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미친년이 너무 많아.(3)
* * *
“어쩌자고 그런 거야. 도대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으니까?”
“아니. 나빠.”
“언젠간 네가 할 일이었잖아. 그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인데, 뭐 어때.”
“빨라져도 너무 빨라졌으니까 그렇지.”
“아냐, 늑장 부리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아.”
이런 무모한 제안을 아이나가 받아들이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이나는 위험하고 도박적인 수를 두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아주 싫어하는 축에 속하지.
따라서, ‘천마를 죽여달라’ 같은 미친 제안도 당연히 거절하리라 여겼다.
한데, 아이나는 내가 결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곧장 그러겠다고 답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나와 힐다 사이에 이런저런 문답이 오가기도 전이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건데?”
“간단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지와는 관계없이, 언젠가는 넌 저 제안을 분명 받아들였을 거야. 그렇지?”
“…아마 그렇겠지.”
“그래. 그 말은 곧, 우리가 힐다라는 저 거대한 전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아. 어차피 사용할 힘이라면, 최대한 빠르게 쓰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리고”
“그리고?”
“만일 힐다에게 시간을 주었다가, 마음이 다시 돌아서기라도 하면, 그게 훨씬 큰 문제야.”
위험한 경우긴 했다.
나 또한 저 수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점치고 있었다.
만일 이 모든 게 함정이고, 내가 가진 꿈의 잔재라는 그 하얀 돌을 빼앗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면, 차라리 본인이 직접 행차하는 편이 나았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내 몸이나 내 물건을 만지는 순간, 모든 기억을 읽어갈 게 아닌가.
찬장에 숨겨 둔 과자 몇 개를 몰래 집어먹고 있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식겁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 몰래 내 물건들의 기억을 사이코메트리로 읽어간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우리 앞에 있던 건 분명 힐다가 아닌 클라우디아였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이득이라는 거네.”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장사야. 처음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언젠가는 적대하게 됐을 사람이라는 소리고, 정말로 우리 편에 붙는 거라면 천재일우(??一?)의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니까.”
“그렇게 말하니 납득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마지못해 믿는 눈치인데.”
“솔직히, 난 아직도 전혀 못 믿겠거든.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뭐…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거지.”
“요즘 따라 내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네? 우리 아버지가 어지간히 무섭긴 했던 모양이야. 응?”
아이나가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보내왔다.
그 모습에 빠져든 나머지,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쿡 쑤시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아이나가 내 연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녀가 미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솔직하게, 내가 봤던 눈웃음 중 가장 아름다운 눈웃음이었으니까.
“응? 갑자기 왜…?”
내 손은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그녀의 눈가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 손을 내밀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머지않아 웃음을 되찾고는, 볼을 살짝 기대어왔다.
이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나는 언제나 눈웃음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예쁘고 잘 어울려. 그 웃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그냥.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아이나가 이토록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마 없겠지.
내 엄지와 맞닿아 있는 이 한 쌍의 눈물점은 가련해 보이는 아이나의 인상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으니까.
이보다 더 나은 조화를 찾기도 어려울 테니, 상상이 거기서 그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틀렸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아이나가 몸소 증명해주지 않았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웃을 때 가장 돋보이는 특징이라고.
“알았다. 우리 아버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밑 작업해두는 거지?”
“맞아.”
“그런다고 평가가 바뀌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알아 둬. 나보다 더 냉정하신 분인데. 내가 아무리 열심히 네 칭찬을 해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실걸.”
“그럼, 어떻게 해?”
“알아서.”
대답과 동시에, 우리는 ‘풋’하는 소리를 냈다.
옛날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인데, 이런 거.
1년만 전이었어도 달아오른 얼굴로 새침한 대답만 내놓거나, 가라앉은 어투로 진지한 답변만 늘어놓았겠지.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실없는 농담까지 주고받게 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왜 그렇게까지 경계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저 정도면 보여줄 수 있는 패는 다 보여준 거로 생각하는데, 믿어볼 만하지 않아?”
“긴가민가하더라고. 차라리 한잠을 고민하다 결론 내린 거라면 별생각 없이 넘어갔을 텐데, 그다지 과감한 성격도 아닌 네가 단칼에 수락하는 걸 보니, 뭔가 나만 모르는 비밀 같은 게 있나? 싶어서.”
“너, 요즘 이상해졌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나한테 ‘너답지 않다’라면서 맨날 투정 부릴 땐 언제고. 너야말로 나한테 숨기는 비밀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지금보니까, 그냥 우리 역할이 조금 바뀐 것 같은데?”
문득 든 생각이었다.
처음엔 반쯤 농담 삼아 던진 이야기였지만, 최근의 기억을 되짚어 보니, 이젠 잔소리하는 쪽도 나로 바뀌었고,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고민부터 한참 하는 모습이, 새삼 아이나와 많이 비슷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아이나는 전처럼 기합이 바짝 들어간 무표정이 아닌, 심드렁한 얼굴로 피곤한 기색만을 토해내다가도, 막상 일이 눈앞에 닥치면 별 고민도 없이 해치울 생각부터 하는 게 마치 과거의 나를 연상케 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는 점은 물론 좋은 일이었으나, 이건 모자란 점을 보완해주는 선을 넘어, 입장을 바꾸는 수준에 도달해버려,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너무 닮아도 좋을 건 없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닌가 봐.”
“그러게. 그런 뻔뻔한 소리도 원래 내가 해야 했을 말인데.”
“그럼 이젠 네가 부끄러워하는 티도 좀 내고 그래 보는 건 어때? 귀여울 것 같은데.”
“뭘 해도 부끄러울 것 같지 않아서 못하겠는데.”
“그래? 그럼 말고.”
아이나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내 품에 안겨들고는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근데, 우리 졸업은 언제할까?”
“내년에 하겠지. 갑자기 졸업은 왜?”
“그냥. 조기 졸업할 수 있으면, 그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뭐?”
조기 졸업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 생활에 심취한 나머지, 내 본분을 망각하고 있었으니까.
여긴 아카데미물 소설 속 세계다.
따라서, 조기 졸업이나, 자퇴, 퇴학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로 무언가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난 이후, 마음에 변화가 생겨 아카데미를 떠나, 자신만의 신념 같은 걸 찾는 게 보편적인 아카데미물의 스토리였으니까.
“뭐 못할 이야기라도 했어? 조기 졸업할 수도 있는 거지. 이사장님이 너 히어로 팀 창단하는 거 서류 수리해 준 거 보니까, 아예 조기 졸업시켜주려고 그러는 건가 해서 말해본 것뿐이야.”
“좋은 이유라면 나쁠 거야 없겠지만… 그래도 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아.”
“난 좋다고 봐. 물론 우리가 재학 중인 트리니티 아카데미 같은 일류 아카데미는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아카데미는 시니어 클래스, 즉, 졸업 학년에 도달하면 뭔가를 가르치기보단, 좋은 히어로 팀에 입단시키는 걸 목표로 삼는단 말이지.”
“그 말은 나도 동의해. 이미 팀을 꾸린 우리 입장에선 졸업반까지 수료할 메리트가 딱히 없지. 배울 점이 산더미같이 많이 남아있다곤 해도, 그건 아카데미에서 배울 건 아닌 것 같고…”
“뭣보다, 난 1년 정도 휴식 기간을 좀 가지고 싶어. 겸사겸사 너랑 좀 연인다운 생활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연인다운 생활이라.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물론 나도 언젠가는 당연히 아이나와 맺어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벌써부터 동거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에 올라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세레나와의 애매한 관계도 어떻게 될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데다, 지금까지 저질러왔던 일들은 애들 장난 수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사건들이 도사리는 미래만이 남아있는 상황에, 어떻게 그런 꿈을 꿈꾸겠는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돈 정도야 있다지만, 그 외에 다른 꿈을 실현하기에 난 아직 모자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뭣보다, 아이나의 아버지는 날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고.
어찌하면 좋을까, 상념 속으로 여행을 떠나있던 와중, 아이나가 느닷없이 내 명찰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왜?”
“여차하면 집 나가야 할 수도 있잖아. 그럼 성(?)도 너 따라가야 하니까, 내가 네 성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나 명찰 좀 확인해봤어.”
그 말에, 머릿속에서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대놓고 결혼이라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낯간지럽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저런 말을.
“…봐봐, 부끄러워하잖아. 귀엽게.”
“아, 아?”
“아까 했던 말 기억 안 나? 뭘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라며.”
“그, 그랬었지.”
“…네가 부끄러워하니까, 괜스레 나도 부끄러워지잖아.”
우리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우물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이마저도 즉답이 아니라, 한참을 멈칫거리다 하는 대답이었다.
“농담 아니니까, 잘 고민해 봐야 해?” “따라가도, 내가 따라갈게.”
결국, 그 끝에 찾아온 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었다.
그 침묵을 깨고, 원래 의제였던 힐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는 데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사실, 그것조차 앞서 나눈 이야기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 이야기였던지라, 금방 넘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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