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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화 〉 이어지는 길, 이어 나가는 길.(1) (153/173)

〈 153화 〉 이어지는 길, 이어 나가는 길.(1)

* * *

기나긴 데이트 투어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개학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투어.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정말이다.

이리저리 거취를 옮겨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란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에게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나 같은 일반인에겐 오죽하겠는가.

물론 나 좋으라고 한 일이니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진짜 문제는 투어가 끝난 다음에 찾아오기도 했고.

그 문제란 바로

‘이놈의 수정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거지. 도맡아 보관해온 잭슨조차도 사용법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다고 그랬고.’

그랬다.

마지막 유산이랍시고 받아온 이 수정이 애물단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름 쓸 구석을 찾아보겠답시고 갖은 애를 써본 끝에 내린 결과가 그거였다.

쓰던 마나글레이브의 마나 프리즘과 교체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수정 내부로 마나를 흘려보내는 방법 등,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진작 모조리 시도해봤고, 마지막엔 미친 척하고 수정에다 대고 기도까지 했으니까.

그런데도 수정은 그저 수정은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어떤 행동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박살을 내 봐야 하나?’

아예 수정을 부숴 버린 다음, 거기서 흘러나온 마나를 흡수해 보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유산인 만큼,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 약간은 느껴졌지만, 뭐 어떤가.

이젠 내 건데.

해볼 만한 것들은 진작 다 해보기도 했고.

애초에 쓰지도 못할 물건을 준 사람이 나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마나글레이브로 수정을 내려 벤 순간.

세찬 힘의 격류가 새어 나와, 순식간에 내 가슴을 꿰뚫었다.

* * *

정신을 차리나니, 눈에 비치는 것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이한 장소였다.

‘비슷한 인상을 주는 장소가 분명 있었는데.’

몇 번쯤 생각을 되짚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장소가 어딘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래, 세레나의 보물전과 비슷한 느낌이야.’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외부와 격리된 장소.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세레나의 보물전과 판박이로 닮아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미묘하게 다른 게, 아무리 생각해도 세레나의 보물전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수정은 세레나의 능력과도 큰 상관이 없는 물건이었고.

제아무리 세레나의 서드 어빌리티가 무작위로 아티팩트를 소환하는 능력이라곤 하지만, 난데없이 나까지 보물전에 빨려 들어갈 리는 없지 않은가.

별생각 없이 사용한 세레나의 능력에 이 수정이 간택 받았고, 그때가 마침 내가 수정을 깨부순 시간인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아다리가 딱딱 맞아떨어질 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도대체 여긴 어디인 거지?’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차,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가 누군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은은한 보랏빛 눈동자.

흐릿한 미소 아래로 느껴지는 기쁨.

묵중한 기백.

모든 것이 그녀를 닮아있었기에.

“공께서 혹시 아이나의 조부 되시는 분입니까?”

참 어색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연인의 할아버지에게 건내는 문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고, 나라는 인간과 어울리는 말투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나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입에 잘 붙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이 워낙 범상치 않았기에.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서.”

그는 영문 모를 말을 내뱉으며, 그녀와 똑같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미소를 내게 지어 보였다.

“무슨 뜻입니까?”

“바쳐온 세월이 용렬한 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큼 무상하고 비통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 대답으로 알 수 있었다네. 내 헌신이 흩어져 가는 신기루가 아니었음을.”

“모든 것을 바쳐 만든 기술이 나쁜 자식의 손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뭐 그런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귀군(??)의 말대로 일세. 제대로 이해했어.”

“근데, 뭘 보고 그걸 알 수 있는 겁니까? 전 아직 저에 대해 아무런 소개도 하지 않았는데.”

“힘을 탐하는 자였다면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기술을 취하려는 이였다면 나의 이름, 또는 나의 좌(?)를 거론했을 것이며, 유산을 노리고 온 가문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면 나를 선대 당주라 불렀을 걸세. 하지만, 귀군은 그리 하지 않았지. 그저, 단순히 ‘아이나의 할아버지’라 지칭하지 않았는가.”

아이나는 외모만 이 사람을 닮은 게 아니었다.

판단력과 눈썰미도 빼다 박은 듯이 닮은 수준이었다.

물론 가족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할아버지라 했으니, 당연히 보고 배운 것이겠지만.

“거기서 알 수 있었다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말하자니 조금 무색한 이야기지만, 난 한낱 필부로 기억될 사람까진 아닐세. 그런데도 귀군은 나를 그저 아이나의 친족 정도로만 알고 있으니, 내가 누군지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의미 아니겠나. 필히 아이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테지?”

“그렇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히 설명이 됐으리라고 보네. 내 유산을 얻어내기 위해 이 모든 걸 꾸며왔다는 가설도 세울 수는 있겠지만, 그건 무의미한 가설에 지나지 않아. 내 손녀딸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으니.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전 진작 아이나에게 호되게 당했겠지.”

하긴, 확실히 그렇긴 하네.

허풍 떨기라면 그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는 나조차도 아이나 앞에 서면 고해성사하러 온 성도가 되는 마당에,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긴 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래서, 귀군이 어떻게 이 수정을 얻었는지를 물어봐도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그 전에, 제가 먼저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게.”

“여기가 어디길레 공께서 살아 계실 수 있는 겁니까?”

“분명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네.”

그는 이미 예상한 바였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내 심상 속이지. 그리고 난 죽은 게 맞네.”

“돌아가셨다니요? 지금 이렇게 대화도 잘하고 계시는데요?”

“일종의 사념 같은 것이지. 분명 내 영혼 파편이 깃들어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이냐 하면 그건 아니니.”

“그럼 공께서는 진짜 아이나의 조부는 아니라는 것이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편할 걸세. 인형극에 쓰이는 인형 같은 존재라고. 극 중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인간을 닮은 데다, 명백히 특정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만, 그들이 인간이 아닌 이유는 그 의지가 오롯이 인형사의 것이라 그런 것이지 않나? 나 또한 마찬가지라네. 나는 그저 생전 본체가 지녔던 의식을 모방하고 있을 뿐. 살아있는 것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대충 어떤 인간을 모방한 AI 같은 거라는 거잖아.

무슨 원리로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대에 뒤처진 늙은이의 비유를 이해해줘서 고맙네. 이제 내 질문에도 답변해주겠나?”

“수정을 얻게 된 경위, 말입니까. 그건…”

나는 대충 지금까지의 여정을 설명했다.

아이나와 사귀게 된 일부터 시작하여, 자색 기사단의 입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나온 사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참으로 다사다난하게 지내왔어. 꽤 재밌는 모험담이었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군데군데 이상한 사건이 몇 가지 껴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그러려니 하고 넘기도록 하지. 그래서, 귀군은 이 기술을 왜 배우려고 하는 건가? 이야기를 들어 보면, 딱히 기사단에 애착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일세. 그렇다고 힘을 갈망하는 자도 아닌 것으로 보이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곧바로 수정을 때려 부순 모습으로 보아하건대 유산을 지키기 위함도 아닐 테지.”

“유지를 잇기 위해서입니다.”

“유지를 잇기 위해서라.”

그의 눈꺼풀이 가늘게 좁혀졌다.

생각할 일이 많아졌다는 것처럼.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원래 저에게 왔어야 할 기술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기사도에 뜻을 두고 있는 자도 아니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지는 힘을 통제할 자신도, 책임질 자신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지?”

“마땅히 갔어야 할 사람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아이나라는 이야기인가?”

“아이나이기도 하고, 저이기도 하겠죠. 저희를 하나로 생각할 때만 성립하는 이야기기도 하고요.”

“어째서지?”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다만, 그것이 긍정적인 반응인지, 부정적인 반응인지는 나로서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와 같은 눈을 한 그의 눈 또한, 마찬가지로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저희는 모두 이어 나가야 할 유지가 있습니다. 저는 기사단의 유지를, 아이나는 공의 유지를. 허나, 이 수정이 있다고 해도 그녀 혼자선 유지를 이어 나갈 방법이 없고, 저는 이어 나갈 수는 있되, 그녀가 없었다면 유지를 이어 나갈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옳은 말일세. 애초에 아이나에게 물려주지 않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니까.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네.”

“그러나, 이 유산은 분명 아이나의 것이기도 할 겁니다.”

“무슨 소리인가?”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공께서 굳이 이렇게 의식을 남겨두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순히 기술만을 전수해주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방식을 충분히 마련해 냈을 겁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던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머금고 있는 말은 있었으니까.

단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을 뿐.

“제게 필요한 건 기술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아이나에겐 기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고요. 그러나, 이 유산에 담긴 것은 단순한 기술이 전부가 아닙니다. 공과 재회할 기회, 공과 작별할 기회, 모두가 담겨 있으니까요. 설령 그 모든 게 모조품일지라도, 그녀에겐 무궁한 가치를 지닌 물건일 겁니다. 뜻을 이어 나갈 증거를 새겼으니.”

“…”

“그건 결코 저에게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돌려주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이 기회를 빌려서.”

“…귀군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지?”

“아무것도요.”

근거 따위, 있을 턱이 없었다.

있어서도 안 됐고.

마지막으로 정해놓은 작별 인사라면, 그가 더 잘 알지 않겠는가.

“그냥 막연하게 드는 생각일 뿐입니다. 아이나라면, 단 한 번만이라도 기술을 보는 순간 공께서 남긴 의미를 알아차려 줄 거라고. 전 최선을 다해 그 뜻을 전해주고 싶을 따름이고요.”

“그게 귀군이 말하는 ‘유지를 이어 나가는 것’인가.”

“이어져 있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때때로 끊어진 선로를 마주하더라도, 기꺼이 자신의 길을 내줄 각오를 한 사람이 곁에 있으니 말입니다.”

“멋지군.”

아이나는 과거를 좇는 그림자를 떨쳐내길 바라고, 나는 미래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길 바란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뒤를, 그녀가 내 앞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는 곳을 향해 불을 밝히고, 돌아온 길을 향해 한 번 더 밝히며.

“내 친히 미래의 손서(?)에게 알려주도록 하지. 내 모든 것을 담은 오의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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