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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화 〉 사기꾼 듀오.(1) (170/173)

〈 170화 〉 사기꾼 듀오.(1)

* * *

힐다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가지에 매달려 있던 울긋불긋한 잎사귀들은 어느샌가 남아있지 않게 되고, 개어있던 하늘엔 우중충한 구름이 걸려 하얀 쓰레기들을 뿌려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계획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거사를 치르는 데엔 인내와 고난이 따르는 게 당연한 법이라지만, 다른 생도들은 진작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임무를 마치고 자유와 오락거리를 찾아 아카데미를 떠났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던지라 여간 씁쓸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따금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일이 생긴다고 하여도 대부분은 골칫덩이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오늘처럼.

“조금만 쉬면 안 되겠습니까. 블레이크씨.”

“참으라고. 다 자네가 생각 없이 일을 벌여놓은 데에 대한 대가일 뿐이니까. 그러게, 누가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일을 키우기만 하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생리 활동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전부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냐고요. 솔직히, 이것들 전부 지금 당장 처리해도 늦지 않잖습니까.”

“아니, 늦어.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늦었어.”

블레이크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서류만 들여다보았다.

능글맞은 표정으로 농담을 일삼는 그가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사안이 제법 중대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급한 이유라도 좀 알고 하자고요.”

“이유? 이유는 너무나 많지.”

블레이크가 내 쪽으로 의자를 살짝 틀었다.

그리고 초췌하고 퀭해진 그의 안색을 확인한 순간, 나는 징징거린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같이 한배를 탄 몸이라지만, 나 이상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솔직히 말해, 자네 하나의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그렇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야. 자네의 히어로팀 지원? 그건 전화 몇 통이면 끝나. 문제는 자네가 찾고 있는 그 미지의 원석을 구하는 과정이지. 입수하기도 어려운데, 유통 과정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면서 구입자 명의를 세탁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 줄 아나?”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네요.”

“…아니,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잘못도 분명 있긴 한 것 같군. 그럼 뭐가 그렇게 급하단 건지 설명해주도록 하지.”

그는 태블릿을 이리저리 만지작대더니, 몇 장의 화면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레이븐, 불사조, 중재자… 누가 움직여도 골치 아픈 자들이지. 근데, 그런 자들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 화면에 찍힌 사람들이 방금 말한 사람들인가요?”

“그렇다네.”

“누가 누군지 설명 좀 해주시죠. 언젠가는 다 마주치게 될 사람이긴 해도,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습니까.”

“딱히 그렇게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까진 없네. 같이 찍힌 사진은 모두 중재자를 이끄는 유서영과 불사조고, 나머지 사진도 대부분이 그 둘이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찍힌 것뿐이니까.”

“그럼, 레이븐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은 겁니까?”

“아니.”

블레이크는 다른 화면을 모두 치워버리고는, 수백 명의 인파가 찍힌 사진 한 장만을 남겼다.

누가 누군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진이 찍혀, 나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사진이었다.

“이 사람을 잘 보게.”

사진의 한 지점을 아주 크게 확대한 그는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평범하다면 꽤 평범한 인상의 사람이었는데, 굳이 눈에 띄는 점을 꼽으라 하면 중성적인 외모와 푹 눌러쓴 실크햇이 그나마 특징이라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입니까? 레이븐이?”

“확실치는 않네. 다만 그의 가석방이 확실시된 상황이니, 나는 레이븐이라고 보고 있는 거지.”

“이것만 가지고 레이븐이라 생각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엄청 크게 확대해야 간신히 얼굴 윤곽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인데.”

“주변 사람을 자세히 보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바로 앞에 있는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

“레이븐의 능력은 분명 은신이었었죠. 예전 평가에서 모의전 상대로 나와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맞아. 물론 자네가 평가전에서 봤다는 그 가짜 따위와는 급이 다른 수준이지만 말이야. 그저 모습을 흐릿하게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척 자체를 지워버리는 경지에 있으니.”

“이 사진을 보니, 확실히 레이븐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느껴지네요. 여기, 이 남자만 봐도 자기 바로 앞에 사람이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니까.”

“그래, 이제 내가 왜 밤을 지새우면서까지 최대한 일을 빠르게 처리하려 하는지 알겠나?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서 그런 거라네. 이것만으로도 벅찬데, 자네가 힐다라는 새로운 골칫덩이를 들고 왔고.”

마지막 마디가 다소 거슬리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블레이크가 누구던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의 소유자지 않은가.

당연히 내가 찾아올 거란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그에 따라 좋은 방안도 미리 모색해두었을 터.

결코 내 고통을 나누기 위해 블레이크를 찾아온 건 아니었다.

“으흠,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말을 들으니 의문점이 하나 생기는데요.”

“뻔뻔하기는… 말해봐라.”

“그렇게 대단한 은신 능력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사진에 찍힐 수 있었던 겁니까? 고작 카메라 따위에 파훼 될 정도로 보잘것없는 능력의 소유자였다면, 이렇게 위협적인 빌런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을 텐데요.”

“누구긴. 그 성가신 자네 ‘친구들’이지.”

‘친구들이라고?’

이상했다.

내 친구라 한다면 다소 포괄적인 범주긴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친구인 천현우나 알프레드부터, 연인인 아이나와 프리실라, 스승이라 볼 수 있는 니힐리스와 세레나 정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에 관여할 빌미가 전혀 없었던 터라, 이 자료를 제공해준 사람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블레이크의 존재를 알고 있는 클로에 정도를 포함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진조 때와 같이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고선 누군가의 개인사에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클로에일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일까.

“짚이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군.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이 누구겠나? 당연히 ‘감시자’뿐이지.”

그의 대답에 나는 ‘아!’하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이나 다름없는 대양의 눈물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감시자에 대해선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기억나네요. 제가 감시자의 자격을 얻어냈던 게.”

“이제 이해가 되나?”

“어디까지나 일부분만요. 저는 아직 정식으로 감시자의 자격을 따낸 건 아니고, 그저 그들의 물건을 맡아 보관하고 있을 뿐인데, 굳이 절 도와줄 이유는 없어 보이거든요. 특히나, 감시자는 중재자들과 달리 직접적으로 나서는 성격도 아니니, 이렇게 저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이유도 없어 보이고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군. 사람의 본성부터 한번 생각해보게.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도, 경쟁자에 대한 투쟁심 정도는 누구나 갖고 있지 않겠나?”

블레이크는 세운 손날을 자신의 목 쪽에 대고, 사선으로 한 번 그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는 검지와 엄지를 비비적거리고, 오른손으론 가슴팍에 달린 뱃지를 흔들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 지 눈치채는 건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경쟁자를 제거해야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감시자, 그리고 중재자. 둘 다 정의와 선을 위한 조직이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울일 뿐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중재자와 감시자는 치고받고 싸움질하는 사이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만한 관계는 또 아니야. 오히려 서로 대립하는 사이에 가까워.”

“그럼, 중재자보다 한발 빠르게 성과를 내기 위해, 제게 선수를 친 거다. 뭐 그런 말인 겁니까?”

“그렇겠지. 이러나저러나 자신들에겐 이익밖에 남지 않는 장사니까. 그들은 전면적으로 나설 수 없는 위치에 있으므로, 자네 같은 용병 별로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아무튼 남의 손을 빌려야 하네. 근데 지금 남은 손 중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사람은 자네뿐이지.”

블레이크는 고개를 틀어 창가 쪽으로 향했다.

유리창에 비친 그의 표정을 보니, 다소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이유로 저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자네가 성공하고 만인의 칭송을 받는다 치자, 그럼 감시자는 엄청난 이득을 취한 셈이나 다름없어. 나름 유망주라곤 하지만, 새파란 신출내기 한 놈이 중재자 놈들을 뛰어넘은 전과(戰?)를 세운 거니까.”

“그럼, 실패하거나 별로 좋지 못한 평가를 듣는다면요?”

“그래도 그들은 잃을 게 없는 입장이지. 실패하면 뭐 어떤가? 평소처럼 그들은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은 자기들 소관이 아니다’라고 얼마든지 둘러댈 거야. 설령 자네가 좋지 못한 평가를 듣는다고 해도 상관없네. 아마 자네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거나, ‘감시자의 눈을 가지고 있을 뿐, 감시자인 건 아니다’라는 핑계로 빠져나가겠지.”

“그렇게 말하니, 조금 기분이 나쁜데요. 저는 철저히 뭔가 이용만 당하고 있는 것 같잖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않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고 그래야지.”

그는 나를 향해 손에 들린 서류 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이유가…”

“맞아. 감히 이런 깜찍한 짓거리를 하려들 줄은 몰랐거든. 자기네들 좋은 일만 시켜두는 꼴을 두고 보라니.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해줄 생각이네. 뜯어낼 수 있는 모든 걸 뜯어내야지. 난 절대 당하고만 사는 성격이 아니거든. 자네처럼 말이야.”

블레이크는 ‘누군가’와 닮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참 꼴 보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한 얼굴이라, 더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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