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화룡점정.
* * *
줄곧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잭슨은 더 이상 지겨움을 참아낼 수 없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재미는 실컷 보셨나?”
그 말에 괜스레 무안함이 느껴져, 품에 안긴 아이나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네.”
“너, 방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주인이 나타났다고 그랬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는 잘…”
“제대로 안 들었군.”
잭슨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뭐, 틀딱의 옛날이야기 따위 별로 듣고 싶지 않을 테니, 이해는 한다만,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라서 말이지. 꼭 들어줬으면 한다. 널 부른 이유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길레요?”
“네가 보라색 검신을 뽑을 수 있게 됐단 사실을 알게 됐거든.”
역시 들켰나.
언제까지고 계속 숨기고 있을 수만도 없으니, 밝힐 날이 올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의외로 많이는 놀라지 않는 눈치네? 호들갑이라도 떨어 재낄 줄 알았다만.”
“잭슨 씨처럼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분명 알아차릴 거라곤 예상했거든요. 방법이야 알 수 없지만.”
“그것도 그렇군.”
“일단, 절 부른 이유부터 알려주시겠습니까.”
“흐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잭슨은 이내 결정했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아이나의 할아버지와 제법 친한 사이였지. 가문에서 파문된 이후로도 나와의 친분은 쭉 유지했을 정도니까.”
“제 조부께서요? 제 연락은 절대 받지 않으셨었는데…”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이나의 말문이 트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래. 아무래도 가문에서 가지는 입지 차이를 고려해서 무시한 것 같았어. 나야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지만, 넌 아니니까. 파문된 자신과 계속 연락한다는 걸 알면 가문 내에서도 아니꼽게 보는 사람이 분명 생겼을 테지. 나름의 배려였다면 배려야.”
“저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나요?”
“때때로 하곤 했어. 대부분은 미안하다는 이야기였지.”
잠깐이지만,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이내 마음을 다잡은 모양인지, 금세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저를 잊지는 않았었군요.”
“그 양반은 다른 미츠루 녀석들과는 다르게 유달리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이야기를 계속해주시죠.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잭슨. 미안해, 성진.”
“아무튼,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너희 할아버지는 그냥 훌쩍 떠나신 것은 아니었다. 최후의 결전 이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게 있었지.”
“그게 가보, 백면검(???) 아닌가요?”
“그것뿐이라면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았겠지? 그 이외에도 따로 내게 남긴 게 있었어.”
그렇게 말한 잭슨은, 방금까지 게임에서 사용했던 분동과 똑같이 생긴 분동 하나를 품속에서 꺼냈다.
난 그걸 보자마자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고.
잭슨이 속임수를 써서는 아니었다.
그건 진작에 예상하던 바였으니까.
내가 놀란 이유는, 잭슨이 그 분동의 머리 부분을 돌려 열자, 안에서 익숙한 모양새의 자주색 수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래, 마나 프리즘과 렌즈의 제작에 이용되는 크리스탈이야. 색깔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막대한 양의 마나를 품고 있다는 걸.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물건 중에서 이만한 가치를 지니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그렇겠죠.”
“그런데도, 너는 이 크리스탈보다 값어치 있는 물건을 내보였지. 갑자기 그런 물건이 어디서 났을까? 마땅히 숨길만 한 장소조차 보이지 않는 이 분동 어딘가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물건이. 그것도 딱 자주색 마나 밀도를 유지하는 크리스탈보다 아슬아슬하게 더 가치 있는 물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잭슨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빨리 사실을 토해내라는 투로 날 재촉했다.
“네, 맞아요. 전 완전한 보라색 검신을 뽑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죠. 그걸 실체화시킬 수도 있고요. 근데, 아이나의 조부께서 남겼다는 이 수정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죠?”
“흐음, 여기서부턴 다른 사람이 듣긴 곤란한 내용인데… 아이나, 잠시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어?”
“할아버지께서 남긴 유산이라면, 저도 그것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이건 ‘미츠루 가’에 내려오는 유산은 아니거든? 너와 무조건 관련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게다가, 약조까지 했었단 말이지.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당사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유산의 내용이 뭔지 알려주지 말라는 약조를.”
잭슨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당연히 아이나도 거기에 맞서리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그녀는 겸허히 잭슨의 축객령을 받아들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자리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나는군. 한참이나 입씨름을 벌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괜찮아요. 자격을 가진 이가 다름 아닌, 성진이니까요.”
“아이고, 그래. 네 남편 잘나셨다. 빨리 나가기나 해.”
“네,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죠.”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
잭슨이 이야기를 시작한 시각은 그 소리가 완전히 멎어 들고 나서였다.
“한창 좋을 때지?”
“부정은 못 하겠네요.”
“그래, 너희들만 좋다면 뭔들 상관없겠지.”
“일단, 그놈의 유산이란 물건이 뭔지부터 설명해주시죠.”
“쪽팔려 하긴. 아무튼, 이건 단순히 마나가 담긴 크리스탈이 아니야. 그 자식의 염원, 갈고 닦아온 기술, 그리고 그걸 아우르는 힘이 모두 담긴, 하나의 정수 같은 물건이지.”
그 자식이라 함은, 분명 아이나의 조부를 말하는 것일 터.
그런 사람의 힘과 기술이 모두 집약된 정수라니.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군.
아무리 보라색이라 하지만, 한낱 마나 실 따위가 어떻게 저것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제 보라색 마나 실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 같은데, 제가 이긴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나도 잘은 몰라. 난 마나글레이브도, 기사단인지 뭔지 하는 놈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으니까. 녀석의 말을 인용하자면, ‘점정(??)이 빠지면 화룡(?)도 뭣도 아니다. 완성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날 때 비로소 화룡(?)이 되는 법.’이라고 하더군.”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영식을 배운 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긴 했지. 나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서도.”
그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나글레이브의 달인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법한 인물들이 고안해낸 대단한 기술만 대거 포진해있는 검법이지만, 그 기술 중 어느 것 하나 완성된 기술이 없는 검법.
그게 영식 아니던가.
점정이 찍혀있지 않은 화룡이라는 비유만큼 적절한 것도 없었다.
점을 찍어줄 이가 나타나야 비로소 용이 되어 날아가는 법 아닌가.
즉, 저울은 완성되지 않은 화폭 속의 커다란 용보다, 화폭을 완성하는 점에 더 가치를 높게 둔 셈이었다.
화폭을 완성할 자색 검신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한 모양이네.”
“조금은요.”
굳이 염원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겠지.
‘자신이 고안해낸 기술을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아마 그것이 ‘염원’이었으리라.
“나도 눈치라는 건 있는 사람이야. 제아무리 아이나라고 해도, 이건 넘겨주면 안 되는 물건이라는 걸 받은 그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 마땅히 그리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자격 있는 자의 손에 넘겨달라.’ 그게 그 녀석의 마지막 부탁이었으니까.”
“부담이 제법 컸을 것 같은데요. 따지고 보면 자색 기사단도 빌런으로 분류되는 집단이잖습니까. 그런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 남긴 힘과 기술을 후계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관하고 있는다는 건, 몰랐다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요.”
“친구니까.”
잭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령 그 유산이 배척받는 악으로 분류되는 자색 기사단의 힘일지라도, 친구의 마지막 부탁이라면 맡아주는 게 마땅한 인의다.”
바보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믿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의(?)는 헤아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울림에서 오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이걸 받지 않으면 아주 못된 놈이 될 것 같네요.”
“잘 알고 있군그래. 그럼, 부디 그림에 마지막 점을 찍어주겠어? 이 늙은이가 이렇게 고개까지 숙여 부탁하는데,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자기 좋을 때만 늙은이가 되는군요.”
“허리 아프다. 빨리 받아 가라.”
“예, 그리합죠.”
이 수정에 담긴 모든 뜻을 이어나가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래 나의 연이 아니었기에.
하나, 도전할 가치는 남아있었다.
본래 주인이었어야 할 그녀가, 여전히 나의 연이었기에.
그러므로, 이어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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