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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화 〉 내릴걸.(6) (160/173)

〈 160화 〉 내릴걸.(6)

* * *

임무 당일.

약속 장소인 헬리포트로 나가보니, 커다란 헬기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고, 빛도 바랜 것으로 보아하니, 상당히 오래 굴려 먹은 모양이었다.

“헬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영 별로네. 뭐, 날아다닐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도 없겠지만.”

“무슨 소리야. 이 정도면 민간용 헬기 중에선 거의 제일 좋은 건데.”

“저렇게 낡은 게?”

“군용으로 쓰이던 게 퇴역한 거니까.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낡아빠진 고물 같아 보여도, 실제론 엄청 튼튼한 거야.”

“때깔 잘 빠진 번쩍거리는 신형 헬기들보다 이게 좋은 거라고?”

“그럼. 내구도면에선 천지 차이지. 그런 건 레저나 스포츠 용도로 쓰는 거니까.”

역시 윌리엄이야.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구만.

“크흠. 아무튼, 기장님한테 인사나 드리자.”

“웬일로 뻔뻔하게 태세 전환을 안 하네?”

“말만 들으면 내가 평소에 구라만 치고 다니는 것 같다, 야.”

“구라 같은 소리만 지껄이고 다니긴 하지.”

알프레드 녀석의 헛소리는 가볍게 무시하고, 헬기 옆에 기댄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사내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보통 험상궂게 생긴 게 아니라 좀 겁나긴 했지만.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기장님.”

“무슨 소리… 아니, 설마, 학생이 오늘 대여를 신청한 사람이야? 이름이 박성진?”

“네, 맞아요.”

“아이고, 참.”

기장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연거푸 탄식을 토해냈다.

중간중간 윌리엄에 대한 욕지거리를 섞는 것도 잊지 않았고.

“후, 그래. 어쩌겠냐. 다 내 팔자지.”

“저,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냐, 학생 신경 쓸 거 없어. 윌리엄 그 개새끼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아져서 그렇지.”

“저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보네요.”

“아니, 설명은 다 해줬지. 애초에 내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이유도 재미있어 보여서였고. 근데, 그게 트리니티 아카데미 출신의 유망주라곤 알려주지 않았거든. 염병.”

그렇게 말하니 부담스럽게 느껴질 법도 하네.

자신은 그냥 모르는 사람 한 명이 버드 미사일이 되어 꼬라박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서 하겠다 한 것뿐인데, 그 대상이 알고 보니 유명인인 셈이었던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 돼요.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세간에선 너 같이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미친놈이라고 불러. 알지?”

“물론이죠.”

“그래, 그럼 됐다. 혹시 동승자 중에 보호자 역할 같은 거 해줄 사람 없니? 너희들끼리만 오진 않았을 거 아냐.”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안 오네요.”

“저기 오고 있어.”

프리실라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사내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하얀 머리에 붉은 눈, 느릿한 발걸음, 피곤한 기색으로 하품을 해대는 모습까지.

바로 작년까지 우리 교수였던 빈센트였다.

“…저 사람이 정말로 너희 담당이라고?”

“네, 그렇게 됐네요.”

“한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히어로가 빈센트 뮐러였는데.”

“실망스럽죠?”

“조금은. 뭐, 근데 히어로도 언제까지고 사람들한테 영웅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이해는 해.”

나도 빈센트를 좋아서 부른 건 아니라고.

세레나한테 부탁했다간 노발대발하면서 못 하게 말릴 게 분명하니까.

그나마 아는 교수 중에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빈센트를 부른 것뿐이다.

무지하게 게으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 믿을 사람까지는 또 아니라서.

“다들 모였구나. 빨리 출발하자. 피곤하다.”

“빈센트 뮐러씨,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가기 전에 싸인 한 장만 부탁해도 될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거칠게 펜을 휘갈긴 빈센트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묘하게 웃음기가 담긴 게, 마치 자신을 보라는 것 같았다.

‘맞아, 빈센트도 얼마 전까지는 잘 나가는 히어로였지? 하는 짓만 보면 옆집 사는 백수 아저씨랑 다를 게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새삼 저걸 보니 내 교수가 세레나라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됐다.

빈센트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오피스룩 미녀 선생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

“자, 그럼, 사람도 다 모였으니 탑승하도록 합시다. 앉은 후에 안전 벨트 매는 거 잊지 마시고요.”

“네.”

빈센트의 싸인을 받아든 기장이 기쁜 듯 외쳤다.

생긴 건 터미네이터도 씹어먹을 것처럼 생겨놓고, 고작 빈센트의 싸인 한 장으로 저렇게 좋아하다니.

역시 외모로 사람을 속단하면 안 되는 건가.

나도 나중엔 저렇게 든든한 팬이 좀 생겼으면 좋겠네.

* * *

“남쪽으로 50도 방향에 목표 지점이 보이네. 거리는 대략 10마일. 고도를 11,500피트로 조정할 테니, 준비 단단히 해 두라고.”

“좋네요. 이대로만 쭉 가죠.”

“어때. 준비는 됐어? 프리실라?”

“조금 무섭긴 해.”

낙하산 가방을 꽉 붙들어 맨 게, 아무리 봐도 조금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많이 해봤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그렇겠지?”

“그렇게 걱정되면 장비나 한 번 더 점검하라고. 나야 떨어져도 안 죽으니 상관없지만, 너희들은 아니잖아?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는 건 그런 말 한마디가 아니라, 안전 장비야.”

“네.”

여느 때처럼 빈센트의 빈정거림에 말대꾸를 하지 않은 이유는, 적어도 저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미혼인 빈센트는 눈앞의 모습이 배알 꼴려서 그냥 꼽주고 싶어서 한 소리겠지만.

“야, 아이나. 너는 걱정도 안 되냐? 네 남자친구가 저렇게 천하태평하게 앉아있는 꼴을 보고도?”

“괜찮아요. 믿고 있으니까.”

“그냥 포기한 게 아니라?”

“교수님이 결혼을 대하는 태도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남들 눈에는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잖아요.”

“박성진이 애를 다 배려놨구만.”

옳지, 잘한다. 아이나.

바로 그거지.

근데 솔직히 이건 나도 조금 의외긴 하다.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렇지만, 노잼진지충과에 속하는 아이나가 저런 소리도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슬슬 강하 준비해. 목표와 거리가 5마일도 채 남지 않았어.”

“별다른 이상은 없는 거죠?”

“이상 무. 레이더에도, 시계(??)에도 특별한 징후는 관측되지 않고 있으니, 말만 하라고. 해치를 열어줄 테니.”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한 뒤, 아이나와 프리실라의 손을 잡고 천천히 해치로 다가갔다.

둘의 손은 의외로 떨리지 않았다.

“준비 완료.”

“행운을 빌어주지. 즐거운 비행 되라고.”

“속도에 맞춰서 따라오시는 거, 잊지 마세요.”

“물론이지.”

해치가 열리고, 세찬 바람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양쪽을 한번씩 확인하니, 둘은 모두 준비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

바람을 찢어 가르는 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훨씬 힘드네. 슬슬 이 짓거리에도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윙 슈트 점프 자체가 생각보다 굉장히 고된 일이긴 하지만, 한 명을 안은 채 그걸 시도하는 것은 그보다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무게 때문에 방향 조절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니.

평범한 스카이다이빙이었다면 수신호로 도와달라는 요청이라도 보낼 수 있지, 이건 윙 슈트라 도움을 바라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기동하기 위해 주변을 아이나의 그림자로 흐릿하게 덮어놓기까지 한 터라, 원활한 비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프리실라!”

“응?”

“깔끔한 활공은 어려울 것 같아! 그러니까, 차라리 조금 쏘더라도, 확실히 목표에 맞춰야 해! 알겠지? 탄환의 유도 보정만 믿어선 안 돼!”

“맡겨만 줘!”

채 5분도 안 되는 시간 내로 대상을 완벽하게 저격하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일 것이다.

심지어 시속 250㎞의 속도로 이동하는 와중이기까지 하니,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프리실라는 당연히 해내리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 믿을 수밖에 없다고.’

프리실라를 믿고, 조금 더 과감한 비행을 시도하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알프레드의 도움이 더 컸겠지만.

녀석은 줄곧 내가 비행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내 실로 만들어진 윙 슈트에 전기를 전도시키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내 자세가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윙슈트의 비막(??)은 빳빳한 상태를 항시 유지하는 중이었다.

­타앙!

탄환이 강선을 따라 회전하며 나아간다.

그 궤적은 분명,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이 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탄환은 정확하게 목표 지점에 탄착했고 이내 하얀색 분진이 피어올랐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불어오는 해풍이 그 죽음의 눈꽃들을 싣고 천천히 섬을 뒤덮는 것 뿐이었다.

“명중했어!”

“잘했어. 프리실라. 그야말로 완벽한 사격이었어.”

낙하산을 펼치고, 섬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울창했던 나무들은 어느샌가 모두 하얗게 메말라 버린 채였고, 다른 유기체는 아예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건물 밖으로 흩날리는 하얀 가루가 그것이 존재했음을 추측하게 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뭐가?”

“그리 잔인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돼서.”

“아… 안 그래도 날아다니느라 어지러웠는데, 그 이야기 들으니까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

“하지 마.”

저게 모두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긴 했다.

진조 격퇴 때나 이리나 처치 때는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아예 볼 일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죄책감이 덜 하긴 했는데, 이건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빼도 박도 못하게 남아있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걸로 차차 익숙해져 나가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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