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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화 〉 사기꾼 듀오.(4) (173/173)

〈 173화 〉 사기꾼 듀오.(4)

* * *

레이븐은 첫인상이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살갗을 찔러대는 흉흉한 기백을 뿜어내는 게, 마치 ‘나 아직 안 뒤졌다’라고 알리는 것만 같았다.

니힐리스를 처음 만날 때가 떠오르네.

그 사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니힐리스는 것으로 보기에도 위협적인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테일러는 아니었다는 것 정도?

빌런치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의 정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와 세레나는 얼른 자세를 고쳐잡고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다. 테일러 경께선 너희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니.”

레이븐 옆에 서 있던 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또한 레이븐 못지않은 강자라는 느낌을 풀풀 풍기는 사람이었던 터라, 나는 한층 더 방어적인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아니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물러서.”

나를 뒤로 살짝 밀어낸 세레나가 칼끝을 그에게로 겨누었다.

“세레나 스튜어트.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짐짝까지 달고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라.”

세레나의 머리에 핏발이 서는 게 보였다.

이러면 별로 안 좋은데.

홧김에 뛰쳐 나가기라도 하면 다 같이 좆되는 거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레나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의외로 사고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븐 또한 그만하면 됐다는 듯, 옆에 선 꺽다리를 밀쳐내고 자신이 앞으로 나섰으니까.

“그만하면 됐다. 내 수하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 난 너희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살기조차 거둬들이지 않고 그런 말을 잘도 하네. 그딴 태도로 나오는 데, 누가 순순히 응해줄 거라 생각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안목이 부족한 내 수하의 눈엔 저 아이가 짐짝 같아 보였겠지만, 내겐 확연하게 보이거든. 조금 부족할진 몰라도, 우리에게도 크게 밀리진 않을 녀석이라는 게.”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군. 저 마나프리즘, 알버트의 것보다도 마나 용적이 넓다. 그 말인즉슨, 기량은 떨어질지 몰라도, 순수한 잠재력만큼은 그 어떤 검좌보다도 위라는 뜻.’

레이븐은 박성진이라는 자의 평가를 재빠르게 고쳤다.

잠깐 사이에 모든 걸 판단하긴 이르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자가 얻은 명성이 마냥 부풀려진 것은 아니라는 것은 확인하기엔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당연한 소릴 하고 있네.”

“아무튼,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되었나?”

“음, 뭐, 좋아. 어디 들어나 보자고.”

세레나는 갑자기 밝아진 표정으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칭찬 받은 건 난데, 왜 자기가 더 좋아하는 건지, 원.’

그 이유를 진정으로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까지 일희일비할 일인가 싶었다.

나를 위해 웃어주고, 울어준다는 건 분명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실소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난 너희가 쫓고 있는 적을 죽일 것이다. 나와 뜻을 함께해주어다오.”

“누굴 말씀하시는 건데요.”

“솜니엄리버레이터. 그리고, 너희에겐 명왕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루치니.”

“…이런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날짜와 자리를 따로 마련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벤. 준비해둔 장소로 가지.”

“예.”

나는 ‘내가 뭘 믿고 당신들을 따라가야 하냐’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어느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비슷한 점을 누구 덕에 많이 겪어서 그런가,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 * *

“손님 대접이 형편없어 미안하군.”

“알면 다행이네요. 근데, 그런 이유는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신기해서 말이죠.”

미심쩍은 눈길로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대는 모습이 눈치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벤이라는 사내는 내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먼저 사과를 해왔다.

손님 대접이 형편 없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라 사과는 받았지만.

식사까진 바라지도 않긴 했는데, 그래도 차나 과자 같은 것조차 안 내오는 건 너무 양심 없잖아.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기웃댄 건 다른 이유긴 하지만.

“그럼 뭐 때문에 그렇게 눈알을 굴려대는 거지?”

“이런 비밀 기지 같은 장소는 처음 와보거든요. SF 소설 같고 신기해서.”

“…능구렁이 같은 성격으로 유명하던데, 애는 역시 애로군.”

신기한 걸 신기하다고 하지,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여태 나름 쩌는 인간들을 많이 만나 보긴 했지만, 이런 장소는 처음이라고.

초야에 묻혀 사는 은거 기인, 니힐리스가 머무는 글렌류나크.

신화에 등장하는 무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세레나의 보물전.

외부인들에겐 성소나 다름없는 장소로 치부되는, 미츠루 가의 총본산.

그 외 기타 등등.

제법 많은 장소를 쏘다녔지만, 이런 ‘비밀 기지’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 장소는 처음이니 신기할 수밖에 없잖아.

“이 빨간 버튼, 눌러도 되는 건가요?”

“누르지 마.”

“그럼 이 용액 속에 손 담그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 마라.”

“레버 만지는 건?”

결국, 벤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미친 짓을 하는 데 별 이유는 없다.

그냥, 재밌으니까.

레이븐이라면 모를까, 이 벤이라는 사람한테는 내가 그래도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거든.

거기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세레나까지 데리고 왔지 뭐야.

내 보호자를 자처하는 든든한 사람도 한 명 있으니, 이럴 때 좆같은 놈들 성질머리를 긁어서 사고도 좀 쳐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는 건 사실이었다.

대뜸 날 납치한 놈이나, 맨날 날 납치하는 년이나, 한 번쯤 맥여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니까.

“잘 들어라. 대장께선 널 인정하셨을지 몰라도, 난 네 놈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거, 말이 짧습니다그려.”

“뭐…?”

“아니, 따지고 보면 댁 네 대빵이 찾아온 건 나 아냐. 그럼 내가 레이븐이랑 같은 급에서 대화할 거라는 소리인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냐고.”

“미쳐도 제대로 미친 새끼였군.”

“맞아. 난 미친 새끼지.”

그의 말이 끝나는 즉시, 허공에서 날붙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진작 예상하였던 공격이기에, 피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물건들이 손상될까봐 손대중을 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내 예상보다 너무 수준 미달인데?

고작 이런 실력으로 나한테 허세를 부렸던건가?

“눈치는 빠르군.”

“그다지. 너무 뻔한 공격이었거든.”

“하지만, 역시 애송이에 불과해”

‘숨기고 있던 수는 독이었나!’

놀랐다.

다른 속내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분명 했지만, 그게 이렇게나 강한 독일 거라곤 전혀 몰랐으니까.

얼마나 강력한 마비독인지, 몸이 반사적으로 각성 상태에 돌입했음에도, 벤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게 고작일 지경이었다.

“…더 하실 겁니까. 끗발도 여기까지 같아 보이시는데.”

정말, 정말 아슬아슬하게나마 마나글레이브를 벤의 목덜미에 들이댈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항복하겠다는 듯,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충분하다. 내가 틀렸다.”

“저도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아저씨가 뻗대는 꼬라지 좀 그만보고 싶어서 이런 거지. 여기에 깽판 치러 온 건 아니거든요.”

“패자로서,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되겠나.”

“얼마든지요.”

“내 공격을 예상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지만, 어떻게 그 극독에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던 거지?”

그는 진심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하긴, 믿을 수 없었겠지.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체내에 흐르는 마나를 조절했습니다. 독이 퍼지지 않도록.”

당연하지만, 구라다.

개씹구라.

니힐리스한테 처맞고, 클로에한테 처맞으면서 마나 컨트롤에 눈을 뜬 건 사실이지만, 저 정도 컨트롤은 아직 내게 무리지.

그런데도 내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자색 검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얻은, 특수한 능력 덕이었다.

온도 변화, 독성, 전기, 기타 등등, 흔히 ‘속성’이라고 부르는 공격에 저항을 갖는 능력.

내가 내성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능력 말이다.

뭐, 실체는 이렇지만, 자색 검신의 경지에 이른 인간은 전 세계에 나 하나뿐이니, 벤은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을 터.

“…과연, 니힐리스가 점찍은 제자란 말인가. 내가 어리석었군.”

휴, 먹혀드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솔직히, 많이 놀랐거든.

평소엔 경원시하는 편이긴 해도, 내성이 저런 꼼수를 상대론 거의 무적의 효율을 내는 능력이다 보니, 어느 정도 믿고 깝죽거리는 것도 있었다.

근데, 그 내성조차 씹어버리고 저렇게 강력한 마비를 걸어버릴 줄은.

벤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저렇게 당당하게 나선 거겠지?

지금이야 그 믿음이 벤을 옭아매는 목줄이 되었지만, 나라고 자기 과신에 빠져있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다음부턴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이번에 ‘내성으로도 거의 막히지 않는 능력이 몇 존재한다’는 좋은 사실도 하나 배웠고.

“뭐, 아무튼, 잡다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일단은 댁네 대장이랑 이야기하러 가봅시다. 저희끼리 할 이야기도 끝났으니 말이죠.”

“이런 일이 상당히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군. 그런 담대함은 니힐리스 경에게서 배운 건가?”

“딱히요. 그냥 서로 비슷하니 그런 것뿐입니다.”

“어떤 점이 비슷하다는 거지?”

“어차피 세레나 누나나, 당신네나 다 빌런들이었잖습니까. 나도 댁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히어로’와는 거리가 먼 인간 군상이고요. 말이 잘 통할 것 같아 뵈잖습니까.”

‘벤은 이런 사람이 정녕 니힐리스의 후계자를 자처해도 되는 것인가’라며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원.

사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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