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6화 〉 내릴걸.(2) (156/173)

〈 156화 〉 내릴걸.(2)

* * *

“확실한 거냐? 알프레드?”

“어렵지만, 가능은 하지.”

“그래, 너만 믿는다.”

“내가 필요한 이유가 ‘레이더에서 나오는 전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라는 건 이해했어. 근데, 헬기는 대여 비용이 엄청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돈은 있어? 심지어 헬기 같은 건 아무한테나 빌려주는 것도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뭐, 그러시다면야…”

알프레드는 자리를 떠나면서도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두렵다는 눈치겠지만.

그렇다고 인제 와서 무르긴 늦었는걸.

이미 한배를 탄 이상, 남은 선택지는 같이 침몰하든가, 살아남든가, 둘 중 하나뿐이라고.

아, 그렇다고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나처럼 훌륭한 선장이 있는 배가 침몰한다니, 그건 말이 안 되지.

최고의 조타수와 항해사가 준비되어 있는데.

* * *

­헬기를 빌려달라고? 드디어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거냐?

“뭐, 지금까지 해왔던 일은 놀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이번 건은 그나마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네요.”

­그래도 진조 격퇴는 제법 대단한 일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지분이 훨씬 크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돈만 준다면 뭐든 못하겠어. 그런데, 너, 돈은 있는 거냐? 저번에 빈털터리 됐다고 상심하더니만.

분명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뒤엔 블레이크가 있으니까.

“괜찮은 스폰서를 한 명 구해서 말이죠.”

­허어, 잘 됐군그래. 그럼 날짜에 맞춰서 헬기만 대기시켜 놓으면 되나?

“네.”

­알겠다. 우선 견적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도록 하지. 계좌는 그 이후에 알려줄게.

됐어.

헬기 대여 건은 윌리엄 덕에 쉽게 끝났고, 남은 건 영 껄끄러운 그 사람인가.

그래도 주도권은 나한테 있으니, 별로 문제 될 건 없겠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망설임 없이 곧장 전화를 걸었다.

바쁜 와중이라고 혹여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닐까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온형,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지금이 휴가 기간인 건 맞지만, 이른 시일 내로 복귀해야 해서 그건 힘들 것 같네. 미안하다. 도와줄 수 없어서.

좆됐네.

* * *

그래, 난 병신새끼다.

무심코 ‘남극의 겨울은 영하 70도 이하까지 내려간다던데, 그 정도면 슬슬 레온도 본국으로 귀환해서 좀 쉬지 않을까? 곧 겨울인데.’라고 생각해버렸으니까.

남반구는 9월부터 봄이라는 기본적인 상식도 까먹는 병신이라니.

훌륭한 선장은 니미.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레온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는 거나 다름없어. 남극은 막 날씨가 풀리기 시작했을 때니까. 임무로 복귀하고 나면 적어도 수개월 동안은 연락조차 불가능해질 텐데…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군.’

내가 이토록 레온의 도움을 절실히 바랐던 이유는, 이번 작전의 꽃이 바로 ‘강습’이기 때문이다.

‘저고도에서 강하하여, 적진에 침투하기’ 말이야.

솔직히 그런 걸 실전에서 해봤을 사람이 내 주변에 몇이나 되겠어.

기껏해야 한 서너 명 정도 될까?

그마저도 경험 횟수로 따지면 레온이 압도적으로 많을 거고.

그런 레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니,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런 일은 전문적인 지식이 있고 없고 차이가 심하거든.

낙하산, 고도계, 윙슈트 같은 장비는 민간인이 접하기 쉬운 장비도 아니고.

어쩌면 좋담.

대체할만한 인력이 없을까 고민하던 와중,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

“아, 카타리나. 너였냐.”

“너는 생각이 많아질 시기면 항상 여기에 오는 것 같군.”

“그런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이곳에서 널 마주쳤을 때, 네 표정이 밝았던 기억은 없으니 말이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내가 스카이라운지를 자주 드나드는 이유는 그냥 순수하게 ‘정경이 멋있어서’다.

별다른 추억이나 비밀 같은 게 묻혀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따라서, 내가 이곳에 방문했을 때 고민거리가 있는 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난 고민이 많은 사람이니까.

자주 오는 장소다 보니, 고민이 있을 때와 겹치는 시기도 있는 거지.

공교롭게 그때마다 카타리나가 여기 있었을 뿐.

“그래서,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던 거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주지.”

“말은 고맙지만, 괜찮아.”

“이 이상 괜찮다거나, 사양하겠다는 식의 말을 하면 서운해할 거다. 빨리 털어놓아 보도록. 친구 좋다는 게 다 뭐냐. 이럴 때 돕고 지내라고 있는 거다.”

“그게 말이지…”

카타리나의 독촉에, 나는 결국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어차피 숨겨봤자 별로 득 될 것도 없는 고민이긴 했지만.

“그런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

“어떻게?”

“몸 쓰는 일이라면 제법 일가견이 있어서 말이다. 너도 알지 않나. 내 능력은 상대방에게 붙어야만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걸. 힘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선 다양한 무술과 스포츠 등을 익혀두어야만 했다. 물론 나 자신이 도전을 즐기는 인간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안될 것 같기도 하고.

능력이 죄다 난투에 극단적으로 치중된 것뿐이니, 다양한 무술이야 익혀두어서 나쁠 건 없겠지만, 굳이 스카이다이빙 같은 것까지 익혀둘 필요가 있나?

잘 모르겠네.

“다만, 스카이다이빙과 윙슈트를 배워야겠다 결심한 건 순전히 네 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야겠지. 그렇게 따지니 딱히 도와주는 것도 아니군. 네게 은혜를 갚는 것에 불과하니.”

“내 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카타리나에게 조언 같은 걸 해줬던가?

그런 기억은 없는데.

조언을 받는 입장이면 받는 입장이었지, 해주는 입장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덕분이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알다시피, 내 퍼스트 어빌리티는 ‘가속’이다. 나는 그 의미를 ‘충분한 속도를 얻기 위해선, 그만큼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뜻 이라고 해석했지만, 너 때문에 그 생각을 바꿨다.”

“왜?”

“작년 중간고사에서, 빌딩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얻은 속도로 기습을 가하는 네 모습을 보고 떠올렸다. 점진적으로 빨라진다고 해서 초기 속도가 느릴 필요는 없다고. 애초부터 빠르다면, 이후엔 더 빨라질 테니.”

“설마, 그 해답이 윙슈트랑 스카이다이빙이었다고 할 셈은 아니지?”

“정확하다. 그 둘만 할 줄 알면 귀찮게 가속을 얻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귀찮은 예열 작업 같은 게 필요 없어지지 않나.”

내 잘못인가?

내가 순수했던 카타리나를 이런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아무리 카타리나가 직선적이고 명약관화한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해도 그렇지.

이런 정신 나간 방법부터 떠올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책임을 통감하게 되네. 요즘 들어 주변 사람들이 점점 나한테 물드는 게 느껴져서. 세레나야 원래 맛이 간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아이나나 프리실라조차 가끔은 기행을 일삼는 걸 보면…’

내 죄가 실로 깊긴 한 모양이었다.

그 업보를 청산할 일도 머지않은 것 같네.

“왜 그렇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난 네게 고마워하고 있다만.”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아, 혹시 이전에 했던 이야기 때문에 그런 건가? 알프레드가 나한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함께 임무를 수행할 친구라고 눈치가 보이나 보군. 둘이서 노닥거리는 걸로 보일까 봐. 그렇지?”

마, 니 돌았나.

어떻게 저기서 저런 답이 나올 수 있는 걸까.

가끔 베아트릭스나 세레나 못지않게 괴상망측한 답변을 내놓는 카타리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아카데미 소속 인물 중에선 비교적 상식인 축에 속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걱정하지 말도록. 그 녀석은 진작에 마음을 접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났으니까. 심지어 꽤 잘되고 있는 모양이더군.”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뭐냐, 그럼. 날 못 믿겠다는 거냐?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베이스 점프는 아직 해본 적 없지만, 일반 윙슈트 플라잉은 몇 번 경험해봤으니까. 내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가르쳐주지. 나름 스카이다이빙 라이센스도 보유하고 있다.”

망했군.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 알아보긴 글렀다고 봐야 한다.

얘 고집 진짜 세거든.

카타리나가 상식인 포지션에 있는 사람이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렇다는 것뿐이지, 프리실라처럼 평범하디 평범한 여자아이 1에 불과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한해선 끝까지 완고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라서.

누군들 안그렇겠느냐만은, 카타리나는 그 경향이 유독 심한 편이다.

대가리가 깨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사람이 얘니까.

‘그래도 자신 있어 하는 걸 보니 믿어봐도 괜찮을 것 같긴 하네. 라이센스도 있다니까, 뭐… 모르는 사람보다야 낫겠지.’

중간에 이상한 말이 몇 번 오가긴 했지만, 그건 카타리나의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 아닌가.

맡은 일만 잘해주면 그만이기도 하고.

막상 하면 또 잘할지도 모르잖아.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거다. 나중에 놓치고 후회하지 말도록. 나는 아무한테나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 그럼 너한테서 한 번 배워볼게. 네가 자신 있다고 하니까.”

“고맙다. 나를 믿어줘서. 나도 빚진 은혜를 갚기 위해, 성심성의껏 가르치겠다.”

“에이, 은혜까지야. 친구 사이인데 빚지고 그런 게 어딨냐. 서로 불편하면 돕고 그러는 거지.”

“나의 조국, 러시아는 아니다.”

아닌데, 맞는데.

내가 경험해봐서 잘 안다.

빌라에서 자취하던 시절, 밤만 되면 루스끼놈들이 편의점 앞에 삼삼오오 모여 술 파티를 벌여대는 통에, 잠을 못 이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거든.

오히려 너무 친하게 지내서 문제더니만.

곧바로 카타리나의 말에 반박하려 들었으나, 이내 그 생각을 거두었다.

카타리나는 자기 나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토 달면 죽인다’하는 저 표정 좀 보라고.

잘못 입을 놀렸다간 누구 하나 곧바로 회 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옮기고 다른 쪽으로 의제를 돌렸다.

“그, 그래.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

“음, 우선 일정을 좀 검토해본 뒤, 트아카 앱으로 연락을 주든가 하겠다. 나도 내 할 일은 해야 하니.”

“알겠어. 편할 때 연락해. 도와줘서 고마워.”

“가는 건가. 그럼 편히 쉬어라. 내일 다시 만나지.”

용건이 끝나자, 카타리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여자 기숙사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그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히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아서.

혹여 이상한 물이 많이 들기라도 했어 봐.

분명 이 아카데미에 지옥도가 펼쳐졌을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