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내릴걸.(1)
* * *
격통으로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샌가 눈 부신 햇살이 눈꺼풀 틈을 쿡쿡 찔러대며 흐릿해진 의식을 일깨우고 있었다.
‘내가 수정을 깨부순 시각이 어제 저녁 즈음이었으니, 꼬박 한나절 가량을 그 수정 속에서 보낸 셈인가.’
혹시 지난 밤에 있었던 그 모든 일이 꿈결에 보았던 환상일까 싶어, 다급하게 수정부터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정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은 이제 미미하다 못해 흐릿해 보일 정도로 약해진 것이 눈에 띄었으니까.
‘느껴져. 수정 속에 봉인되어있던 마나가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걸. 어떻게 그 기술을 쓰는지 말이야.’
문제는 이것만으론 기술을 완벽하게 재현해낼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니힐리스만을 쓰러트리기 위해 숨겨둔 비기인 만큼, 사용 방법을 니힐리스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기술의 창시자인 노공에게 배우자니, 그는 만나 뵙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이도 아니었다.
수정에 담긴 마나로 보건대,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는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로 보였으므로.
사실상 기술을 혼자 깨우쳐야 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
잘 기억해두라는 노공의 말 대로, 그 순간과 감각 자체는 분명 뇌리에 깊게 새겨두었으나, 안타깝게도 난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다.
한 번 본다고 해서 뭐든 다 따라 할 수 있는 카피닌자 카카시 같은 사람이었다면 진작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 족치고 싶었던 빌런을 패 죽이고 다녔겠지.
하지만, 지금도 어렴풋이나마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리란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그건 내가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지난 세월 동안 이것저것 잡다한 것을 많이 배워둔 덕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클로에의 그 괴상한 특훈이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됐군.
기술의 작동 방식이 클로에와 수련했던 마나 컨트롤과 무척이나 유사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어떻게 쓰는지 갈피조차 못 잡았을 게 분명했으니.
이제 남은 건 2학기를 잘 보내는 것뿐인가.
기술을 완성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니힐리스와 치르게 될 결전까진 아직 제법 여유가 있으니, 조바심을 낼 필요 없을 터.
우선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가 맞겠지.
그야, 2학기엔 실전 임무에 투입되니 말이다.
* * *
순풍이 불어오는 계절.
가을.
아직 완연히 무르익진 않았지만, 창틀 사이로 들이닥치는 선선한 공기는 그것이 돌아왔음을 실감케 하기엔 충분했다.
“날씨 좋네.”
“그러게, 이럴 때 어디 놀러 가면 딱인데. 왜 하필 이 시기에 개강인 거냐.”
“넌 놀 생각밖에 없지?”
“졸업하고 나면 개같이 굴러야 할 게 뻔하니까 그렇지. 강의실에 처박혀서 내내 강의만 듣기도 좀 그런데, 아예 땡땡이쳐버릴까? 세레나 교수님은 그런 걸로 크게 뭐라 하진 않는 분이시잖아.”
“그것도 나쁘진 않지.”
알프레드 녀석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제아무리 모범생이라 해도 가끔은 일탈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지.
나도 어느 정도는 그걸 두둔하고 싶은 사람이고.
머지않아 실전 임무에 투입되고 나면 지금처럼 마음 편히 놀 시간도 사라질 텐데, 아예 미리 놀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뭘 하고 놀면 좋을까 한참을 알프레드와 의논하던 중.
“다들 방학은 잘 보냈니?”
세레나가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위풍당당한 발걸음, 펄럭이는 망토까지.
참, 언제봐도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야.
저 드넓은 마음씨처럼 말이지.
잠깐, 지금 난 숨겨진 자연의 신비를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세레나도 그렇고, 베아트릭스도 그렇고, 카타리나도 그렇고.
어째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특정 부위가 발달하다 못해 아주 넘쳐흐를 지경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라도 있는 걸까.
흥미로운데.
무척이나 검증해보고 싶은 가설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이 어디 흔한가.
본래 내가 살던 세계였다면, 어디 서양 화보에서나 간신히 찾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보기 드문 몸매였다.
대단히 우월한 성장성을 지닌 ‘이 세계의 인류’라 그나마 가능했던 거지.
그에 반해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냐?”
“아무것도 아냐.”
알프레드의 말에 곧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언젠가는 저 이론을 반드시 증명해내리라 다짐하며.
“다들 새 학기 준비는 열심히 준비해왔니?”
“아뇨.”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지금부턴 열심히 준비해야 할 거야.”
“뭐 때문에요?”
“그야, 이번 학기부터 실전 임무에 투입될 예정이니까?”
““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말도 없다가 갑자기 나가서 실제 빌런들과 맞서 싸우라고 하면 누군들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나도 그 사실을 미리 알지 않았더라면 몹시 당황했을 테니.
“걱정하지 마. 현장에 투입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아카데미 측도 잘 알고 있으니까. 보조해줄 인원을 추가로 붙여줄 거야. 그렇게까지 위험한 임무를 맡을 일도 없을 거고.”
“그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당장 나서야 하는 일도 아니고, 이번 학기 내로 딱 두 번만 갔다 오면 되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진 않아도 돼.”
“딱 두 번이라니, 설마, 그게 이번 학기 성적으로 반영되는 건가요?”
“맞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지 않는 대신, 임무에서 낸 실적이 너희 성적에 반영될 예정이야.”
“좆됐네.”
세레나의 통보에 모두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실전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게 성적에까지 반영된다니.
생도 입장에선 골머리가 아파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건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이었지만,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이번 해는 큰 이벤트 없이 무난하게 지나가는 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실전 임무라고 겁을 주긴 했지만, 실제론 좀도둑 같은 녀석들이나 잡는 게 전부인데, 뭘.
사실상 실전 임무라 부르기도 뭣한 수준이었다.
원작에서도 모든 등장인물이 별다른 고비 없이 무탈하게 귀환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내년부터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현장에 투입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혹시 질문 있니?”
“네.”
재빠르게 손을 들어 올린 것은 아이나였다.
“뭔데?”
“만약 어려운 임무에서 도전해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어떤 추가적인 혜택이 있죠? 단순히 쉬운 임무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역시, 누군가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어.”
이건 원작의 정보가 없더라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긴 했다.
책정 난이도는 높으나, 실제 난이도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쉬운, 꿀 빨기 쉬운 임무도 분명 몇 개쯤은 있을 게 확실하니까.
혹은, 다른 이에겐 어려울지라도, 자신에겐 쉬운 임무라든가.
지기 싫어하는 아이나의 성격상, 그런 걸 노리고 한 질문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트아카 앱을 켜면 임무 탭이 생겨있을 거야. 거기서 수락을 대기 중인 임무를 확인해보면, 옆에 별 표시로 난이도를 분류해놓은 걸 확인할 수 있어. 별을 누르면 난이도에 따라 어떤 보상이 지급되는지 잘 설명돼 있어. 단, 특별 보상이라고 적힌 건 무조건 최고점을 달성해야지만 받을 수 있으니, 염두에 둬.”
그 말에 다들 재빠르게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남들이 꿀 임무를 채가기 전에 빠르게 수락해야 하니까.
나야 뭘 해도 상관없다만, 그래도 적당한 게 있는지 확인은 한 번 해봐야겠네.
‘별 1개짜리 임무는 따로 뭔가를 보상을 챙겨주진 않고, 별 2개는 장학금을 조금 주는군. 별 3개와 4개도 큰 보상이랄 건 없고, 별 5개는… 이사장의 추천서라고?’
이건 무조건 해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클로에의 추천서라니.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의 보상이라고.
다른 임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난이도의 임무가 대부분이란 점은 조금 거슬렸지만, 그래도 팀을 꾸리면 확실하게 완수할 수 있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저기요. 교수님.”
“여기 있는 임무들, 다른 생도들과 팀을 짜서 수행해도 되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됐다.
이렇게 되면 무슨 임무를 수주해도 완수는 떼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가 목표로 노리고 있는 건, 고작 완수‘따위’가 아닌 최고점.
따라서, 임무 선정도, 팀원 간택도 신중히 해야 했다.
그렇게 어떤 임무를 받을지, 또 누굴 데려갈지 한참을 고민하던 와중, 눈에 확 들어오는 임무가 하나 있었다.
‘이거다. 소규모 빌런 조직의 아지트를 급습하여, 완전히 소탕하기.’
역시 별 5개라 그런가, 분명 생도 수준엔 걸맞지 않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이미 그림이 그려지는 중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임무를 완수하는 모습의 그림이.
다만,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선 몇몇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나는 우선 그들부터 불러 모으기로 했다.
“아이나, 프리실라, 그리고 알프레드까지. 셋이 잠깐 이리로 와 봐.”
그들은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 하나가 그사이에 끼어있었으니까.
“너희, 나랑 일 하나만 해보지 않을래?”
“그냥 너희 셋이서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난 상관없지만, 알프레드가 불편할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이번 일엔 알프레드가 꼭 필요해. 잘 들어 봐. 무슨 계획이냐면 말이지…”
설명을 듣는 이들의 안색에 경악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종극에는 그 아이나조차 인상을 찡그릴 지경이었으니, 내가 얼마나 파격적인 계획을 굳이 세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실험은 해 봤어?”
“아니?”
“검토는?”
“당연히 안 했지.”
“그런데도 하겠다고?”
“물론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공률 100%나 다름없는 일을 왜 안 한다는 건지.
하나, 다른 이들의 의견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각기 다른 반응으로 저마다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으니까.
이마를 붙잡는 이, 한숨을 내쉬는 이, 외면하는 이까지.
그런다고 해서 그만둘 나는 아니지만.
“나만 믿어. 버스 태워 줄게.”
기대감에 벌써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하는데, 이걸 그만둔다고?
그럴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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