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절갠_뉴토끼 외 타싸 유출금지. 발견시 제보바랍니다_ㅈㄴㄱㄷ ㅎㅇ]
1화.
내가 리엘리 로베르에게 빙의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신호를 건너다 트럭에 치여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깨질 듯한 두통과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몸이 안정을 찾았을 때, 내가 다른 누군가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곧 현실을 직시했다.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이미 죽어버렸는데 뭐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새 몸에서 살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또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허둥댔지만,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인지라 익숙해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리엘리 로베르는 로베르 공작가의 장녀로 아버지, 루퍼스 로베르 공작에게 사랑받는 딸이었다.
빙의하고 며칠을 혼자 넓은 식당에 덩그러니 앉아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이 집은 가족끼리 정말 정이 없다고 여겼었는데… 이 순간 부로 그 생각을 철회하기로 했다.
이제는 내 생물학적 아버지가 된 로베르 공작과의 첫 저녁 식사 자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지금도 식사 때의 기억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식당에 발을 들이자 모르는 아저씨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무어라 말을 하는데, 솔직히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 아저씨와 함께 테이블에 착석한 후였다.
그렇게 나랑 그 아저씨, 공작이랑 식사를 하는데, 그 와중에 어찌나 다정하게 ‘우리 리리’라고 말을 거는지 정말 체할 것만 같았다.
‘우리 리리’라….
어쩐지 목이 막혀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작의 웃는 얼굴과 ‘우리 리리’라는 호칭을 듣고 있자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공작은 내 진짜 아빠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서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공작의 얼굴에 겹쳐 보이는 낯익은 모습을 애써 지워내며 꾸역꾸역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나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에 적응하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될 듯싶었다.
그렇게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으며 방으로 향하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처럼 진한 갈색 머리칼에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
기껏 해봐야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
그 아이는 나를 발견하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욱 휘둥그레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하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누님.”
그 인사가 정말 아이답지 않게 흠잡을 곳 없이 우아해 보였다.
또한 내게는 정말 당황스러운 만남이기도 했다.
“…누님? 나한테 동생이 있었어?”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황당하고 어이없음이 다분히 드러나는 내 목소리에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리엘리의 전속 시녀인 카렌이었다.
“네, 아가씨. 아몬 공자님께서는 어찌 됐든 일단 아가씨의 동생이시죠.”
카렌이 한껏 비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 옆에 함께 서 있던 시녀 에이미가 대놓고 키득거리며 명백한 비웃음을 흘렸다.
뭐가 뭔지 이해가 안 가서 잠시 침묵하며 상황을 살피려 했다.
그런데 아몬이라는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살짝 웃어 보이며 내게 사과를 건네왔다.
“…죄송합니다, 누님. 누님께서 부족한 저를 동생이라 칭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몬은 다시 한번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때까지도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대체 뭐야?’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는데, 답답하기만 하고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서야 뒤늦게 생각이 났다.
아몬 로베르가 누구인지.
***
아몬 로베르. 아몬은 내가 죽기 전에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새장 속의 푸른 새’의 남주였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몬 로베르가 꿈도 희망도 없는 피폐물 속 남주였다는 것이다.
당시 달달하고 평범한 로판에 질려 있던 나는 색다른 자극을 찾아 한 소설을 접하게 됐다.
그게 바로 사이다 없는 고구마 소설, ‘새장 속의 푸른 새’였다.
저렇게 예의 바르고 멀쩡해 보이는 아이가 커서는 여주 르미엘에게 목을 매며 미친 듯한 집착을 보여준다.
계략을 꾸며 르미엘의 가문을 나락으로 떨어뜨려서 자신과 결혼하게 만들고, 끝내는 그녀를 저택에 감금해 버리는 것이 소설의 초반부 내용이었다.
비록 뒤 내용은 읽지 못한 채 죽어버렸지만 애초에 후기를 먼저 읽고 시작했던 작품인지라 대략적인 전개는 알고 있었다.
‘진정 사이다라고는 전혀 없는, 고구마로 시작해서 고구마로 끝을 맺는 훌륭한 피폐물의 남주로 거듭나게 된다고 했지….’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그다음으로는 짜증이 치솟았다.
“젠장! 바로 죽기 전에 읽었던 소설을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냐고!”
아악!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질렀다.
로베르라는 성이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더라니. 남주의 성이라 익숙한 거였어!
솔직히 아몬이라는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이곳이 소설 속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엘리는 원작에서 비중도 얼마 없는 엑스트라 악역이었으니까.
그냥 남주 아몬의 불행한 과거 회상 장면에서나 그를 외면하고 방치하던 아버지와 누나로 잠깐 등장한다.
더구나 아몬의 누나는 원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외국으로 시집을 가게 되고, 아버지인 공작은 이른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은 작중에 이름조차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런 엑스트라 조연이 되었는데 여기가 소설 속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동생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심지어 같은 집에 살고 있는데?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리고 요 며칠 나한테는 그렇게 상냥하고 예의 바르던 시녀들이 돌변해서 아몬을 비웃던 모습도 내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금 떠올리니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던 모양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부스스한 상태로 세수를 하며 다시 상념에 잠겼다.
사실 아몬 걔가 여주한테는 눈물 나올 만큼 나쁜 놈이지만 과거를 뜯어보면 또 마냥 밉게 보이는 건 아닌, 이른바 사연 있는 나쁜 놈이었다.
아몬이 태어난 로베르 공작가는 부부간의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공작부인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아몬을 낳다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로베르 공작가의 화목은 풍비박산이 나버린다.
부인을 세상의 전부와 같이 사랑하던 공작은 큰 실의에 빠져 절망한다.
술에 취해 모든 일을 뒤로한 채, 그토록 아끼던 딸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공작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과 맞바꿔 태어난 아이가 증오스러웠고, 결국 자신의 아이를 외면해 버린다.
제정신일 때는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며 괴로워했고, 술을 마시고는 주변의 물건을 부수는 등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증오와 분노를 참아내지 못한 공작은 아몬을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려 마음먹었지만, 처음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결국 아몬을 죽이지 못한다.
아몬의 눈동자가 죽은 공작부인과 같은 보랏빛이었기 때문에.
아몬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아이였다.
자신이 태어나며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도,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도, 그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아몬은 공작가의 한구석에 방치되어 혼자 자라게 되는데, 그야말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잔뜩 썩어들어간 상태로 성장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는 그냥 픽션이고 스쳐 지나가는 과거사였기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이게 실존하는 이의, 그것도 이제는 내 동생이 된 아이의 성장 스토리라는 사실이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었다.
짠내 나는 소설 남주의 과거가 현실이 되다니….
애초에 아몬이 삐뚤어진 것도 부모 자격 없는 공작이 아이를 방치하며 키운 게 문제였다고 본다.
“쯧!”
마뜩잖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자 머리를 빗겨주던 시녀가 깜짝 놀라며 사과해왔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많이 아프셨나요?”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이는 전속 시녀, 에이미였다.
어제 아몬을 비웃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더니,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되자 이렇게 태도가 달라진다.
고작 혀 한 번 찼다고 절절매는 꼴이라니. 여기서도 강약약강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니, 신분제 사회니 더 심각하려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짓으로 그녀를 물러나게 했다.
에이미는 웃으며 물러났지만 그 표정에서 언뜻 불안한 마음이 비치고 있었다.
극명한 태도 차이에 입안이 썼다.
솔직히 난 아이를 썩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주변에 아이가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아이를 대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란 내게 참 멀고도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제 본 아몬의 태도가 보통 그 나이대 아이들의 평범한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상식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도대체 어린아이한테 인사를 받은 건지, 아이의 탈을 뒤집어쓴 어른한테 인사를 받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태도였으니까.
아몬은 아주 점잖고, 어른스러웠다.
‘…이게 열 살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나를 발견하고 놀랐던 표정을 순식간에 감추던 아이의 모습은 절대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자를 무시하는 시녀들의 태도.
도대체 이 집에서 아몬이 어느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는 아몬의 세세한 과거사까지 시시콜콜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으니까.
아직 오전이니 아이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며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나는 에이미를 부르려다 잠시 멈칫했다.
어제 에이미와 카렌의 태도로 봐서는 둘 중 누구에게 심부름을 시켜도 영 미덥지 못할 듯싶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가서 말하는 게 낫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