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사기꾼 듀오?(2)
* * *
“그래서, 어쩌실 생각입니까?”
“우선 레이븐과 접촉해야겠지.”
“예?”
감시자가 우리에게 레이븐의 행방을 알려준 이유가 뭐겠는가.
그놈을 같이 잡자고 그러는 거 아냐.
근데, 반대로 레이븐과 접촉을 하자고?
재밌는 아이디어임은 틀림없었다.
공짜로 날 부려 먹으려던 놈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갈겨줄 방법이긴 했으니까.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문제가 생겼을 땐 당사자와 해결하는 게 가장 좋다는 이야기, 못 들어봤나?”
“말이야 쉽죠. 근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고요. 레이븐이 어디 보통 빌런입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서킷브레이커 교도소’ 출신의 사형수였던 사람이라고요.”
“그게 뭐가 어때서? 자네 교수도 서킷브레이커 교도소 출신인데.”
“에이, 세레나 교수님과는 죄질의 결이 다르잖아요. 형량 차이를 생각해보세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레이븐도 할 말은 많아. 무법지대나 다름없던 그 시대를 미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상력을 깨우치는지 얼마 안 된 1세대 각성자들은 대부분이 그런 놈이었어. 레이븐이 특출나게 나쁜 놈은 아니었다고. 평균적인 수준이었지.”
블레이크는 괜찮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며, 내 등을 툭툭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정말로 그렇게 통제도 안되는 인물이라면, 애초에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거라네.”
“만약에 레이븐이 우릴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올 때를 위한 대비책도 있나요?”
“그래도 30분 정도까진 싸워서 버틸만하다고 보고 있네.”
“누가요. 설마 저를 시키는 건 아니겠죠?”
“내가 그 정도로 양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나? 당연히 아니지. 내가 하는걸세.”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믿었겠지만, 상대가 블레이크다 보니 뭔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나, 블레이크는 싸움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각성자 중 하나기도 했고.
“레이븐을 상대로 30분이나 버티실 수 있는 겁니까? 정말로?”
“고생은 좀 하겠지만, 못할 건 없다네. 자네가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레이븐은 200살도 더 먹은 틀딱 중에서도 상틀딱이야. 나도 젊다기엔 무리가 좀 있는 나이지만, 클로에보다도 더 늙은 사람 상대로 고전할 정도로 쇠퇴하진 않았다고.”
“그래도 어디까지나 예지를 통해 버티는 게 고작일 거 아닙니까. 어떻게 저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요?”
“당연히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누구 말입니까?”
“자네 교수.”
어째 일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만 같은데.
나로선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레나는 제자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니, 부탁하면 도와주기야 당연히 도와주겠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지금보다 복잡해질 테니 말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부터가 이미 도의적으로 할 짓이 아니고.
“세레나 교수님을 부를 만한 명분이 제겐 없는데요.”
“그 부분은 다 생각해두었으니 걱정하지 말게.”
“어째 불안합니다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그래, 자기 나름대로 매뉴얼이 무언가 있는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뛰어난 처세술과 말빨만으로 살아남은 게 블레이크인데.
사실상 이미 결정 난 사안을 뒤엎는 것도 무리였기에, 나는 얼른 화두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알겠습니다. 근데, 이걸로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가 있을까요?”
“현재로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나 다름없지. 천극천제, 레이븐과 하데스의 죽음, 솜니엄리버레이터의 약체화, 코스모스의 와해까지.”
“…도대체 뭘 예상하고 계신 겁니까?”
“그건 천천히 두고 보면 알 테니, 자네는 세레나를 끌어들이는 것에만 신경 쓰게. 사실상 이 계획의 핵심이자 전부야. 레이븐을 상대로 세레나가 잘 버텨주지 못하면 지금 말한 걸 전부 잃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걸 명심하게.”
마음 같아선 당장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계산이 확실한 블레이크 상대로 그런 짓을 해봤자 내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얼른 그 생각을 접었다.
“푸우…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야기는 얼추 끝난 것 같으니, 자네는 얼른 남은 작업이나 마치라고. 일이 아직도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
“일단 밥부터 먹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지.”
* * *
지겨운 업무를 끝마치는 그 즉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블레이크는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잡무들을 내게 더 시키고 싶단 눈치였으나, 나라고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기에, 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얼른 도망친 것이었다.
물론 블레이크도 내 노고를 알고 있었던지라 어딜 도망가느냐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세레나를 잘 설득하란 말은 잊지 않고 내게 전했다.
‘좋은 사람인 건 맞아.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라고.’
세레나랑 같이 있으면 진이 얼마나 빠지는데.
이따금 섬뜩한 소리를 진지하게 내뱉는단 말이야.
‘귀찮은데, 다 때려 부숴 버릴까?’ 같은 거.
물론 그런 점 때문에 말이 잘 통할 때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일단 죽이거나 없애버리고 나서 생각하자’ 식의 사고는 통쾌하게 만들기보단,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때가 더 많았다.
세레나는 그걸 실천하고도 남을 양반이었으니까.
그나마 블레이크가 이야기를 잘해놓았다고 하니, 조금은 사정이 나았지만.
아무튼,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게 우선 이라고 생각한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붉게 타오르는 눈의 테.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삐죽삐죽한 이빨.
두려움이 날 찾아왔다.
“우리 집은 어떻게 또 아셨어요.”
“아카데미 측에다 물어봤지. 박성진 생도 주소지 좀 알려달라고.”
“…우선 들어오시죠.”
문이 열리자, 세레나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의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왜 이렇게 집이 휑해? 있는 게 없네.”
세레나는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냐는 것처럼.
내 집안 꼴이 영 형편없다는 점은 나도 동의하지만, 세레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교수님 아니, 누나가 그런 말할 처지는 아니죠. 누나네 집은 아예 쓰레기장이면서.”
“여기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조차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니? 적어도 내 집에 있는 물건들은 다 쓸모가 있는 물건뿐이라고.”
“그냥 정리하기 싫은 거면서…”
나야 세레나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없으니,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세레나는 정리 정돈을 그다지 잘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
내가 처음 보물전에 들어갔을 때,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무기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걸 보고 얼마나 충격받았는데.
“그럼, 정리하는 김에 누나 집에 있는 물건들 좀 여기다 갖다 놓을까? 분위기도 살릴 겸.”
“아뇨, 아뇨. 괜찮아요. 여기 온 이유나 말씀해주시죠.”
“자꾸 누나한테 섭섭하게 굴 거니? 아니면, 다른 사람들 눈치 보여서 그래? 걱정하지마. 한동안은 우리 둘이서만 움직일 거니까.”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세레나가 막 나가는 성격이라곤 해도, 내 부탁은 그래도 잘 들어주는 편이라, 통제하기 쉬워진다는 점이 있긴 한데…
문제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막 나간다는 점도 있다 보니.
“그런 거 아니에요.”
“아, 빨리 끝내고 누나랑 같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런 거였구나?”
세레나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한동안 맡지 못했던, 그 달콤한 향기가 또 한 번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누나가 여기 온 이유가 뭐겠니? 응? 당연히 널 지켜주려고 그런 거지.”
세레나는 날 번쩍 안아 들고는 보들보들한 살을 마구 문질러댔다.
그 행동도 날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한 행동이었으나, 날 당황케 만든 것은 역시나 그녀의 말이었다.
나를 지키러 온 거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세요?”
“응? 웬일로 네가 이런 일을 또 모르고 있네? 평소엔 어디서 이상한 소문만 듣고도 눈치 빠르게 대처하더니. 정말 몰라? 레이븐이 널 노리고 있는데?”
‘블레이크, 이 미친놈. 세레나를 움직일 수단이라는 게 이거였어? 날 미끼로 레이븐을 꾀어내고, 세레나는 날 지키게 만들고? 이러면 그 감시자 새끼들이랑 네가 다를 게 뭐냐고. 똑같은 놈이잖아. 사실상.’
화가 난 나머지 곧장 휴대전화를 꺼내 블레이크에게 연락을 취하려던 그 때, 블레이크가 내게 보내온 메시지가 하나 남아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 한국으론 잘 돌아갔나?
이 문자를 확인했을 때, 아마 자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겠지. 나도 알아. 자네가 왜 화를 내는지.
계획에 대해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난 자네 성격을 알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거야.
레이븐이 자네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알려주었다면, 아마 자네는 자네가 아는 한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니힐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게 분명하니까.
그렇다고 니힐리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내가 당부한다면, 자네는 분명 불안에 떨었겠지.
세레나가 강하다고 해도, 레이븐 같은 전설과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자네가 그녀를 믿지 않는다고 여기는 건 아닐세. 사람을 믿는 것과 사람의 능력을 믿는 건 다른 이야기일 뿐이라는 거지.
아직 자네는 세레나의 강함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했을 테니, 의심 많은 자네는 말로는 믿는다 해도, 본능적으론 불신을 품을 게 분명하거든.
그럼 자네는 누군가에게 분명 손을 벌리려 했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을걸세.
하지만, 자네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는 세레나가 옆에 달라붙어 있다면, 그럴 틈조차 생길 새도 없다는 걸 확신했기에 이런 선택을 한 거라네.
이제 와 밝혀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해해줄 거라 믿네.
사실 이해해주지 못해도 상관은 없지만 말일세.
내가 아니더라도 세레나가 이해시켜 줄 테니.
블레이크 크루제」
‘이 인간이 진짜.’
블레이크의 비릿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짜증을 낼 새조차 없었다.
“자, 그럼 우리 뭐 하고 놀까?”
공포가 웃었다.
그것은 나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