 없었다. 애한테 겁만 주겠지.

일단 아이랑 대화를 나눠보려 온 건데, 저 방에 들어가자니 서 있을 공간조차 부족해 보였다.

앉으려면 나란히 침대에 앉아서 대화를 해야 할 지경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문 앞에 서서 아몬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 많이 당황했는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동공은 감출 길이 없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찌할까 고민하며 방 같지도 않은 방을 둘러보는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몬, 욕실이 안 보이는데 어디서 씻니?”

내 방에는 욕실은 물론 드레스 룸과 파우더 룸, 티 룸, 개인 응접실, 작은 서재까지 딸려 있었다.

그리고 그중 단 한 곳도 이 방보다 작은 곳은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이 넓어서 공간 낭비라고 생각될 정도였는데, 아몬의 방은 정반대였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본 저택 뒤쪽에 사용인들을 위한 숙소가 있습니다. 그곳 공용 샤워장을 이용해 항상 청결을 유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님”

“…….”

지금 저 애가 말하는 ‘걱정하지 말라’가 그래도 씻을 수 있으니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비록 이곳에 샤워 공간은 없지만 자신은 항상 청결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누님은 불쾌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는 뜻으로 들리는데. 부디 내 착각이면 좋겠다.

“난 그냥… 아니, 이게 아니라. 에이미, 시녀장이나 집사나 아무나 좀 데려와. 내가 찾는다고 전해. 빨리, 지금 당장.”

“네, 네, 아가씨!”

아몬에게 대답해주려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서 일단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에이미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디론가 후다닥 사라졌다.

아, 이제 아몬이랑 나만 남은 건가. 어색해… 의식하니까 더 어색했다.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아몬을 눈만 굴려 살펴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몬은 그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초기의 목적을 상기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몬, 점심 아직 안 먹었지? 사실 식사나 같이하자고 들른 건데 본론이 늦었네.”

내 말에 아몬은 눈을 크게 뜨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식사, 말입니까? 누님께서… 저와 함께?”

“응, 아몬 너랑 나랑.”

애석하게도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래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빙의하며 생겨난 능력 덕분에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었다.

빙의 첫날 잠이 들고 나서 알게 된 능력이었다.

꿈을 꾸게 되면 리엘리 로베르의 과거 기억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데, 꿈속에서 나는 내 몸의 통제권을 잃는 대신 이 몸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당시 기억 속의 리엘리가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조차 선명하게.

하지만 꿈을 통해 경험하는 리엘리의 과거는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쏙쏙 골라서 볼 수 있는 편리한 구조가 아니었다.

빙의 첫날 꾼 꿈에서는 처음 식사 예절을 배웠던 날을, 그 뒤로는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최근의 기억까지 중구난방으로 여러 가지 꿈을 꾸었다.

그리고 오늘 꿈에는 어린 시절, 죽은 공작부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기억을 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진 내 꿈에 아몬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 말인즉, 이곳에서의 먼 훗날 존재하게 될 원작 속의 ‘아몬 로베르’가 아닌, 현재의 아이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실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언제 함께 식사를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우리 같이 식사하는 게… 얼마 만이지?”

내가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질문을 하니, 아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해 왔다.

“…처음이네요. 누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몬의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기대를 품고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어졌다.

…그래, 식사 한번 같이한 적이 없구나.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지만, 아이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아몬의 동그랗고 하얀 뺨이 은은한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꼬리 또한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 모양새가, 마치 아기 천사가 살포시 웃고 있는 듯한 귀여운 형상이다.

‘이런 천사 같은 애가 나중에 여주나 괴롭히는 로판 피폐물의 남주가 된다니….’

정말 세상 말세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이가 귀여운 한편, 겨우 식사 한번 하자는 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이 보여서 안쓰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영광일 것까지 있나, 앞으로는 자주 함께 식사하자.”

“…네, 누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뺨은 여전히 발그레한 끼가 남아 있었지만,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아몬이 나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극존칭을 쓰는 걸까.

‘누가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쳤나?’

이렇게 어린아이가 과도하게 예의를 차리니 거북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아몬, 누가 너한테 예절을 알려줬니?”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분명 원작에서 아몬은 십 대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는 누구보다 잘 교육받고 자라온 공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따로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고, 서재에서 책을 통해 익혔습니다. 역시 많이 부족한가요?”

아몬이 또다시 힐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애가 너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눈치를 본다.

…그러지 마라, 그렇게 눈치 봐가면서 말하지 마. 눈칫밥을 얼마나 먹었으면….

나는 아몬의 말에 황급히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냐! 부족한 게 아니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물어봤어. 책을 보고 혼자 익혔다고?”

가만, 얘 유모가 몇 살까지 이 집에 있었지? 분명 아주 어릴 때 내보내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유모한테 글을 배운 게 맞나?

순간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 글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유모가 알려줬니?”

“네, 제가 어렸을 때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린 것 같은데, 지금보다 어릴 때면 대체 언제란 말인가.

“…네가 몇 살 때 유모가 글을 알려줬는데?”

“세 살 때였습니다. 간단한 단어들을 알려주셨고, 그 뒤로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책을 통해 혼자 익히게 되었습니다.”

벌써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왕 물어본 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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