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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화 〉 미친년이 너무 많아.(2) (168/173)

〈 168화 〉 미친년이 너무 많아.(2)

* * *

아이나를 만난 그 즉시, 나는 힐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읊어 놓았다.

하지만, 돌아온 아이나의 답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뭐?”

이렇게나 쉽게 허락을 내려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신중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아이나인데, 다른 이도 아니고 적군의 참모가 갑자기 투항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준다고 하니, 어찌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봐요. 아이나 양도 괜찮다잖아요. 그럼 이야기는 다 된 거죠?”

“…잠시만요. 아이나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좋으실 대로.”

힐다는 가도 괜찮다는 듯, 히죽거리는 얼굴로 우리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저 수상쩍기 짝이 없는 모습에도, 아이나는 여전히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아이나의 손을 붙잡고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아이나.”

“응?”

“평소랑은 뭔가 다른 향기가 나는 것 같은데, 향수라도 바꾼 거야?”

“이 멍청이!”

아이나의 로우 킥이 정강이에 직격했다.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은 것보다 끔찍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고통이 머리에 도착했을 즘에, 직감이 내게 말했다.

‘이건 분명 멍들 거다’라고.

“쓰읍. 그래서, 대체 왜 때린 건데?”

“네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지. 지금 그런 어설픈 질문으로 날 떠보려는 거야?”

“아니, 확인할 게 있어서 한 소리라고! 나도 네가 향수 안 바꿨다는 것 정도는 알아! 애초에 내가 골라준 건데, 까먹을 리가 없잖아.”

“그건 당연한 소리고. 만약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였으면…”

아이나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었다.

뒷일은 알아서 감당하라는 뜻이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그래서 화난 진짜 이유가 뭔데.”

“말했잖아. 그런 웃기지도 않는 질문으로 내가 속아 넘어간 건지 확인해보려 하는 게 어이없어서 때린 거라고.”

“아니, 향수 이야기는 너랑 나만 아는 이야기잖아. 그 질문을 힐다가 어떻게 알고 대답한다는 건데?”

“너, 네가 한 이야기도 기억 못 해? 저 인간이 가진 사상력 중 하나가 사이코메트리라며. 그러면 모르는 사이에 너나, 나를 통해 기억을 읽어냈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럼 애초에 어떤 질문을 하든 의미가 없지.”

“아.”

씨발, 왜 그걸 잊고 있었지?

탈력감과 후회감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몇 마디 했다고 금세 풀 죽기는.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되든 안 되든, 일단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보는 게 너였잖아.”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의 실수였으니까.”

“그것보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으면, 이랬어야지.”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까치발을 들었다.

살짝 내민 입술이 맞닿기 무섭게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탈력감과 후회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 순간이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이 감촉을 좀 더 즐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못내 남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되새길 수 있었기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던 그 향기가 맞다고.

“확인했어?”

“응. 그대로의 너였어.”

“단순해서 좋네.”

아이나가 피식하고 웃었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어느 한쪽은 분명 부끄러워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은 낯설거나, 멋쩍은 모습을 보더라도, 이해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사이에 이르렀으니까.

“그래서, 괜찮다고 한 이유는 뭐야?”

“우선, 내가 조사해본 내용부터 이야기하자면, 저 클라우디아라는 생도는 절대 힐다란 사람일 리가 없어.”

“하지만, 저 사상력과 말투, 행동거지는 분명 힐다 베르펠인데…”

“네가 알고 있는 정보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단지, 저 사람 자체는 힐다 베르펠이 아니라는 거지. 생각해봐. 힐다가 너란 사람을 인식하게 된 순간은 최근이야.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이 아카데미에 재학한 지 그보다 훨씬 오래됐어. 만일 모종의 수단으로 힐다가 클라우디아로 변장한 것이라고 쳐도, 모든 사람을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우리 몸에는 칩이 이식되어 있으니까?”

“그건 부차적인 이야기야.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 학기 중이라는 거지. 클라우디아와 같은 클래스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본 바로는, 평소와는 다를 게 없었다고 해. 이상하지 않아? 만일 전에 쓰던 능력과는 다른 능력을 썼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그러네. 근데, 저 능력들은 어떻게 설명해?”

“그건 간단해. 힐다의 사상력이 저 ‘책’이기 때문이지. 저 책 자체는 힐다의 사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그게 반드시 누구 손에 들려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야.’

신원이 확실하게 증명된 생도인데다, 그 물건이 평범한 책에 불과하다면, 복잡한 통관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힐다 본인이 이곳으로 잠입하는 건 불가능할지 몰라도, 생도 한 명의 택배를 빼돌려 자신의 책과 배송 중인 책을 바꿔치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클라우디아라는 저 사람은 힐다 베르펠이 아니라, 단순히 힐다 베르펠의 책을 가지고 있는 생도에 불과하다?”

“맞아. 그러니,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어찌할 도리가 없을 거야. 네가 말한 것처럼 대단한 빌런이라 해도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무력에 한해선 우리가 분명 클라우디아보다 우위에 있어. 설령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라 해도, 타인의 몸을 조종하여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러니, 지금은 안심해도 괜찮아.”

“근데, 그럼 더 오히려 위험하지 않을까? 정말로 투항할 생각이라면, 자신이 직접 찾아왔을 거 아니야.”

“대신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저 책을 담보로 내걸었잖아. 물론 본인이 직접 찾아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지만, 그럼 오히려 우리 쪽에서 과하게 경계하게 될 테니, 딱 적당한 수준의 성의를 보여준 거지.”

“그럼, 저 클라우디아라는 사람의 정체는 대체 뭔데?”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우선은 돌아가서, 힐다의 이야기에 집중하자.”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이야기가 몇 가지나 오갔음에도, 아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집안이 그런 집안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워낙 대형 사고를 많이 쳐서 익숙해져서 그런 것인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벌써 이야기는 끝난 건가요? 뭔가 풋풋하면서도 뜨거운 장면을 보았던 것 같은데…”

“누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다음까지 갈 수 있었을 텐데.”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 ‘미츠루’가 유들유들해졌다는 소문이. 저는 당연히 거짓말일 거라 생각했는데.”

“때로는 책으로 접하는 사실만이 사실이 아닐 때도 있는 법이니.”

“그건 사실이죠. 뭐,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제 제안. 성진씨는 그럼 받아들이는 거겠죠?”

솔직히,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난 아직 힐다 같은 거물과 대적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사상력도 사상력이지만, 순수한 무력에서 차이가 극심했다.

빈센트와 세레나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인자강들과 맞서려면 사상력을 더 기를 필요가 있었다.

“조건을 하나만 걸겠습니다. 그쪽이 넘어온다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저도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죠?”

“솜니엄리버레이터를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 그 하얀 색 돌쪼가리들을 몇 개 빼돌려서 저희에게 보내주시면, 그때 믿겠습니다. 적어도 탁구공보다는 큰 사이즈로요.”

클라우디아의 탈을 쓴 힐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꿈의 잔재인지 뭔지 하는 저 물건은, 유리 구슬 사이즈 정도만 돼도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닌 물건이었으니까.

그런데 탁구공 정도 크기의 물건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개를 보내 달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제법 어려운 부탁을 하시네요. 성진씨. 다른 분들에게도 이런 부탁을 자주해보셨나 봐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제 주변 사람들한테는 다 한 번씩 했을걸요. 제가 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

“재밌네요.”

돌연 그녀가 손에 들린 책을 펼쳐 책장을 마구잡이로 휘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눈 또한 그 페이지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내용이라도 적혀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입을 연 순간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으니까.

“좋아요. 그렇게 해드리죠. 대신.”

“대신?”

“성진씨도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제법 어려운 부탁이지만요.”

“뭔데요?”

“천마를 죽여주셨으면 해요.”

이건 제법 어려운 부탁이 아니잖아.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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