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사기꾼 듀오.(3)
* * *
‘고작 저런 꼬맹이가 내 숙원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거리가 제법 있어 정확하게 구분하긴 어렵지만, 넉넉하게 잡아도 스무 살 남짓이리라.
나이대에 비해선 제법 강한 축에 속해 보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나이대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뿐.
알버트나 오스카 같은 이들처럼 세기에 네댓 명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은 아니었다.
잘 쳐줘 봐야 그들이 유년기일 때의 실력.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아닌가.
아직 서드 어빌리티조차 개화하지 못한 애송이가, 이 모든 일을 끝맺을 능력을 지니고 있다니.
내게 따라붙은 감시자 놈들을 붙잡고 심문도 해보았으나, 그들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 맞다고.
‘그렇다고 직접 확인해보긴 또 곤란한데.’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다만, 그건 조금 어려워 보였다.
하필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는 게 그 미친년이었으니까.
“대장이 머뭇거리시는 건 또 처음 보네요. 박성진이라는 저 꼬맹이가 그렇게 강합니까? 제법 난 놈 같긴 하지만, 너무 과대 평가된 감도 있는 것 같은데요.”
“내 생각도 같다. 명성만큼 대단하진 않은 것 같아.”
“그럼, 뭐 때문에 주저하시는 겁니까? 세레나라는 저 여자 때문에?”
“그래.”
소문은 들어본 적 있었다.
세레나는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라고.
하지만, 그 무력을 보여주었던 적은 단 한 번뿐이라, 코린은 그 위용에 다소 거품이 껴있다고 여겼다.
당연히 테일러도 그리 생각하리라 여겼건만, 막상 테일러는 세레나를 경계하고 있으니, 그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신으로 그리폰 교도소에 쳐들어온 깡은 인정해줄 만 하지만, 그 이외에는 보여준 것도 별로 없잖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예.”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난… 못해도 지금의 나보단 강하다고 생각되거든.”
테일러의 발언에, 코린은 그제야 부랴부랴 세레나를 유심히 살폈다.
설마 자신의 감이 녹슨 것인가 하여.
문제는, 아무리 세레나를 주의 깊게 관찰해보아도, 테일러 이상으로 강해 보이진 않았다는 거다.
결국, 코린은 이전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요. 뭐, 대장은 싸움질에 손을 뗀 지 제법 오래됐으니, 당연히 예전만 한 기량을 뽐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대장만큼 강할 리는 없어요.”
“네 안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세레나는 분명 강하다. 이건 오로지 나의 추측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 오스카나 정호경에 비견될 수준의 강자일 수도 있어. 어디까지나 무력에 한해서지만.”
“…대장의 말은 틀린 적이 없으니, 제 평가를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력에 한해서라는 이야기는 결국, 기교와 머리싸움에선 대장보다 아래라는 이야기인데,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요?”
“박성진이라는 저 꼬마가 제법 잔머리를 잘 굴리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지. 세레나는 단순무식하게 힘만 센 유인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저 녀석이 붙어 있으면 상대하기 곤란해.”
“하긴, 니힐리스 경이 후계자로 점찍은 데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 녀석을 붙잡는 건 이대로 포기합니까?”
테일러는 잠시 턱끝을 어루만지다, 결심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계획을 수정한다. 저 녀석들과 대화를 조금 해봐야겠어.”
* * *
“성진아, 연약한 누나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너는 그렇게 놀고만 있을 거니?”
“누가 연약하다고요?”
“야.”
세레나가 옆에 있던 공예품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무슨 유리에서 저런 소리가 나냐?’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유리 공예품이 깨지며, 와장창하는 소리가 나는 선에서 끝났으리라.
하나, 힘으로라면 누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세레나가 투수였던지라, 벽면에는 오목한 구멍과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저런 사람이 스스로를 연약하다고 부르고 있으니, 나로선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그러다 이 빌라 무너져요!”
“그러니까, 너희 집 무너지는 꼴 보기 싫으면 빨리 누나 짐 옮기는 것 좀 도와줘. 이웃사촌끼리 이러기야?”
“아니, 전 누나가 여기에 이사 온다는 것도 방금 알았다고요. 그리고, 멋대로 이사오겠다고 한 것도 누나인데, 무슨 이웃사촌이에요?”
“너무하네. 나처럼 능력 있고 착한 사람이 이웃이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냐? 게다가, 누나가 바로 옆집이면 널 챙겨줄 수도 있는데.”
“그런 도움 없어도 괜찮다고요…”
댓바람부터 이게 무슨 고생인지, 원.
대체 왜 이 사람은 좋은 자기 집 놔두고 여기에 또 집을 구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세레나가 내게 보이는 관심과 호의를 무시하는 뜻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의미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빌라는 빈말로도 그리 좋은 집이 아니었으니까.
대저택이라 분류할 수 있는 프리실라네 집이나, 아예 동네 전체가 자기 소유나 다름없는 아이나네 장원만은 못하더라도, 세레나네 집도 나름 단독주택치곤 규모가 있는 편이었는데, 굳이 이런 좆같은 곳에 새로 거처를 마련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세레나가 원체 말보단 행동이 앞서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이란 걸 감안해도 말이다.
그녀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굳이 이런 방법보단, 어떻게든 날 유혹하여 자기 집에서 살게 하는 방향으로 갔겠지.
아니, 사실 그 정도면 다행이고, 아예 날 납치해버렸을지도.
아무튼, 뭐가 됐든 간에 어떻게 생각해도 세레나가 내가 사는 빌라로 이사 온 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아휴, 귀찮아. 근데, 이 동네 집값은 왜 이렇게 비싸? 이런 쥐구멍만 한 집이 5만 파운드라는 게 말이 돼? 런던이랑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이건.”
“원래 서울은 집값이 비싼 동네니까요.”
“그럼 내가 얼마나 큰 돈을 썼는지도 알겠네? 이제 나한테 좀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맞아. 그걸 물어보려 했어요.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한국에 집을 산 거예요? 저 때문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그 이유 하나 때문은 아닐 거 아니에요.”
세레나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 이유 때문 맞는데? 앞으로 네가 치고 다닐 사고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딱 붙어 다니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픽하고 죽어버릴 것 같더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아니, 뭐…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지만, 그 사람들은 다 자기 주변에 있으면 안 되냐는 식으로 이야기했거든요. 당연히 누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요. 제일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누나니까.”
“아, 그거? 음… 어, 일단 그거부터 들어줄래? 고마워.”
내가 작은 가구들을 옮기려하자, 세레나는 바로 옆에 있는 옷장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도 힘든 내색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대화를 쭉 이어갔으니까.
“별 이유는 아니야. 어차피 누가 널 붙잡고 있어봤자 넌 어떻게든 도망쳐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들 테니까. 붙잡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걸 알거든. 무엇보다, 나도 너만큼이나 고집이 센 사람이라 그 마음을 잘 알기도 하고.”
“그럼, 이것도 그냥 누나의 고집이란 거죠?”
“그렇지? 어차피 우리 사이는 졸업부터 시작인걸. 당장은 내가 손댈 수도 없고 말이야.”
“네?”
“아, 방금 건 실수. 사심이 조금 들어가 버렸네. 아무튼, 난 후발주자인데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경쟁력도 떨어지는 만큼, 지금이라도 미리미리 너와 너의 나라에 대해 더 많이 알아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이러기로 한 거야. 한동안은 널 지켜주기도 해야 하고.”
‘내가 예상하던 거보다 훨씬 앞서가 있었구나.’
앞으로 세레나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 따윈 관두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졸업 이후엔 너랑 딱 붙어 지낼 거니까 미리 타향 생활에 익숙해지려고 이사왔다’는 말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내 교수라는 사람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난 세레나가 좋거든.
이성 관계로든, 사제 관계로든, 동료 관계로든.
가끔 급발진하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완벽한 여자지.
가르치는 방식은 다소 과격하긴 해도, 은근히 세심하고 배려심 많은 성격이라 배울 점도 많지.
뭣보다 등을 맡겨도 안심이라는 느낌이 가장 컸다.
다른 사람에게선 좀처럼 느끼기 힘든 감정이거든. 이거.
“고마워, 누나.”
“이제야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감사의 의미로, 세레나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아니, 나눴다기보단, 그녀에게 안겼다.
프리실라와 아이나는 체구가 작아 내 품에 쏙 들어오는 느낌이었으나, 세레나는 체격도 크고, 키도 나와 똑같았기에, 나보다 너른 그 풍만한 가슴에 묻히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만 계속 있을 수 있다면 너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말캉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던 새에, 등 뒤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그런 관계인줄 알았다면, 조금 늦게 찾아왔을 텐데, 미안하게 됐네.”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세레나의 표정이 굳어진 게 눈에 보였으니까.
“정식으로 인사하마. 지금은 사라진, ‘회중시계’라는 조직의 수장을 맡았던 테일러 세스다. 너희들에겐 ‘레이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