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내릴걸.(3)
* * *
카타리나의 제안을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때까지는 마냥 좋다고만 생각했었지.
이런 수모를 겪게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으니까.
“두 분 모두 준비는 되셨습니까?”
“네.”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전혀 안 됐다.
사람이 수치심이라는 게 있지.
보는 사람이라 해봐야 비행기 조종사가 끝이긴 하지만, 이렇게 쪽팔린 짓을 어떻게 하냐고.
그런 내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카타리나는 그저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웃기만 했다.
“왜 그렇게 굳어있나. 두렵기라도 한 건가? 긴장 풀도록. 막상 해보면 재밌을 거다.”
“아니,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쪽팔려서 그러는 거야.”
“뭐가 쪽팔린다는 것이냐.”
“지금 내 꼬라지를 좀 봐!”
탠덤 스카이다이빙.
강하, 고도 계산, 캐노피 조작 등에 익숙지 않은 견습 스카이다이버를 도와주기 위해, 훈련 경험이 많은 고참 스카이다이버가 함께 다이빙하는 방법이다.
근데, 이게 말이 돕는 거지, 실제로 견습 스카이다이버는 그냥 고참 스카이다이버의 몸에 묶여 지시를 따르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다.
아마 스카이다이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영상으로 봤을걸?
딱 봐도 짬밥 오지게 먹은 티가 나는 교관은 등에 올라탄 채 장비를 만지작거리며 실실 쪼개고 있고, 아래 훈련생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그저 ‘으아악!’하고 소리만 지르고 있는 장면 말이야.
그래, 그게 지금 내 모습이다.
다소곳한 자세로 카타리나의 무릎에 앉아, 뛰어내리길 만을 기다리는 중이지.
아!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모습인가! 하물며 아이나를 내 무릎에 앉혀놓아도 해도 조금은 부끄럽다고 생각했을진대, 외간 여자의 무릎에 앉은 채로 안겨있다니!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포기한 기분이었다.
“너는 참으로 자주 오락가락하는군. 클로에 이사장님을 상대로 ‘응애, 나 아기 생도. 장학금조.’ 같이 부끄러운 말은 잘도 해대더니, 왜 지금 상황엔 민망하다는 듯이 반응하는 것이냐. 이 정도 사소한 일이야 훈련 과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아니!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경우가 다르잖아, 경우가!”
까놓고 말하자고.
클로에는 나이로만 보면 거의 고조할머니뻘인 분이시다.
게다가 우리 같은 좆밥들과는 다르게 세계 최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리 똥꼬쇼를 해봤자 클로에 눈엔 아기들 재롱잔치에 지나지 않는 수준일 텐데, 주제에 맞게 아양 좀 부리고 떨어지는 팥고물 좀 주워 먹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겠어?
그런다고 뭐라 할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난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잘 모른다. 그래도 우리 아기 성진이가 자꾸 부끄럽다고 투정을 부려 대니, 불편해하지 않도록 신속하고 정확한 특별 코스로 모시도록 하겠다. 최선을 다해보지. 자, 간다.”
“아.”
좁은 입구 너머를 지나, 끝없이 펼쳐진 창공이, 어느샌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
무어라 항변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자, 봐라. 아무렇지도 않지 않나.”
신기하다.
저기 저 바다에 잠긴 작은 흙더미가 방금까지 내가 딛고 서 있었던 땅이란다.
피어오른 방울처럼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물결로만 보이는 저것이 사실은 파도라 하고.
하늘에 걸려있어야 할 구름마저도 이젠 내 발아래를 거닐고 있는데,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네.”
“내가 뭐라고 했나. 별거 아니래도.”
“아니, 그건 여전히 별거야.”
존나 쪽팔린 건 그대로거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까보다 더 쪽팔린다.
방금 몰래 고개를 한 번 돌려봤는데, 평소같이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즐겁다는 표정을 짓고 있더라니까.
얘는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나.
이봐요. 선생님. 지금 제 등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요.
아니, 사실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씨발! 닿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데 어떻게 저보다 더 멀쩡할 수 있는 겁니까.
“이상한 녀석.”
“이게 보통이거든?”
“그 말은 네 입에서는 나와선 안 되는 말이다.”
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뒤이어 카타리나도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카타리나 성격상 가벼운 조소 정도의 느낌밖에 나지 않았지만.
고도 3,500피트에 도달하였습니다. 낙하산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아, 벌써 끝이로군. 성진, 뒤에 내 손이 보이나?”
“어, 보여.”
“내가 잡고 있는 줄을 잡아라. 그리고 셋에 당기는 거다. 알겠나?”
“그래.”
“하나, 둘, 셋.”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삼 내가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실감이 난다.
작달막한 암초로만 보이던 섬이, 이젠 들어선 건물 하나하나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으니까.
“다 좋은데 말이다.”
“어?”
“그 손은 이제 좀 놓아주지 않겠나.”
머쓱함에 붙잡은 손을 살포시 놓아주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라 그런지, 카타리나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다행이네.
“그래서, 어땠나. 할만한가?”
“재밌는데?”
“그래? 그럼 몇 번 더 해보도록 하자. 뭐든 기세를 탔을 때 많이 해두는 게 좋다. 나도 윙슈트 강하 연습을 위해선 이보다 더 능숙해져야 하니, 마침 잘 됐군.”
“또 한다고?”
“그래.”
드디어 네년이 날 수치사시킬 심산이구나.
그나마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아니,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참에 빠르게 실력을 늘려서 혼자 연습할 각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이 짓거리를 더 오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리거든.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다음 날, 나는 컨디션 불량이라는 이유로 쉬었다.
* * *
“수감 번호 827. 테일러 세스. 죄명. 기밀 유출, 테러, 교사 등. 현 시간부로 석방되었음을 알린다. 이상.”
호리호리한 체형을 한 그녀가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철창을 향해 나아갔다.
교도관은 그 느긋한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신 이곳에서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레이븐.”
“그래, 노력해보지.”
“나가는 문은 저쪽이다.”
테일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몇 번 까딱거리긴 했으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교도관도 알지 못했다.
“아, 깜박한 게 있었네.”
“뭐지?”
“여태까지 수고했다는 의미야. 주머니를 확인해보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일러는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벽걸이에 걸려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입고는, 교도관이 가리킨 문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대화가 통했다는 점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 뭐가 됐든 기분 나쁜 새끼였어. 그나저나, 주머니는 왜 확인하라고 한 거지?”
교도관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것은, 쌀 한 톨만 한 크기의 보석이었다.
“‘진 빚은 반드시 갚는다’더니. 진짜였군. 생각보단 괜찮은 녀석일지도.”
* * *
얼키설키 만들어진 나무 십자가에 다 해진 망토 하나가 걸려있었다.
테일러는 그 망토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있었다.
“알버트 체임벌린. 결국 죽었구나.”
알버트 체임벌린.
세상에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많지 않으리라.
그는 두 번 죽었기 때문이었다.
부단장 알버트 체임벌린으로 한 번.
검좌 코스모스로 또 한 번.
“알버트,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너무 많아서 탈인 아이였지. 코스모스가 되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말이야. 이번에도 분명 그랬을 테지.”
‘레이븐’과 ‘코스모스’는 한때 가족이었다.
둘은 비록 의남매 사이였음에도 무척이나 돈독한 관계를 자랑했었다.
아직 알버트였던 코스모스가 딸을 잃기 전까지는.
“너는 그곳에서도 아직 나를 원망하고 있으려나.”
테일러는 명예를 높이 사는 이었다.
좋든 싫든 한 번 정한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손녀가 기사단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골이 난 알버트는 테일러에게서 떠나갔고.
“원통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니힐리스는 명예롭게 그 머저리를 떠나 보내줬으니까.”
테일러 또한 알고 있었다.
패배자인 코스모스에겐 사실 명예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전관이랍시고 최대한 예우해준 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이대로 니힐리스에게 복수하겠다고 찾아가는 것은 애먼 분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테일러는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버트 체임벌린의 명예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명예라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테일러 세스 만큼은 기억하는 명예였으니까.
“그 이름에 진 빚을, 난 아직 다 갚지 못했어.”
테일러가 굳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균열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세 번씩이나 너를 잃을 수는 없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