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6화 〉 출진.(2) (166/173)

〈 166화 〉 출진.(2)

* * *

북적이는 거리 한가운데, 모두의 시선을 끄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옷을 껴입은 아이였다.

“저 애는 덥지도 않나?”

“추위를 많이 타나 보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과하게 꽁꽁 싸맸는데? 추위를 많이 탄다곤 해도 지금이 머플러까지 두를 시기는 아니잖아.”

“좀 이상하긴 하네.”

차림새도 차림새였지만, 그가 유독 눈에 띄었던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초조함이 잔뜩 묻어나는 모습 때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잰걸음 하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몸짓까지.

여간 급해 보이는 행색이 아니었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길을 잃은 것 같은데.”

“그러자.”

어려 보이는 외관 때문이었을까.

줄곧 그 모습이 애처롭다는 듯이 지켜보던 몇몇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나, 소년은 그 손길에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디론가로 뛰어갈 뿐.

“이쪽인가? 아니야, 이 정도로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그 녀석의 불꽃은.”

그렇게 한참을 어딘가로 뛰어가던 소년은 길목에서 어느 행인과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애새끼들은. 사람 좀 잘 보고 다니라…”

행인이 소년과 눈을 마주친 순간, 행인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후드 속에 가려진 그의 눈은,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탁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미, 미안하구나. 눈이 멀어있는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또다시 어딘가로 달려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뜀박질로.

“대체 저 꼬마는 뭐 하는 자식이야…”

* * *

중재자의 수장이 맹인이라는 정보는 그리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다.

그들이 무슨 대단히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집단이라 그런 건 아니었고, 단지 눈먼 자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지내왔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시각을 상실한 대신,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거의 다 와 가는군. 느껴진다. 진의 불꽃이.’

자그마한 온도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의 몸은 불사조의 움직임에 거의 본능적 반응하고 있었다.

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에게 불사조는 도저히 놓칠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가 천천히 불사조와 거리를 좁혀갈 즈음.

쿠당당 하는 소리가 그의 옆에서 들려왔다.

누군가가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뭐해, 쪽팔리게 길 한복판에서 넘어지기나 하고.”

“미끄러졌다고!”

“보도블럭에서 미끄러지는 새끼는 너 말곤 없을 거다. 필립.”

“아니, 이것 좀 봐! 살얼음이 껴있잖아!”

“이 자식이 되도 않는 구라를 치네. 가을에 무슨 살얼음 타령이야. 여기가 북극인 줄 아냐?”

“진짜라니까? 니가 한번 봐봐! 살얼음인지, 아닌지.”

당연하게도, 필립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아직도 외투를 걸치지 않은 채 돌아다니는 이 계절에, 살얼음이 낄 리가 만무했으니까.

몇 겹의 외투를 둘러 입은 소년은 아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것에 안도를 표했다.

‘너무 긴장했나 보네. 나름대로 열심히 제어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평소 그는 온 신경을 몸에서 새어 나오는 한기를 억누르는 데 쏟아붓고 있었다.

그나마 옷을 잔뜩 껴입은 지금은 비교적 쉽게 능력을 통제할 수 있었으나, 생각할 일이 많아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제아무리 자신이 중재자를 이끄는 우두머리일지라도, 불사조와 맞붙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방금은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넘길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이런 실수가 벌어진다면, 다른 사람들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게 분명했다.

‘저건 분명…!’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조바심 때문이 아니었다.

마침내 찾아내고 만 것이다.

불사조, 카마인 진을.

재빠르게 달려간 그는, 자신과 엇비슷한 키를 한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진, 여기서 대체 뭘 할 셈이지?”

“넌… 유서영?”

* * *

세상 어딘가에 숨겨진 작은 오두막.

그곳에서 진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내밀었다.

“성질이 참 많이 죽었네. 진. 옛날 같았으면 바로 덤벼들었을 텐데 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서영.”

“서진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너도 날 아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그 꼴은 대체 뭐야? 남자도 아니고. 어차피, 알 사람은 우리가 누군지 다 알 텐데?”

진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양, 찻잔에서 눈조차 떼지 않은 채 어깨만 으쓱했다.

“그럴 수밖에 없어. 중재자의 신상은 아무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안 되니까.”

“꼴에 고상한 척하더라니.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 감투 쓰고 나니 정신 좀 차렸나 보네?”

“너도 죽고 나니 기운이 많이 빠진 모양이야? 옛날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 않는 거 보니. 난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래서, 시답잖은 농이나 하려고 날 찾은 건 아닐 테고. 무슨 이유로 날 찾아온 거지? 끝내지 못한 결투라도 다시 하고 싶은 거냐?”

유서영은 찻잔을 한번 홀짝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한층 진중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고작 그 이유만으로?”

“근 수십여 년간, 불꽃을 거둬들이고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던 네가 갑자기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 큰 비화가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진은 이미 예상한 답변이라는 것처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 던졌다.

물건을 낚아챈 서영은 잠깐 멈칫하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제법 잠잠하게 반응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오두막의 유리창엔 순식간에 서릿발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네가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를 알겠네. 이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그걸로 끝이 아니야. 이걸 보라고.”

진은 작은 사진 하나를 꺼내 서영에게 들이밀었다.

파헤쳐진 정호경의 묘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사진.

서영은 그 사진을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이내 떨리는 손으로 그 사진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요즘 같은 시대에 굳이 사진을 필름으로 저장해둔 이유가 뭐겠어?”

“잘 생각했어. 이 사진이 유출되기라도 했다간, 세간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졌을 거야. 설마 다른 증거가 남아있는 건 아니지?”

“현시점으로선 이 사진만이 유일한 증거야. 나머진 내가 모두 없애버렸으니까.”

특이한 문장이 그려진 옷자락.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사진 한 장.

실로 보잘것없는 잡동사니처럼 보이겠지만, 이 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시사하는 바가 큰 물건들이었다.

“후우, 줄곧 잠잠하게 지냈던 그 미치광이들이 갑자기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게 이유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일단 진정 좀 하지 그래. 네 덕분에 온 집안이 싹 다 얼어붙어 버렸다고.”

“지금 골치 아파 죽을 지경이니까, 네가 녹이든가 해. 어차피 너랑 나뿐인데.”

진은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는지, 혀를 한번 찼다.

그럼에도 고생하는 서영이 내심 신경은 쓰였는지, 이미 꽁꽁 얼어버린 차를 녹여주었다.

“친절한 척하긴.”

“그래서, 난 이대로 보내줄 거냐?”

“그럴 순 없어. 널 꼬집어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 이상, 감시는 붙여둘 셈이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모르겠는데.”

“네가 잘못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확실한 건, 이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거기에 네가 껴있다는 거야. 우리로선 널 감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서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이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아. 오히려 더 큰 화만 불러오게 되겠지.”

진은 아직도 서영이 자신을 믿지 않으리라 여겼다.

사소한 앙금 정도야 털어내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 시간이 흐르긴 했으나, 둘은 분명 적이었던 사이였으니까.

또한, 진도 본인에게 과오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서영의 불신을 원망할 생각도 없었다.

하나, 이는 착각에 불과했다.

서영이 진을 만류한 이유는, 그런 까닭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보고만 있겠다고 했어? 막아야지. 당연히.”

“하지만, 분명 날”

“그래, ‘감시’하겠다고 했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진은 이내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정말로 내게 맡길 생각이냐?”

“그래.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니까.”

“놀랍군. 날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믿고 말고는 나중의 문제야. 그보다 급한 건 문제를 해결하는 거지. 지금 우리에겐 적이 너무 많거든. 그것도 하나 같이 압도적으로 강한. 레이븐, 힐다, 거기에 너와 정호경까지 포함한다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잖아.”

“확실히 그 모두와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불가능하진 않아. 우리 세력도 만만치 않으니까. 다만, 전력을 잃을 각오 정도는 해야겠지.”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는 듯, 진은 다소 미묘해진 표정으로 서영에게 물었다.

“그럼, 왜 굳이 나를 감시로 묶어두는 거지? 아예 풀어두는 편이 낫지 않나?”

“나는 너를 믿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거야. 그 말인즉슨, 나는 싫더라도 중재자라는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널 막는다는 의지를 표현해야만 해.”

“레이븐, 힐다, 나, 정호경, 이 넷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리니, ‘내 쪽은 막는 시늉만 하고, 레이븐과 힐다 쪽에 집중하겠다.’ 이 말인가?”

“그래, 너희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게 두는 거지. 구태여 전선을 4개로 쪼갤 필요가 없어지니까.”

“하지만, 그 계획이 성립하기 위해선 내가 발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너희가 레이븐과 힐다와 교전할 때, 내가 정호경과 싸워줘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그래야지. 물론 네 속도에 맞추기 위해 나도 노력은 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움직여주는 편이 좋지. 나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움직여야 하니 말이야.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어.”

사실상 공멸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진은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에게 동료라고 부를 만한 이는 모두 세상을 뜬 지 오래였으니까.

지금으로선 서영이 유일한 동료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보도록 하지. 만일 쉬다 갈 생각이라면 정리는 해둬. 이 집은 내 소유가 아니니까.”

“아니, 오늘은 나도 이만 가볼 생각이야.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

“그래, 잘 해결되길 빌어주지.”

“너도.”

짤막한 인사를 건넨 둘은 오두막에서 나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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